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2년생 김지영>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2016년 출간 이후 2년 만에 누적 판매 100만부를 돌파한 베스트셀러다. 주인공 김지영이 정신과 의사와 상담한 기록을 바탕으로 어린 시절부터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풀어냈다. 누군가의 딸로, 직장인으로,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살아가며 겪는 일상의 설움과 차별은 비슷한 처지의 여성 독자들로부터 큰 공감대를 얻었다. 한편에선 “차별에 대한 과장과 과도한 일반화”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소설은 최근 부쩍 격화된 젠더 갈등의 한가운데로 휘말려 들어갔다. <82년생 김지영>이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쏟아진 건 이 때문이다.
14일 언론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우려보다는 기대에 부응하는 결과물로 보인다. 영화는 원작소설을 좀 더 보편적이고 따스한 시선으로 풀어내 설득력과 공감지수를 높였다. 그러면서도 원작이 지닌 문제의식은 고스란히 품어냈다. 관객의 성별을 떠나 누구든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아파하며 눈물을 흘릴 법한 영화다.
영화는 어린 딸아이를 키우는 30대 주부 지영(정유미)의 현재 모습을 비추며 시작한다. 빨래, 청소 같은 집안일을 하고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공원에서 산책하는 평온한 일상을 그린다. 벤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순간, 길을 가던 누군가의 비꼬는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꽂힌다. “상팔자가 따로 없네. 나도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커피 마시고 싶다.” 직장인으로 보이는 남자의 손에도 커피가 들려 있다. “그렇게 부러우면 시집이나 가세요.” 옆 동료가 농담 삼아 던진 말이 더 아프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대현(공유)은 퇴근하고 집에 오면 팔부터 걷어붙이고 아내에게서 아이를 받아 목욕시키는 자상한 남편이다. 식탁에 앉아 밥 먹다가 아내 손목에 감긴 붕대를 보고 “괜찮냐”고 물으니 지영이 전해준 의사의 말이 가관이다. “밥은 밥통이 하고 빨래는 세탁기가 하는데, 왜 손목이 아프냐고 묻더라니까.” 직접 해보지 않고는 모른다. 쌀을 씻어 안치고,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널고 다 마른 빨래를 개어 옷장에 정리하는 일이 얼마나 번거롭고 고된지를.
지영은 한번씩 다른 사람이 된다. 빙의라도 된 것처럼 그 사람의 입으로 말한다. 명절에 시댁에 가서 음식 준비며 궂은일을 하던 지영이 이제 서울로 올라오려 하는 순간, 시누이 가족이 들이닥친다. 시어머니는 딸을 크게 반기며 지영에게 “전 좀 데워 와라” 하고 시킨다. 시누이는 “시댁에서 얼마나 힘들었다고. 역시 친정이 제일 좋아” 한다. 혼자 부엌을 지키던 지영이 갑자기 시어머니를 보며 말한다. “사부인! 자기 딸이 귀한 걸 알면 남의 딸 귀한 것도 알아야지요. 자기 딸 왔다고 며느리를 그렇게 붙들고 있으면 저는 언제 딸을 봅니까?”
영화 <82년생 김지영>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대현은 이런 아내가 걱정스럽다. 정신과 상담을 받게 하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그 순간을 기억 못하는 지영은 자신이 아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영이 이렇게 된 데는 과거의 삶이 영향을 끼친 듯하다. 중간중간 되돌아보는 회상 장면에서 지영은 가부장제, 남아선호사상, 성차별 등의 굴레에서 설움을 겪고 벽에 부딪힌다. 상처를 주는 이들은 멀리 있지 않다. 아버지, 할머니, 시어머니, 직장 상사와 동료들이다. 영화는 지영이 걸어온 길을 비추며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단순하고 평면적일 수 있는 이야기에 숨결을 불어넣는 건 배우들의 호연이다. 부부를 연기한 정유미와 공유는 물론, 지영의 친정엄마 미숙 역을 맡은 김미경의 연기가 특히나 깊은 여운을 남긴다. 미숙이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딸을 안고 흐느끼는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물샘이 아니라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눈물을 길어 올리게 만든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보편적인 감동을 안기는 영화이지만, <82년생 김지영>은 공개되기 전부터 페미니즘에 반감을 가진 이들에게서 턱없이 낮은 점수를 주는 ‘별점 테러’를 당하고 있다. 주연을 맡은 정유미와 공유가 악플에 시달리기도 했다. 반면 영화를 지지하는 이들은 개봉만을 기다리며 극장에 가지 않아도 티켓을 사는 ‘영혼 보내기’와 영화를 보고 또 보는 ‘엔(N)차 관람’ 운동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다. 지난 5월 여자 경찰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걸캅스>가 개봉했을 때 벌어졌던 일들이 되풀이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갈등을 뛰어넘는 결말을 보여준다. 남의 입을 통해서만 목소리를 내던 지영이 마침내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절망을 딛고 희망으로 나아가는 걸음이다. 원작소설과 다른 결말을 두고 조남주 작가는 “소설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영화”라고 평했다. 김도영 감독의 말마따나 “지영이 엄마보다는 지영이가, 지영이보다는 딸 아영이가 더 잘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결말은 젠더 갈등으로 갈리고 생채기 난 우리 사회를 포근히 안아주는 것 같다. 미숙이 지영을 안아주는 것처럼. 23일 개봉.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