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영화·애니

스크린 속 나의 연인 - 장만옥

등록 2006-01-11 18:02수정 2006-03-23 15:55

목까지 가리고도 섹시할 수 있다니!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난 스무 살 전엔 공부만 했고, 스무 살 이후엔 너만 바라보며 산 게 분명해! 아무도 생각이 안 나!” 선언 같은 나의 외침에 마누라는 만족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글생글 웃는다. 원고청탁을 받고 맨 먼저 한 것이 바로 이런 안전장치 심어놓기이다. 마침내 “써도 돼. 용서해줄게”란 농담 같은 허락이 떨어지고서야 나는 ‘연인’이라는 아주 위험한 단어에 대해 비로소 조금 자유로워졌다.

<화양연화>. 인생의 골목을 스치고 지나간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왕자웨이(왕가위)의 충혈된 집중은 나에게 아주 긴 진동을 남겼다. 차우와 수리첸의 거짓같은 진짜 사랑이 비처럼 붉은 커튼처럼 또는 가로등 불빛처럼 내 중년의 초입에 내린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나에게 의미 있는 이유는, 이 영화의 여주인공 수리첸이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스크린 속 인물 중 유일하게 섹시하다고 느낀 여자라는 점이다. 초점이 흐려진 가구와 벽 사이로 그녀의 얼굴과 그녀의 곡선(!)이 선명하게 떠오르면, 나는 영락없이 일상의 설렘을 간신히 참아내며 버티고 있는 차우(량차오웨이·양조위)가 되어버린다. 목까지 가린 치파오를 입고도 저렇게 섹시할 수 있다니! 그것은 일종의 기적과도 같았다.

하지만 사실 그녀를 나의 연인으로 만든 것은 역설적이게도 영화 <2046>이었다. (이 영화에선 장만위(장만옥) 즉 진짜 수리첸은 단 몇 초밖에 나오지 않는다.) 차우는 <화양연화>의 수리첸을 떠나보냈지만 결국 평생 그녀의 환영을 쫓으며 살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가슴 내려앉는 애잔한 고독이다.

사실 남자들은, 아니 적어도 나는 이놈의 애잔하고 쓸쓸한 사랑을 너무나 좋아한다. 그것은 추억에 대한 사랑이고 사랑에 대한 추억이다. 추억은 이별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어쩌다 펼쳐본 중학교 시절의 명상록엔 웬 놈의 이별시가 그리도 많이 적혀있는지. 제대로 사랑 한 번 못해 본 녀석이 이별의 감정에 가슴이 저미고 눈물이 고였었던 것이다. 사랑의 ‘추억’은, 진짜 사랑이 있었건 없었건 간에 그 자체로, 떠나온 고향 같고 주름진 어머니의 얼굴 같은 것이다. 장쯔이가 아무리 수리첸처럼 입어도 짝퉁일 수밖에 없고, 만나는 상황이 비슷하거나 이름이 같다고 하여 그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윤도현은 노래한다. “언젠가 다른 사람 만나게 되겠지, 널 닮은 미소 짓는. 하지만 그 사람은 네가 아니라서 왠지 슬플 것 같아. 잊을 수 없는 사람….”

차우는 가수가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평생 소설을 쓰며 진정한 연인을 기억할 것이다. 그 소설은 우주에서 가장 슬플 것이고, 주인공은 우주에서 가장 외로울 것이며, 우주에서 가장 긴 이별과 기다림을 다룰 것이다. 아! 아름답지 않은가? 차우 속 수리첸이? <2046>속 <화양연화>가? 현실의 사랑은 추억이 되어 누군가의 가슴에 담겨서야 비로소 그 완전한 미를 획득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도 내 가슴 속엔, 음악에 맞춰 계단을 내려오는 그녀의 발걸음과 국수통을 든 그녀의 손과 애써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이 담겨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의 연인’이 장만옥이란 말이지?” “‘내 인생의 연인’이 아니라 ‘스크린 속 나의 연인’이라니까!” 마누라가 약속을 어기고 원고를 봐버렸다. 아무래도 더 쎈 안전장치가 필요할 것 같다.

안슬기/<다섯은 너무 많아> 감독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당신은 치매 걸릴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txt] 1.

당신은 치매 걸릴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txt]

노안이 오면 책을 읽으세요 2.

노안이 오면 책을 읽으세요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3.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해뜰날’ 가수 송대관 별세 4.

‘해뜰날’ 가수 송대관 별세

민주주의 ‘덕질’하는 청년 여성, 이토록 다정한 저항 [.txt] 5.

민주주의 ‘덕질’하는 청년 여성, 이토록 다정한 저항 [.txt]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