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낙원 같은 곳이다. 그런 낙원에 검푸른 밤이 찾아온다. 그룹 들국화의 최성원은 ‘제주도의 푸른 밤’을 낭만적으로 노래했지만, 누군가에게 이곳 낙원의 밤은 슬프고 아픈 시공간이 되기도 한다. 오는 9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로 공개되는 박훈정 감독의 신작 <낙원의 밤>은 아름다워서 슬프고, 슬퍼서 아름다운 누아르 영화다.
범죄조직의 에이스 태구(엄태구)는 사랑하는 누나와 조카를 의문의 교통사고로 한순간에 잃는다. 그 배후에 상대 조직인 북성파가 있음을 직감한 태구는 모든 것을 걸고 복수를 실행한다. 거사를 마치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밀항하기 전, 그는 잠시 제주도에 몸을 숨긴다. 거기엔 불법 무기상 삼촌과 단둘이 사는 재연(전여빈)이 있다. 재연은 삼촌 대신 공항에 태구를 데리러 간다. 삼촌이 조직의 의뢰를 받고 태구를 숨겨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태구와 재연의 첫 만남에선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박 감독의 대표작은 <신세계>(2013)다. 신분을 숨기고 범죄조직에 잠입한 경찰(이정재)과 조직 중간 보스(황정민)의 인간적 교감과 조직 내 역학관계를 다룬 영화는 400만명 넘는 관객을 모으며 한국 누아르의 대표작이 됐다. <낙원의 밤>도 두 주인공의 교감이 영화를 관통한다는 점은 비슷하다. 다만 <신세계>가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이야기의 전개에 방점을 뒀다면, <낙원의 밤>은 인물의 감정과 배경이 빚어내는 서정성에 무게를 싣는다. 이야기 구조는 이런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처럼 여겨질 정도다.
태구와 재연에겐 공통점이 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삶의 벼랑 끝에 선 인물이라는 점이다. 재연의 삼촌에게 갑작스럽게 닥친 사건 이후 둘은 도망자 신세가 된다. 자동차를 타고 쭉 뻗은 나무들로 빽빽하게 둘러싸인 제주도 중산간 도로를 질주하고, 오토바이 한대에 나란히 몸을 싣고 노을빛 드리운 해변 도로를 달리는 장면은 마치 로맨스 로드무비 같다. 바닷가에서 그토록 좋아하는 물회를 먹고는 함께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담배를 피우는 순간은 폭풍전야의 평안한 고요와도 같다. 곧 사라질 찰나여서 더 아름답고 애틋하다.
중후반부 들어 북성파의 이인자 마 이사(차승원)가 제주도로 내려오면서 분위기는 급반전한다. 잠깐의 평화는 사라지고 긴박한 추격전과 격렬한 몸싸움이 이어진다. 서정적으로 흐르던 음악의 박자가 점차 빨라지고, 영화를 지배하던 검푸른 색조 위로 붉은 핏빛의 채도가 짙어진다. 막판에 펼쳐지는 최후의 격전은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고 건조해서 되레 처연하다. 통쾌함보다 먹먹함을 부르는 액션이다.
골치 아픈 일을 귀찮아하면서도 냉혹하고 거침없이 처리하는 마 이사는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적당히 무겁고 거칠면서도 의외의 유머를 품은 대사가 조용한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마 이사는 차승원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캐릭터가 될 듯하다. 영화가 지난해 9월 이탈리아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청받았을 당시 외신은 마 이사를 두고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라고 치켜세웠다. 알베르토 바르베라 영화제 집행위원장은 “<낙원의 밤>은 최근 몇년간 한국 영화계에 등장한 가장 뛰어난 갱스터 영화 중 하나다. 박훈정 감독의 이름은 앞으로 더욱 많이 알려질 것”이라고 초청 이유를 밝혔다.
영화는 극장 개봉을 준비했으나,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결국 넷플릭스행을 택했다. 전세계 190여개국 공개를 앞두고 박 감독은 “한꺼번에 너무 많은 나라의 많은 분이 본다고 생각하니 (국내 개봉과는) 또 다른 긴장과 떨림이 있다. 우리나라 관객 정서에 맞게 찍은 영화를 외국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