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엄 헤드의 ‘보니’전에 나온 전나환 작가의 그림 <친구>(The Mate). 실제로 동거하고 있는 게이 쌍과 그들이 사는 집을 가족사진 구도로 포착한 이 그림은 게이들의 현재적인 삶을 드러내 보여준다. 노형석 기자
옛 선비들이 정신 수양을 위해 곧잘 그렸던 난초 그림을 보며 성적 영감을 느낀 조각가가 있었다. 난초 잎과 줄기가 강인하게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자태에서 남성이 정액을 방출하는 순간을 상상했던 것. 마음이 동한 작가는 곧장 비디오 영상물을 하나 만든다. 작품 스크린 속에 붓으로 죽죽 난초를 치는 모습과 남성의 사정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 번갈아 뒤섞이며 나타났다. 그는 <훈련 또 훈련, 정진 또 정진>이란 제목을 붙였다.
이 야릇한 작품을 만들어 내놓은 이는 젊은 퀴어 조각가 최하늘(30)씨다. 지난 9월 초부터 서울 원서동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개인전 ‘벌키’(Bulky)를 열고 있다. 제목 ‘벌키’는 덩이가 크다는 뜻을 지닌다. 근육량을 늘려 보기 좋게 덩치를 키우는 것을 연상시키는데, 흙이나 석고 등을 빚거나 덧붙여 모양을 만들어가는 소조 기법과 함께 빈약한 국내 퀴어 아트의 뼈대에 살을 붙여가고자 하는 의지로도 해석되는 표현이란 게 작가의 설명이다.
실제로 이번 전시에서 그는 비주류 성소수자를 뜻하는 퀴어의 인식과 상상력을, 역시 미술판에서 소외된 비주류 장르인 조각물과 미디어아트 작업 등에 투영시켜 재치 있고 기발한 이미지와 형태로 발동시킨다. 전근대기 고상한 문인의 예술이었던 난초화의 이미지를 게이의 정체성을 지닌 자신의 심상과 욕망의 세계 속에서 전혀 다른 퀴어 문화의 맥락으로 틀어버린 것은 일례에 불과하다. 작가는 고대사 속 신라 창건 신화 주인공인 박혁거세의 알을 길쭉한 흰빛 막대 위에 올려진 정체 모를 허연 알덩어리로 표현하는데, 그 모습이 얼핏 발기한 남근의 인상으로 다가온다. 불온한 활력이랄까. 또 다른 순교설화의 주인공인 신라 불교 전파자 이차돈이 목 베인 순간 흰 젖을 뿜어낸 뒤 세개의 머리통으로 분열되는 상의 모습을 역시 직립한 좌대 위에 걸쳐놓는데, 처연하다기보다 관능적이고 신비스러운 상징의 대두처럼 읽힌다.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 차린 게이 작가 최하늘씨의 개인전 현장. 합성수지로 된 몸체에 메탈 갑옷을 입힌 <벌키>란 인체 조형물과 실내용 자전거에 길쭉한 촉수 모양의 줄을 결합시킨 <일립티컬>이 보인다. 성소수자의 퀴어적 상상력을 발현시킨 작품들이다. 노형석 기자
지금 일상에서 현대인들이 벌이는 생활 행위의 단면들을 퀴어적 접근으로 재해석한 조형물로 드러낸 작업들은 ‘벌키’의 또 다른 축이다. 전시 들머리에 일종의 릴레이식 배치로 이뤄진 연속 작업들이 이런 맥락에서 흥미롭다. 합성수지로 된 남성의 몸체에 번쩍거리는 메탈 갑옷을 입힌 <벌키>란 인체 조형물과 실내용 자전거에 길쭉한 촉수 모양의 줄을 결합시킨 <일립티컬>, 다른 색깔의 띠를 맨 두개의 조형물이 얽힌 <씨름>, 환자와 치료사를 의미하는 검은색과 흰색 조각이 마사지용 침대 위에서 뒤얽힌 모습을 담은 <도수치료>는 성적 교합에 대한 판타지와 몸 키우기에 대한 게이 특유의 욕망이 발현된 작품들이다.
아라리오뮤지엄에서 별로 멀지 않은 서울 계동 뮤지엄 헤드에 최 작가를 포함한 게이 작가 9명의 연합전 ‘보니’(20일까지)가 차려진 것도 의미 있게 다가온다. ‘뼈가 다 드러나는’이라는 뜻을 지닌 제목처럼 전시는 서울에서 활동하는 게이 작가 9명에게 그들의 성정체성과 작업의 관계를 질문하면서 작업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9인9색 작업들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주로 회화와 조각 매체를 다루는 작가들은 다양한 작업 양상을 보여주면서도 뼈에 해당하는 퀴어의 정체성들을 은연중 드러낸다. 세상에 대한 고정적인 관념에 얽매이길 거부하는 유동적인 성소수자의 생각들이 작품 곳곳에 배어 있다.
이우성 작가가 그린 연필 드로잉. 부모와 연인, 자신의 손이 겹친 모습과 ‘사랑합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등의 글귀가 겹쳐진 도상을 통해 게이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연대, 결속을 표현했다. 노형석 기자
우선 눈에 들어오는 작품은 전나환 작가의 그림 <친구>(The Mate)다. 실제로 동거하고 있는 게이 쌍과 그들이 사는 집을 가족사진 구도로 포착한 이 그림은 게이들의 현재적 삶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이우성 작가가 그린 연필 드로잉도 볼수록 강렬한 잔상이 남는 작품이다. 부모와 연인, 자신의 손이 겹친 모습과 ‘사랑합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등의 글귀가 겹쳐진 도상을 통해 게이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연대, 결속을 표현했다. 전통 불화 <심우도>의 불교신상들 모습으로 성소수자의 존재를 형상화한 박그림 작가의 대작은 종교화와 퀴어아트를 접목시킨 드문 사례다. 비물질이 일상이 되는 시대에 사회적 소수자인 퀴어가 실재하는 조형물, 그림이란 재래식 매체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예술적 실험으로 물화시키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전통 불화 <심우도>의 불교신상들 모습으로 성소수자의 존재를 형상화한 박그림 작가의 작품.
미술판이 시장 활황으로 뜨거운 요즘 서울 북촌에 펼쳐진 두개의 퀴어아트 전시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이벤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 예술의 토양에 또 다른 대안 예술로서 퀴어아트의 동시대성을 얻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소통하려는 시도의 결과물이란 점을 눈여겨볼 만하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