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5년(세조 11년)에 만든 금속활자인 을유자(한글)가 진열장에 전시된 모습이다. 당시 세조가 서울 탑골공원 자리에 원각사를 세우면서 <원각경>을 간행하려고 만든 한글·한자 활자다. 지난 6월 인사동 피맛골 발굴조사에서 처음으로 한글 을유자 실물 214개가 무더기로 나왔다. 한자 활자는 실물이 전하지 않는다. 국립고궁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의 ‘인사동 출토유물 공개전’에서 선보이고 있다. 노형석 기자
지난 6월 서울 인사동 피맛골 땅 속에서 극적으로 출토돼 큰 화제를 모았던 조선 세종~세조 대 금속활자를 비롯한 주요 금속 유물들이 다섯달 만에 시민들에게 공개된다.
유적을 발굴한 재단법인 수도문물연구원(원장 오경택)과 국립고궁박물관은 3일부터 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Ⅱ에서 발굴 유물 1755점을 모두 선보이는 ‘인사동 출토 유물 공개전’(12월31일까지)을 연다.
전시는 1부 ‘인사동 발굴로 드러난 조선 전기 금속활자’, 2부 ‘일성정시의와 조선 전기 천문학’으로 꾸려졌다. 무엇보다도 발굴의 핵심 유물이었던 금속활자들이 한자리에 모두 나왔다는 점이 주목된다. 당시 발굴에서는 1434년 갑인년 세종 대에 개발된 조선의 대표적인 한자 금속활자 갑인자로 추정되는 실물들이 무더기로 출토됐다. 구텐베르크의 성서본 금속활자보다 제작 시기가 10여년 이상 앞서는 것으로 판명된 세계적인 발견이었다. 또 훈민정음 창제 시기인 15세기에 썼던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쓴 활자 실물들을 포함해 한글 금속활자를 구성하던 다양한 크기의 활자들도 처음 출토돼 학계의 관심이 집중됐다.
갑인자들을 등장시킨 ‘인사동 출토 유물 공개전’ 포스터.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국립고궁박물관이 세종 때 갑인자로 판명하고 전시장에 공개한 서울 인사동 피맛골 출토 한자 금속활자들. 크기상 소자(小字)에 해당한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1부 전시의 서두는 발굴 당시 활자들이 담겨있던 깨진 도기항아리 한점으로 시작된다. 이 그릇을 보고 나면 제작 시기를 놓고 여전히 학계의 연구를 기다리고 있는 1300여점의 활자들이 나타난다. 그 맞은편 진열장에는 이번 전시의 고갱이로, 주조 시기가 밝혀진 304점의 갑인자와 을해자, 을유자들이 놓여 눈길을 붙잡는다. 갑인자(1434, 세종 16년)는 48점, 을해자(1455, 세조 1년)는 42점, 을유자(1465, 세조 11년)는 214점이 나왔다. 활자 중 ‘火’(화) ‘陰’(음) 자는 갑인자로 찍은 <근사록(近思錄)>(1435, 보물,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두 글자를 포함해 모양이 같은 활자 48점을 골라 책자와 함께 선보이고 있다. 을해자와 을유자들은 <능엄경>(1461, 보물, 서울역사박물관 소장)과 <원각경>(1465, 보물, 호림박물관 소장)에 찍힌 글자를 대조해 확인한 것들이다. 박물관 쪽은 활자를 잘 볼 수 있도록 전시장 여러 곳에 확대경과 사진을 담은 휴대용 컴퓨터를 비치했다. 주조를 담당했던 ‘주자소 현판’과 조선시대 활자 주조의 연혁이 적힌 ‘주자사실 현판’도 볼 수 있다.
금속활자와 물시계 부품들을 담았던 도기 항아리. 윗부분은 깨져 사라지고 없다. 노형석 기자
금속활자들을 담은 항아리가 출토됐던 서울 인사동 피맛골 조선 전기 집터 발굴현장을 담은 대형 사진도 전시장에 내걸렸다. 조선시대 지층과 이후 근현대 지층이 중첩되고 그 위에 현대 건물이 들어선 모습이 생생하게 보인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전시장 말미에는 ‘빵박스’라고 불리우는 플라스틱제 발굴품 상자들이 미분류 유물들을 채운 모습으로 등장해 눈길을 끈다. 인사동 피맛골 발굴 작업 중 조사원들이 실제로 썼던 것들이다. 노형석 기자
2부는 조선 전기 과학기술을 알려주는 유물들로 채워진다. 관객의 눈길을 끌 것으로 보이는 유물은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다. 1437년(세종 19년) 국왕의 명으로 처음 제작된 주야겸용 시계로, 중국에서 전래된 혼천의와 간의의 기능을 향상시키고 크기를 소형화한 것이 특징이다. 낮에는 해 그림자로, 밤에는 별을 관측하여 시간을 측정하던 기구로, 그동안 기록으로만 확인되다 처음 실물이 출토됐다. 3개 고리 중 하나의 일부만 출토됐지만, 전체 모습은 알 수 있다. 또 일성정시의 사용 방법을 알 수 있도록 박물관 소장품 ‘소일영’(小日影)을 전시했다. 해시계인 소일영은 눈금표가 새겨진 둥근 고리와 받침대, 석제 받침대로 구성되는데, 전모를 공개한 것은 처음이다. 직사각형 모양에 일정 간격으로 구멍이 뚫린 자동 물시계 부속품 ‘일전’(一箭)도 나왔다. 자동 물시계에서 시간을 알려주는 인형을 움직이게 하는 구슬을 방출하는 장치다. 자동 물시계에서 일전이 어느 부분에 해당하는지,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를 담은 영상도 공개된다.
인사동 피맛골 유적에서 출토된 조선시대 자동물시계 ‘주전’ 장치의 동판 부품.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이 뚫려 물시계의 시보 인형을 움직이는 구슬을 배출하는 구실을 했다. 주전의 첫번째 부품임을 뜻하는 ‘一箭(일전)’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노형석 기자
세종 때 만든 낮밤 겸용 시계인 ‘일성정시의’의 주요 부품인 고리 모양의 ‘주천도분환’. 금속활자와 더불어 인사동 피맛골 발굴조사의 중요 출토품으로 꼽힌다. 고리에 붙은 구름 모양 손잡이로 고리를 돌려가며 낮밤을 측정하도록 한 얼개다. 이번에 처음 출토된 이 부품 실물을 통해 손잡이가 구름모양이라는 사실이 처음 밝혀졌다. 노형석 기자
자동물시계의 시보 인형을 작동시키는 핵심 장치인 ‘주전’의 일부 부품들. 구슬을 배출하는 동판과 연결돼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사동 피맛골 현장에서 처음 나온 실물로 금속활자들과 함께 전시장에 공개됐다. 노형석 기자
무기류로는 제작 연대가 확실한 1점의 승자총통(1583년)과 7점의 소승자총통(1588년)이 나온다. 제작한 장인 이름, 제작 연도, 총통 무게와 화약량 등이 기록되어 있다. 더불어 제작 연도(1535년)가 적힌 동종(銅鐘) 파편과 정륭원보, 조선통보 등 금속화폐도 볼 수 있다.
유물들과 별개로 눈과 귀를 잡아끄는 건 영상과 음악이다. 전시장 한켠에서는 인사동 발굴 현장의 하루와 발굴 참여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영상물을 상영하고 발굴 작업의 이모저모를 담은 사진들도 내보인다. 음악가 박다울씨가 전시를 위해 출토 유물과 유적의 의미를 담은 곡을 직접 작곡해 연주하고 들려주는 것도 이채롭다. 박씨가 전시실에서 연주한 영상은 발굴 이야기, 전시해설을 담은 영상과 함께 내주께 문화재청과 국립고궁박물관 유튜브 채널에서 공개된다. 박물관은 누리집에서 전시 도록 내려받기 서비스를 제공하며 전시실 전경과 유물 설명 등을 담은 가상현실(VR) 콘텐츠도 만들어 내보일 계획이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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