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이널리스트> 한 장면. 씨네블루밍 제공
벨기에 왕비의 이름을 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쇼팽 콩쿠르, 차이콥스키 콩쿠르와 더불어 클래식 콩쿠르 ‘빅3’로 꼽힌다. 결승이 벨기에 전역에 생중계 될 정도로 대중적 관심도 높다. 대회는 해마다 바이올린·피아노·작곡·성악이 번갈아 가면서 열리는데 올해는 바이올린 대회가 열린다. 때맞춰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파이널리스트>는 2015년 5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결승 진출자인 바이올리니스트 12명의 합숙 이야기를 담았다. 170명 중 결승에 오른 이들 ‘파이널리스트’들은 모든 통신 기기를 반납한 채 8일간 아름다운 저택(뮤직샤펠)에 사실상 갇힌다. 연주자들은 이곳에서 처음 보는 지정곡 악보를 받아들고 홀로 사투를 벌이는데 영화는 ‘예술’과 ‘경쟁’이라는 부조화 속에서 이들이 느끼는 연주의 고통과 외로움, 미래에 대한 걱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특히나 이 대회는 국내에서 여러모로 화제가 됐었다. 파이널리스트에 한국인 연주자 3명(김봄소리, 이지윤, 임지영)이 오른 데다 가장 나이 어린 ‘국내학파’인 임지영이 한국인 최초로 우승까지 거머쥐었기 때문. 자신이 출연한 영화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가 영화 홍보를 돕게 된 임지영(24)을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임지영은 지난 연말에서야 우연히 영화 개봉 소식을 알게 돼 깜짝 놀랐다고 했다. “워낙 권위 있는 대회다 보니 여기저기서 취재를 많이 와요. 연주자들은 어떤 촬영인지 모른 채 ‘빨리 끝내고 연습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응하는데 그때 찍었던 것 중의 하나가 영화였더라고요. 영화가 단순히 우승자만 조명하는 게 아니라 연주자들의 도전과 고뇌를 잘 담아내고 있어 흔쾌히 홍보를 돕게 됐어요.”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이 14일 오후 서울 강남구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에서 <한겨레>와 만나 인터뷰에 앞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영화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외로운 일인지를 정적인 카메라 워크로 보여준다. 화려한 무대 뒤의 풍경, 경연을 치르는 이들의 두려움이 담긴 적막한 화면, 텅 빈 곳에 선 연주자의 모습을 감각적인 화면과 과하지 않은 음악으로 표현해낸다. “난 음악의 노예” “내 자신이 바이올린”이라고 표현하는 연주자들의 치열함 속에 “무대에선 다리가 떨려 구두를 신고 연주를 못 한다”는 불안함도 담아내는 식이다. 임지영은 “우승자를 (맞다, 틀리다인) 오엑스(O, X)로 가리는 게 아니어서 더 잔인한데 연주자들이 치러야 하는 과정”이라면서 “영화를 보니 그 당시 연주자들의 상황이나 감정상태를 세세하게 잘 담아냈다”고 말했다.
콩쿠르는 연주자가 얼굴을 알릴 기회다. 상을 타고 유명 매니지먼트사와 계약하면 국제무대에서 활약할 기회가 열린다. 젊은 연주자들이 권위 있는 콩쿠르에 도전하는 이유인데, 임지영은 퀸 엘리자베스 대회를 끝으로 콩쿠르 도전을 끝냈다. 보통 스무살에 시작해 20대 후반에 끝나도 행운이라고 하는 도전을 남들보다 빨리 끝냈으니 시간을 번 셈이다. “대회 끝나고 정신없이 연주가 이어졌어요. 한순간에 180도로 상황이 달라져 한 2년간은 연주를 무사히 끝내기도 바쁘더라고요. 기대치가 한순간에 뛰어올라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100배 이상 생겼죠. 생각보다 몸이 먼저 해야 하는 게 많아지고 경험은 늘었지만 내가 어떻게 연주생활을 이어갈지가 고민되더라고요.”
젊은 나이다 보니 그는 공부를 택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2년 전부터 독일에서 생활 중이다. 프랑크푸르트 인근 크론베르크 아카데미에서 공부 중인데 재밌게도 파이널리스트 12명 중 4명이 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 “보통 대학이나 음악학교랑 다르게 레슨이나 마스터 클래스에 학생 선택권이 있어요. 이미 연주생활을 하는 연주자들을 소수로 모아놓고 솔리스트의 커리어를 만들어가기에 적합한 수업을 하는 곳이에요.”
콩쿠르를 준비하는 시간이 길다고 하지만 콩쿠르 이후의 삶이 더 긴 법. 모든 음악 전공자들이 불안한 마음으로 연주생활을 시작해 콩쿠르에 매달리지만 더 길게 자신을 볼 필요가 있다는 게 그가 이 영화를 보는 수많은 연주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콩쿠르에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결실을 맺었지만, 그걸로 음악 인생이 탄탄대로만 걸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임지영이 자신을 알리는 활동보다 공부에 매진하는 이유다. “지금은 저를 담금질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특별한 이유 없이 도전할 수 있는 게 학업이라 외국생활도 처음이고 해서 독일로 왔는데 모든 생활이 편안하다고 할 수 없지만, 많이 배우고 있고, 새로운 사람들과도 만나고 있어요. 앞으로가 더 기다려지고, 다가오는 상황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고 할까요.”
그는 올해 3~4차례 국내 연주가 예정돼 있다. 오는 3월에 벨기에 여왕이 참여하는 한국-벨기에 수교 기념 비공개 연주회가 있고, 6월에 단독 리사이틀 등을 준비 중이다. 공연에 앞서 영화로 관객들을 만나게 된 임지영은 “클래식하면 우아하고 아름다운 연주와 화려한 갈채만 생각하는데 피땀 없이는 그 경지에 오르지 못한다. 음악인들의 고충을 살짝이나마 보여주는 게 이 영화의 취지라고 생각되는데 연주자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들여다봐달라”고 말했다. 24일 개봉.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사진 씨네블루밍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