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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1962년 거장의 자취 그대로…‘새로운 박수근’을 보다

등록 2022-02-11 04:59수정 2022-02-11 08:53

역대 최대규모 ‘박수근 회고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서
미8군 첫 개인전 현장 재현
새 명작·사료 발굴 눈부셔

창신동 시절 미공개 작품들과
활동무대 반도화랑 조명까지
전시 자체가 보기드문 수작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2전시실에서 관객이 박수근의 대표작 <나무와 두 여인>(1962)을 감상하고 있다. 왼쪽 가벽에 내걸린 작품은 박수근의 또 다른 대작인 <할아버지와 손자>(1964)다. 가장 안쪽 밝은 공간은 1962년 박수근의 미8군 부대 내 첫 개인전 현장을 재현한 전시장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2전시실에서 관객이 박수근의 대표작 <나무와 두 여인>(1962)을 감상하고 있다. 왼쪽 가벽에 내걸린 작품은 박수근의 또 다른 대작인 <할아버지와 손자>(1964)다. 가장 안쪽 밝은 공간은 1962년 박수근의 미8군 부대 내 첫 개인전 현장을 재현한 전시장이다.

검푸른 어둠 속에서 거장 박수근(1914~1965)의 <아기 업은 소녀>가 빛을 뿜으며 스며져 나왔다. 업힌 아기의 볼은 청회색 저고리를 입은 소녀의 등짝에 살포시 짓눌렸다. 70년 전 어려운 시절 동생을 돌보는 언니·누나의 옆모습이다.

<아기 업은 소녀> 뒤편을 본다. 두 손을 꼭 잡고 쪼그려 앉은 여인이 보인다. 눈을 내리깔고 체념과 의지 사이 어딘가의 절제된 표정을 짓고서 관객을 응시한다. 다시 그 너머엔 가지를 벌린 나무를 사이에 두고 아기를 업고 서성거리는 여인의 뒷모습과 동이를 이고 어디론가 황망히 가는 여인이 보인다. <나무와 두 여인>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유동> <할아버지와 손자> 같은 큰 대작들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받으며 곳곳에 나타난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이자 박완서 소설 &lt;나목&gt;의 배경이 된 작품인 &lt;나무와 두 여인&gt;(1962). 2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이자 박완서 소설 <나목>의 배경이 된 작품인 <나무와 두 여인>(1962). 2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저 멀리 안쪽으로 밝게 빛나는 소실점 같은 전시장이 보인다. 이 전시장은 우리가 잘 몰랐던 1962년 미8군 부대 안 박수근의 첫 개인전 현장을 재현한 것이다. 그 안에는 거의 처음 공개된 실직한 남자들의 처연한 널브러짐과 서울 창신동 판잣집의 따듯한 풍경들이 숨쉬고 있었다. 이렇게 명작과 사료들이 잘 직조된 근대 전시를 본 적이 있었던가.

박수근의 역대 최대 규모 회고전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2전시장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작품이 되는 풍경을 연출한다. 이번 회고전은 한국 근대미술 전시들 가운데 형식과 내용 면에서 단연 독보적인 성취와 혁신을 이루었다. 명작을 많이 가져왔다거나 구성을 솔깃하게 꾸렸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이 전시의 미덕은 미술사 전시의 본령과 기본을 탄탄하게 갖췄다는 데 있다.

&lt;실직&gt;(1961). 1962년 미8군 사령부 도서관에서 열린 박수근의 첫 개인전에 출품됐던 작품이다. 전시 뒤 알래스카대학교 박물관에 팔렸다가 다시 국내에 반입된 것으로 전해진다.
<실직>(1961). 1962년 미8군 사령부 도서관에서 열린 박수근의 첫 개인전에 출품됐던 작품이다. 전시 뒤 알래스카대학교 박물관에 팔렸다가 다시 국내에 반입된 것으로 전해진다.

전시는 강원도 양구 출신으로 12살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뒤로 보통학교만 나와 독학으로 위대한 근대 거장이 된 박수근의 알려지지 않은 면모들을, 새롭게 발굴한 작품들과 아카이브 사료들의 어울림을 통해 보여준다. 우툴두툴한 화강암질 화면에 1950~60년대 여인과 아이들로 대표되는 도시와 농촌의 서민 군상들을 서늘하면서도 따듯한 모순된 감성으로 담아냈던 발자취들이 유화, 수채화, 드로잉, 삽화 등 총 174점과 화집, 스크랩북, 스케치, 엽서 등 자료 100여점 등을 통해 새롭게 다가온다.

박수근은 한국전쟁 때 월남해 서울 창신동 한옥에 가족과 함께 자리 잡은 뒤, 생계를 위해 미군부대 매점(PX)에서 초상화를 그렸고, 반도화랑에 그림을 납품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평단과 수집가들의 호평 속에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나 실명과 간경화 등으로 51살에 세상을 떠났다. 세간에는 가난과 세상의 몰인정에 맞선 불운한 화가 이미지를 덧씌운 흐름이 지배적이다.

1전시실에 나온 &lt;절구질하는 여인&gt;(1952).
1전시실에 나온 <절구질하는 여인>(1952).

2전시실에 나온 &lt;앉아 있는 여인&gt;(1959).
2전시실에 나온 <앉아 있는 여인>(1959).

전시는 이런 통념을 깨부수려 한다. 그래서 ‘독학’ ‘전후(戰後) 화단’ ‘서민’ ‘한국미’ 4가지 열쇳말 아래 4개의 소전시를 꾸린다. 창기작과 작업에 밑바탕이 된 화집, 자료 등을 소개하는 1부 ‘밀레를 사랑한 소년’과 그의 전람회 출품 대작과 첫 개인전 작품들을 모은 2부 ‘미군과 전람회’, 작업의 전성기 공간인 창신동 시절의 서울 풍광과 주요 작품들을 담은 3부 ‘창신동 사람들’, 그의 주된 작품 판매처였던 반도화랑의 미국인 고객들과의 인연과 그들이 눈여겨본 박수근 작품의 미학을 조명하는 4부 ‘봄을 기다리는 나목’이다.

새로운 명작과 사료들의 발굴이 눈부시다. 1933~34년 수채로 그린 꽃과 풍경화, 피카소·레제 같은 입체주의 작가로부터 영향받았음을 보여주는 숱한 베끼기 습작들. 그가 소장했던 조선 향토색 깃든 관광용 그림엽서 등이 그렇다. 2회 국전 특선 수상작 등 참여한 주요 전람회 출품작들을 전시하고, 미군 피엑스 초상화가 시절과 용산 미군부대(SAC) 도서실에서 열린 개인전(1962) 작품을 소개한 대목은 이번 전시의 고갱이다. 박완서 작가가 그와 생전 피엑스에서 같이 근무하며 교분을 맺은 인연으로 쓴 소설 <나목>의 주요 대목을 언급하며 소설의 모티브가 된 <나무와 두 여인>을 새롭게 감상해보는 대목은 큰 감흥을 선사한다.

1전시실에 나온 초창기 습작. 프랑스 미래주의 작가 페르낭 레제의 작품을 그대로 본떠 그렸다. 왼쪽 하단에 일본 가타카나로 레제라고 표기하고 제작 연도인 듯한 ‘1935’란 숫자도 적었다.
1전시실에 나온 초창기 습작. 프랑스 미래주의 작가 페르낭 레제의 작품을 그대로 본떠 그렸다. 왼쪽 하단에 일본 가타카나로 레제라고 표기하고 제작 연도인 듯한 ‘1935’란 숫자도 적었다.

사선형의 들머리 동선과 1950~60년대 서울 사람들의 일상을 포착한 사진가 한영수의 다큐사진을 통해 박수근의 창신동 시절을 <노인들의 대화> 같은 미공개 작품들과 함께 입체적으로 재구성해보도록 시도한 3부의 전시 틀거지는 파격적이다. 박수근의 주된 활동 무대였던 서울 을지로입구 반도화랑의 실내를 한지 구성으로 재현해 마거릿 밀러 같은 외국 컬렉터와의 교류를 실물 편지와 작품 등으로 소개한 4부도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콘텐츠였다.

기획자는 박수근의 작품들을 구성하면서 작가가 살던 동시대의 시대상과 공간 속에서 함께 호흡하려 했다. 이런 맥락에서 전시장의 시공간을 철저히 당대대로 재현하고, 진위 논란에서 자유로운 양질의 작품들로 출품작을 엄선했다. 1980년대 이후 새롭게 학계에서 언급되거나 약간의 논란이 있는 작품은 대작이나 미공개작이라도 뺐다. 과거 이중섭이나 박수근 전시에선 위작 시비나 출품작을 고르는 잣대에 논란이 따라붙었지만, 이번 전시는 시비가 사실상 전무하다.

이번 전시는 고만고만한 소품과 빤한 연대기만 되풀이하던 박수근 전시의 구각을 깨고 작품 발굴과 주제의식 측면에서 새 돌파구를 열었다. 거장이 살았던 당대 시공간적 상황 속에 자신을 몰입시키며 열정을 쏟아부은 김예진 학예사의 노력과 성취는 상찬을 받기에 충분하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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