전시를 기획한 심광현씨가 지난해 그린 수채화 <방학동의 아침>. 1층 들머리에서 볼 수 있다. 심광현 제공
요즘 미술동네엔 연일 “일단 사자!”를 외치는 이들이 득실거린다. 지금 국내 화랑가 매장과 화랑들이 차린 미술품 장터의 분위기는 과열이란 말이 나올 만큼 뜨겁다.
날개 돋친 듯 작품들이 팔리는 장사판의 활기만이 한국 미술판의 전부일까. 전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시장판 딛고 문명전환기 한국미술의 지평을 열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군의 미술인들 또한 꿈틀거림을 멈추지 않는다. 지난 16일 한국 미술판에서는 이를 보여주는 독특한 전시 풍경이 연출되었다. 이날 오후 서울 강남 대치동의 대형 전시장 세텍에서 국내 최초의 미술품장터인 2022한국화랑미술제가 흥청거리는 분위기 속에 개막했을 즈음, 서울 강북 용두동 안암천변의 허름한 삼육빌딩 건물 1~3층에서는 1980~90년대 이른바 민중미술로 불렸던 리얼리즘 작가 26명이 작품 난장을 개막했다. ‘그림의 새로운 시작-문명전환과 민중의 다성적 리얼리즘을 감각하다’란 거대한 제목이 붙은 특별기획전이다.
이날 저녁 삼육빌딩 1층에 모인 작가들과 청중 앞에서 전시장 유리창을 칠판 삼아 문명전환 시대의 새로운 리얼리즘 미술의 요목들을 적어 내려가면서 열변을 토한 이가 있었다. 1~3층에 들어찬 출품작들을 그림과 이야기의 역사지리, 인지생태학적 가치란 관점에서 재구성하고 의미를 부여한 이 전시의 기획자 심광현(66)씨다. 그는 지난 30여년간 진보 좌파 진영에서 활약해온 문화이론가이자 잘 알려진 문화논객이다. 원래 1980년대에는 한국 리얼리즘 미술의 보루와도 같았던 서울미술관의 기획실장을 역임하며 리얼리즘 미술진영의 비평가이자 기획자로 활약했다. 지난 1995년 광주비엔날레 창설 당시 졸속개최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미술 본류에서 벗어났고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가 되어 사회 문화이론 연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좌파문화진영의 대표적인 이론가이자 <문화과학>을 발간하고 시민단체 문화연대의 활동가로도 뛰었던 그가 교수직을 정년 퇴임하면서 회향하듯 미술기획자로 나서 만든 자리가 바로 이 전시다. 문화연대와 희망읽기가 공동주최한 전시의 참여 작가는 김경주, 김영진, 김재홍, 김정헌, 김지원, 김천일, 김태헌, 류연복, 민정기, 박불똥, 박영균, 박은태, 박진화, 박흥순, 신학철, 심광현, 이명복, 이선일, 이윤엽, 이종구, 이태호, 임옥상, 정정엽, 주재환, 최진욱, 황세준씨다.
‘그림의 새로운 시작’전이 차려진 서울 삼육빌딩 3층 전시장. 오른쪽에 가장 크게 보이는 작품이 김영진 작가의 대작 <승자독식>이고 그 옆으로 주재환 작가의 빨랫대야 작품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걸려 있다. 노형석 기자
80년대 리얼리즘 미술운동의 시초로 평가받는 ‘현실과 발언’ 멤버들부터 ‘포스트민중미술’ 계열의 후배 작가 등 다채로운 사실주의 미술가들의 신작, 근작, 구작들이 층을 달리하면서 각기 벽에 나붙거나 내걸리거나 바닥이나 공간에 설치하는 방식으로 어우러졌다. 기획자는 전시장을 한 편의 영화처럼 26개의 신과 11개의 시퀀스, 3개의 막으로 구성하면서 저작 등에서 역설해온 자연생태, 인간생태, 사회생태의 유기적 네트워크에 대한 담론들을 풀어냈다. 이명복 작가의 제주 곶자왈 그림과 이종구 작가의 해남 감자밭의 농부들 군상, 김천일 작가의 용광로 풍경, 링위 복서들의 처절한 사투 끝물을 그린 김영진 작가의 <승자독식>, 주재환 작가가 실제 빨랫대야를 풍자적 작품으로 바꾼 <유전무죄 무전 유죄> 등이 펼쳐진다. 별도의 전시공간에 심씨의 담론을 일종의 도표와 다이어그램으로 설명한 자리도 마련했다. 전시장은 낮 1시부터 밤 9시까지 개방하고 있다. 저녁 때 찾아가면 에드워드 호퍼의 심야 식당 그림처럼 어둠 속에서 건물 바깥의 창으로 비치는 1~3층 전시장의 허연 조명빛이 눈에 안기는 풍경을 먼저 만나게 된다. 눈이 예민한 관객은 출품작보다 전시장 건물 바깥의 도시 구석 공간들이 유령 같이 스멀거리는 이미지의 환영을 더 강하게 체감할 수도 있을 듯하다.
심씨는 출품작 해설글을 쓴 부인 유진화씨와 전시용 도록을 겸해서 같이 펴낸 <그림의 새로운 시작>(희망읽기)에서 기후·생태 위기와 양극화가 깊어진 지금 지구촌의 유동적인 상황이 문명전환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작품을 제작하는 몸의 날 선 감각과 느낌을 구현하는 감성적 리얼리즘과 세상사 이야기의 폭넓은 교감을 강조한 민중적 리얼리즘으로 인식하는 미술의 새 지평을 만들어내자면서 이번 전시가 이런 이상을 향한 실천의 시작임을 설파하려 한다. 하지만, 실제 전시의 짜임새와 내용들을 보면서 그가 주창한 담론들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반영되었는지 짐작하기란 난망할 따름이다. 시장과 자본이 시각예술가의 창작과 연대를 잠식해버린 최근 미술판의 막막한 현실 앞에서 전환기 예술의 사회적 구실과 정체성을 되묻게 하고 불가능한 이상을 꿈꾸는 예술가의 본령을 생각하게 하는 쟁론의 마당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29일까지.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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