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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에서 일하는 사람의 노동환경이 먼저인 건축가였죠”

등록 2021-07-05 18:34수정 2022-03-17 12:06

[가신이의 발자취] 이일훈 건축가를 추모하며

고 이일훈 건축가. 건축연구소 후리 제공
고 이일훈 건축가. 건축연구소 후리 제공

어떻게 사는가를 묻는 게
건축이라고 하셨죠
노동자들 햇볕 바람 쬐게
공장도 여러채로 나눠 지었죠

선생님 지은 집에서 14년째 살아
자다가도 깨어 ‘집 좋구나’ 혼잣말

칼같이 시간을 맞추는 한국의 고속열차가 무슨 일인지 전기가 끊어져서 연착이 된 날이었습니다. 환승 기차를 놓쳐서, 천안아산역에서 한시간 반 뒤에 오는 다음 열차를 기다리다가 ‘면형의 집’ 원장인 양운기 수사님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선생님이 위독하시다고요.

‘할 일이 있거든 지금 하십시오, 내일은 상대가 당신 곁에 없을지도 모릅니다’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그간 생각해두고 아껴둔 말들을 더는 선생님께 전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살고 싶으신가요?”

2005년 8월 집 설계를 하러 처음 찾아간 자리에서 건축가인 선생님은 저에게 물었습니다. 집 설계와 그 말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몰라서 제가 갸우뚱했지요. 선생님은 어떻게 짓는가보다 어떻게 사는가를 먼저 묻는 게 건축이라고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 말을 이해한 뒤로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건축 구경을 할 때, 집을 둘러볼 때, 그 생김새에 대해 먼저 말하게 되지요. 그렇게 겉모습을 말한 다음에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어떻게 살까, 저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은 노동환경이 쾌적할까’ 하고 물어주세요.” 선생님의 물음 덕분에 건축을 볼 때 건축물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두게 되었습니다. 멋있게 보여도 사람을 함부로 취급해서 건강하게 하지 않는 건축물을 가려내게 되었습니다.

제주 서귀포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의 피정 시설인 ‘면형의 집’. 진효숙 제공
제주 서귀포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의 피정 시설인 ‘면형의 집’. 진효숙 제공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자비의 침묵 수도원 ‘겸손의 복도’. 진효숙 제공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자비의 침묵 수도원 ‘겸손의 복도’. 진효숙 제공

선생님이 설계한 건축물들은 사람을 건강하게 살게 하는 게 먼저여서 좋았습니다. 사무실 빌딩을 지을 때는 큰길가 반대쪽으로 작은 테라스를 내서 고층빌딩에서도 잠깐이나마 바깥 공기를 쐬면서 쉴 수 있게 하셨지요. 공장을 지을 때는 큰 건물 하나로 짓지 않고 여러 채로 나누어서, 작업 중 쉬는 시간에 햇볕과 바람을 쐴 수 있게 해서, 노동자들에게서 ‘이 공장은 누가 지었어? 고맙네’라는 인사가 나오게 했습니다.

선생님이 지어준 집에서 제가 산 지가 14년째입니다. 꽤 오래되었는데도 잠자다가 일어나서 ‘집이 좋구나’ 혼잣말을 하곤 합니다. 집을 짓고 나서 건축주와 건축가의 사이가 나빠지기 십상이라는데, 저희 집 식구들은 모두 선생님께 고마워합니다.

1998년 인천 만석동에 지은 기찻길 옆 공부방의 2010년 겨울 모습. 진효숙 제공
1998년 인천 만석동에 지은 기찻길 옆 공부방의 2010년 겨울 모습. 진효숙 제공

제주에 있는 천주교 유적지인 ‘면형의 집’에 갔을 때, 자비의 침묵 수도원에서 5년 동안 공부한 수사님들을 만났는데요. 선생님이 복도를 일부러 좁게 설계해서, 양쪽에서 오다가 마주쳤을 때 한쪽이 양보해야만 길을 갈 수 있다고 재밌게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양보와 배려를 몸에 배게 하려고, 복도를 일부러 조금 불편하게 만든 것이지요. 그 수사님들은 수도원을 ‘우리 집’이라고 하면서 아주 즐거워하셨습니다.

빈소에 온 사람들을 보면서 선생님이 어떻게 살아오셨는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탈춤 운동하시던 임명구 선생님과 같은 문화계 인사들, 건축 기획자 정귀원 선생님과 같은 건축계 사람들, 양운기 수사님과 같은 종교인들, 그리고 사회운동을 하는 분들이 모이셨더라고요. 건축은 어떻게 사는가를 먼저 묻는 일이라는 말씀을 선생님은 삶에서 실행하셨구나 싶었습니다.

인천 숭의동성당. 노경 제공
인천 숭의동성당. 노경 제공

선생님과 집 지은 이야기를 담은 책 <제가 살고 싶은 집은>을 보고, 잔서완석루를 모형으로 만들어보겠다고 건축과 학생들이 연락해온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잔서완석루 도면을 피디에프(PDF) 파일로 제 블로그에 올려놓아야겠습니다. 누구나 내려받아서 선생님의 건축을 참고할 수 있게요. 그렇게 저는 선생님을 기억하고 싶네요.

2012년 12월 필자 송승훈 교사의 남양주 집 ‘잔서완석루’ 탐방을 온 교사들에게 고 이일훈(오른쪽 둘째) 건축가가 설명을 하고 있다. 서해문집 제공
2012년 12월 필자 송승훈 교사의 남양주 집 ‘잔서완석루’ 탐방을 온 교사들에게 고 이일훈(오른쪽 둘째) 건축가가 설명을 하고 있다. 서해문집 제공

고 이일훈(오른쪽) 건축가가 필자 송승훈(왼쪽) 교사와 함께 지은 남양주의 집 ‘잔서완석루’를 방문했던 2014년 6월의 모습. 송승훈씨 제공
고 이일훈(오른쪽) 건축가가 필자 송승훈(왼쪽) 교사와 함께 지은 남양주의 집 ‘잔서완석루’를 방문했던 2014년 6월의 모습. 송승훈씨 제공

선생님의 이번 생에서 마지막 작업인 인천 숭의동성당에서 5일 새벽 열린 장례 미사에 갔습니다. 갑작스럽게 헤어지게 되어 얼굴을 뵙지 못해서 마음이 아픕니다. 수목장을 하는 선생님께서 머무는 광릉추모공원은 저희 집과 가깝습니다. 앞으로 산책길에 가끔 선생님을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을 알게 되어, 제 삶이 더 건강해졌고, 가치는 깊어졌고, 좋은 분들을 더 알게 되었습니다.

함께 쓴 책 머리말에 선생님이 쓰신 맨 마지막 문장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나와 보라, 어디 나보다 더 보람 있는 건축가가 있는가.”

송승훈 <제가 살고 싶은 집은> 공동저자·의정부광동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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