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승 작가 전시가 열리고 있는 갤러리현대 지하 1층. 미러볼들이 반짝이는 가운데 서울 이태원 게이클럽 공간이 재현됐다. 노형석 기자
‘이태원의 왕관’이 국내 최고 상업 화랑 전시장으로 들어왔다. 국내 성소수자(퀴어)들 사이에 유명한 명소인 서울 이태원 킹클럽의 황금색 왕관 로고와 홀 공간이 설립 50돌을 넘긴 국내 굴지의 화랑인 갤러리현대의 서울 사간동 본관 지하 전시장에 재현된 것이다.
지난달 17일부터 이곳에 차려진 퀴어 작가 이강승(43)씨의 개인전 ‘잠시 찬란한’의 풍경은 미술판이 바뀌었음을 실감하게 한다. 1990년대부터 조금씩 면모를 드러냈던 한국 퀴어 아트의 역사에 획기적인 점을 찍는 자리다. 관객들은 음악을 들으면서 미러볼이 현란한 빛점들을 사방에 흩뜨리는 킹클럽의 내부를 체험하게 된다. 100여종류의 금색 물감을 퍼즐 형태로 칠한 클럽의 크라운 로고가 안쪽 벽에서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가운데, 성소수자들의 피부나 얼굴 등을 파편적으로 세밀하게 묘사한 이 작가의 흑연 드로잉이 내걸렸다.
서울서 태어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 중인 이 작가는 서구·백인·남성·이성애 중심으로 서술된 주류 역사에 도전하고, 그 서사에서 배제됐거나 잊힌 소수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작업을 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1980년대 이래 미국과 한국의 퀴어 아티스트들이 남긴 작업들과 아카이브, 서울 낙원동과 뉴욕의 허드슨강 피어 등 성소수자들이 노닐던 시공간 등을 조사하거나 자료를 확보하면서 드로잉과 금실 자수 작업 등으로 전유하고 재해석했다.
이강승 작가의 흑연 드로잉. 1980년 미국 뉴욕의 퀴어 예술가 쳉퀑치(쩡광즈)가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만든 당시 청년 예술가 숀 매퀘이트의 포스터를 그대로 전사한 것이다. 노형석 기자
눈길을 단연 사로잡는 건 섬약하고 예민한 인상을 주는 특유의 드로잉이다. 특히 1980년 뉴욕에서 전위적 예술 활동을 벌였던 홍콩 출신의 퀴어 예술가 쳉퀑치(쩡광즈)가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만든 당시 청년예술가 숀 매퀘이트의 포스터를 전사하고 일부를 태운 이미지를 드로잉한 작업은 이 전시의 고갱이라 할 만하다. 이 작가는 전시를 앞두고 에이즈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은 50대 후반의 숀 매퀘이트에게 협업을 제안했는데, 션은 청년 시절 포스터 속 의상을 입고 다시 포스터처럼 포즈를 취한 동영상과 사진을 찍어 보여준다.
최근 미국 마이애미 바젤 등 국외 유명 아트페어를 비롯한 세계 미술시장에서는 퀴어 아트와 제3세계 작가들의 작품 등 기존 아트신에서 소외됐던 소수자 아트가 컬렉터들의 새로운 주목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갤러리현대가 사상 처음 국내 메이저 화랑 무대에 퀴어 아트를 조명한 데는 이런 마케팅 트렌드의 변화를 읽어낸 측면도 있어 보인다. 31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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