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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이솜, 확고한 목소리를 지닌 여배우의 등장을 환영하며

등록 2018-04-22 10:03수정 2018-04-22 10:37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배우 이솜에 대한 고찰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주인공 미소(이솜 분)는 집 한칸 없이 떠돌아다니지만 담배와 위스키를 즐기는 자신의 취향을 유지하며, 제 존엄을 잃지 않는다. 광화문시네마 제공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주인공 미소(이솜 분)는 집 한칸 없이 떠돌아다니지만 담배와 위스키를 즐기는 자신의 취향을 유지하며, 제 존엄을 잃지 않는다. 광화문시네마 제공

오랜만에 회사로 찾아온 친구 미소(이솜 분)를 만나기 위해 휴게실로 찾아온 그 짧은 찰나, 문영(강진아 분)은 피로를 풀어 보겠다고 핸드백에서 수액을 꺼내 제 팔뚝에 링거를 놓는다. 미소는 웃으면서 휴게실도 근사하고 회사도 큰 거 같다고 덕담을 건네지만, 피로로 눈도 제대로 못 뜨는 문영은 그 덕담을 즐길 여력도 없다. “야, 어떻게 들어온 회사인데. 커야지, 그럼. 나 열심히 해서 더 큰 데 갈 거야.” 분명 신세를 지러 온 건 미소인데,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팔뚝에 링거 주사를 꽂은 문영의 얼굴이 더 안쓰럽고 피곤해 보인다. 대단한 꿈이나 희망 없이 하루하루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미소보다 장밋빛 미래에 대한 야심을 이야기하는 직장인 문영이 더 불행해 보이는 아이러니. 카메라는 짧은 순간이지만 웃고 있어도 슬퍼 보이는 문영의 얼굴을 또렷이 담아낸다.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에 온기를 불어넣다

전고운 감독의 영화 <소공녀>(2017)는 얼굴의 영화다. 담배와 위스키 한 잔이라는 소소한 행복을 지키기 위해 집을 포기하고 하룻밤 신세 질 친구들을 찾아 나선 미소는, 차례차례 삶에 지쳐버린 옛 밴드 멤버들의 얼굴을 목격한다. 키보드를 멋지게 잘 치던 현정(김국희 분)은 시부모와 남편 수발에 지쳐서 대화 도중에 곯아떨어져 버리고, 밴드의 막내 대용(이성욱 분)은 이혼의 충격 때문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숨 죽여 운다. 보컬 선배 록이(최덕문 분)는 보기 흉할 정도로 결혼과 정착에 집착하고, 한때 뜨거운 삶을 살았던 기타리스트 정미(김재화 분)는 미소와 함께했던 과거의 삶이 현재 누리고 있는 안락함을 위협할까 겁에 질렸다. 불행한 건 밴드 멤버들만이 아니다. 미소를 가사도우미로 고용한 민지(조수향 분)나 기약 없는 미래의 꿈에 천천히 지쳐가는 남자친구 한솔(안재홍 분) 또한 자꾸만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마담 뺑덕’ ‘범죄의 여왕’ 등
자신의 욕망을 아는 여성을 연기
‘소공녀’에선 집 대신 담배 선택
취향을 위해 홈리스가 된 20대로

월세로 위스키 먹는 동화적 설정
지상에 붙들어맨 건 이솜 덕분
영화 밖에서도 ‘자신의 의지’ 강조
단역이라도 주체적 역할이면 참여

사연은 달라도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불행한 얼굴들을 순례하는 동안, 놀랍게도 집 한 칸 없이 떠돌아다니는 미소만큼은 제 존엄을 포기하지 않는다. 미소에게는 당장의 고단함을 면하는 것보다 자신을 자신답게 만들어주는 소소한 행복과 품위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 그는 누구의 집에 자러 가도 꼭 계란 한 판을 선물로 사 들고 가는 걸 잊지 않고, 잠자리에 대한 보답으로 가사노동을 제공한다. 더 이상 머물 수 없겠다 싶으면 재워줘서 감사하다는 정중한 손편지를 남기고 떠난다. 사람들은 미소에게 “담뱃값이 올랐으면 담배를 끊으면 될 일이지, 집을 빼서 나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비난하지만, 미소는 확실한 행복을 너무 쉽게 포기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 처음으로 한솔과 맛집 데이트를 하려 길게 줄을 섰던 날, 준비된 재료가 다 떨어졌다는 맛집 사장의 말에 줄에서 이탈해 맥없이 흩어지는 사람들을 보며 미소는 말한다. “다들 이렇게 포기하는 거야?”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조용히 살아감으로써 누구보다 격렬하게 세상에 저항하는 20대 여성. 포기란 걸 모르는 미소라는 이 독특한 캐릭터를 관객에게 설득하는 건 많은 부분 배우 이솜의 힘이다. 크고 서늘한 눈과 모난 곳 없이 동글동글한 얼굴, 무해해 보이지만 고집스럽게 맞물린 입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금방 티가 나는 큰 키. 이런 이솜의 외모는 어딘가 현실에서 반뼘 정도 둥실 떠 있는 것 같은 비현실적 존재임을 완성한다. 그렇게 동화 같은 설정을 이솜은 나지막한 음계의 목소리와 느리고 건조한 말투, 힘없이 너털거리는 걸음걸이로 다시 지상에 붙들어 맨다. 시적인 서정으로 차디찬 현실을 그려낸 것은 각본과 연출을 맡은 전고운 감독의 공이지만, 캐릭터에 온기를 불어넣어 냉혹한 현실 사이의 어딘가에 해당 캐릭터를 안착시킨 건 미소 그 자체로 분하는 데 성공한 이솜 덕분이다.

그러고 보면 이솜이 맡았던 배역들은 현실과 판타지의 중간쯤에서 제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는 인물이었던 적이 많았다. 영화 <마담 뺑덕>(2014)의 덕이는 지방 소도시의 권태 속에서도 제 욕망을 분명히 알고 주저 없이 돌진하는 인물이었고, 영화 <범죄의 여왕>(2016)의 진숙 또한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는 부모의 바람 따위는 귓등으로 넘긴 채 제 살고 싶은 대로 살면서 고시원 방 안에 조용히 침잠하는 인물이었다. 영화 <대립군>(2017) 속 궁녀 덕이는 촬영 분량의 상당수가 편집 과정에서 잘려 나갔지만, 그 짧은 분량 안에서도 어린 광해군(여진구 분)의 곁을 보필하며 신분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느끼는 대로의 위로와 조언을 건네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특유의 결만큼은 선명했다. 언어 성희롱을 일삼는 상사에게 맞서고 집채만한 바이크를 타고 다니는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2018) 속 직장인 우수지는 또 어떤가?

이솜은 한국의 영상매체에서 좀처럼 흔히 보여준 적이 없어 드문 캐릭터이지만, 분명 세상 어딘가에서 열심히 제 삶을 살고 있을 것 같은 젊은 여성을 꾸준히 연기해왔다. 남에게 먼저 해를 끼치는 일은 좀처럼 없어도, 누군가 자신의 삶에 부당하게 제동을 걸려 하면 침묵하는 대신 분명하게 제 목소리를 내는 여성을. 아마도 배우 본인이 지닌 결을 따라 비슷한 결을 지닌 캐릭터들이 모인 결과이리라. <마담 뺑덕> 개봉 무렵 홍보차 인터뷰를 진행하던 이솜은, 모델과 배우 일을 병행하다가 완전히 배우로 전향한 과정을 묻는 질문에 답하다가 이런 표현을 썼다. “이 모든 게 타의가 아닌 제 의지였어요. 모델과 연기를 함께 가져갈 수 없었기에 제가 이 길을 택한 거죠.”(섬뜩한 ‘뺑덕’ 이솜 “그것 역시 사랑이에요”. <오마이스타>. 2014년 10월20일. 이선필 기자) 첫 장편 상업영화 주연작 인터뷰에서, 커리어 변경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굳이 그 모든 게 자신의 의지였노라 강조하는 흔치 않은 배우.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내가 결정을 먼저 한 다음에 통보하듯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다”고도 말했다.(‘마담 뺑덕’ 이솜 “나홀로 결정… 제가 참 겁이 없었죠”. <스타뉴스>. 2014년 10월7일. 김현록 기자) 여성 배우들이 연기할 만한 좋은 배역이 그리 많지 않은 영화계에서, 이솜은 어떤 역이든 착실히 하겠다는 모습을 어필하는 대신 제 역할은 제 의지로 선택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단역이라도 마다 안 하는 이유는

주연작을 찍고 난 뒤에도 이솜은 가만히 앉아 배역을 기다리는 대신 본인이 먼저 좋아하는 배역을 찾아갔다. 영화사 광화문시네마의 전작들을 인상 깊게 본 그는 광화문시네마에 먼저 연락해 단역이라도 괜찮으니 출연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오디션을 본 뒤 <범죄의 여왕>에 출연했다. 광화문시네마의 차기작 <소공녀>의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에, 시나리오가 어찌나 마음에 들었는지 이솜은 “회사나 누구의 의견과 상관없이 내가 무척 하고 싶었던 작품이어서, 물어보지도 않고 ‘난 무조건 할 거야’, 이런 마음이 컸”다.(<소공녀> 배우 이솜, “개성 있어 보이는 나 자신의 모습에 만족한다”. <씨네21> 제1147호. 이화정 기자) 그래서 절대 안 된다는 소속사를 설득해 매니저 없이 직접 차를 몰고 촬영장을 오갔다. 소속사 대표이자 까마득한 연기 선배인 정우성과 이정재를 모두 설득해야 했다. 전고운 감독에 따르면 이솜은 촬영 기간 내내 미소 의상을 입고 출근해서 스태프들을 태워서 현장 이동을 하고, 촬영이 끝나면 미소 의상을 입고 퇴근을 했다.

이솜 본인이 그처럼 확고한 목소리를 지닌 사람이었기에, <소공녀>가 단순한 공상을 넘어 현실의 질량을 지닌 작품이 될 수 있었으리라. <소공녀>의 미소는 행복을 확신하지 못하고 고단해하는 수많은 얼굴들 사이를 유영하지만, 미소의 얼굴은 매 순간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단단한 확신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나는 아직 <소공녀>를, 이솜의 연기를 보지 못한 관객이 부럽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나처럼 이미 <소공녀>의 미소를 만나본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다. 세상 어디에서도 제 목소리를 내는 확고한 주관의 배우 이솜이 보여줄 더 많은 캐릭터들을 기다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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