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영화·애니

엄마에게 칼을 권하는 사회

등록 2005-11-30 16:53수정 2005-12-01 16:29

팝콘&콜라
(*영화의 중요한 반전을 미리 알 수 있게 하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 넘어가, 길 잃은 애기를/어머니가 부르시면/머언 밤 수풀은 허리 굽혀서/앞으로 다가오며/그 가슴 속 켜지는 불로/애기의 발부리를 지키고/……/애기야/…/네 꿈의 마지막 한 겹 홑이불은/영원과, 그리고 어머니뿐이다.” 서정주 시인의 시 <어머니>다. 모성애의 힘, 실로 대단하다. 자연조차 모성애의 완성을 위해 무릎 꿇고 도열한다.

<오로라 공주>의 정순정(엄정화)이 유괴당한 딸의 복수를 위해 건장한 사내들을 포함, 유괴 정황에 직간접적으로 조력한 여섯 명을 너끈히 살해할 때도, <6월의 일기>의 서윤희(김윤진)가 ‘왕따’ 당한 아들의 복수를 위해 또 다른 엄마의 자식들일 다섯 아이의 숨줄을 가차없이 갈랐을 때도, “머언 밤 수풀은 허리 굽혀서 앞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아닐지언정 최소한 우리는 두 엄마들에게 그렇게 감정이입되어 다가가고 살인의 정당성도, 영화의 개연성도 꽤나 인정해버리고 말 터. 바로 엄마이질 않는가.

영화를 본 뒤 며칠 사로잡혔던 의문은 이렇다. ‘엄마들은 모두 옳은가, 그리고 강한가.’ 만일 정순정의 딸아이가 나도 모르게 어깨라도 부딪히곤 넘어져서 하필 그 택시(택시 기사, 죽는다)를 타야 했다면, 서윤희의 아들과 같은 반이라면 왕따의 주동자는 아니더라도 이도저도 손 못쓰는 ‘방관자’(방관자, 죽는다)쯤은 되었을 텐데, 나는 영화 전개 상 황천길을 걷게 될 공산이 큰 것이다.

이들 엄마의 캐릭터 뒤로 우리 사회의 음습한 그림자가 보인다. 초인에 가까운 엄마를 더 많이 요구할수록, 이들 영화의 현실성이 더 크게 다가올수록, 이 사회가 더 절망적임을 방증하는 것 아닐까.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는 이렇게 설명했다. “세상에서 줄 수 있는 모든 도움이 끝나는 절망적 상황에서 내게만 향해지는 ‘신화적 도움’의 실체가 바로 ‘엄마’다. 요즘 영화에 나오는 강력한 엄마들은 ‘원형적 또는 신화적 엄마상’으로 볼 수 있다.” 주목할 건, 세상의 도움은 이미 끝났다는 점이다. 사회의 살벌한 무관심에 의해 순정과 윤희가 이미 자식을 잃은 뒤 영화가 시작되는 대목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엄마의 복수가 절대자의 것처럼 정당, 강력해지고 심지어 복수의 칼끝이 현실 속 나약했던 엄마에게까지 가닿는 것에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동의하게 된다.

지난달 개봉한 <플라이트플랜>의 <뉴욕 타임스>(9월23일치) 리뷰 기사 말머리는 이랬다. “다시 태어날 땐 조디 포스터가 내 엄마가 되면 좋겠다. (미안, 엄마)” 서로 무관심한 비행기 안에서 쥐도새도 모르게 아이를 유괴당한 엄마 카일의 분노는 여느 기내 전문 액션 배우를 능가하는 체력과 기지를 내뿜게 한다. 다행히도 터미네이터처럼 아수라를 뒤로 한 채 딸아이를 무사히 안고서 나오지만, 혹여 딸을 잃었다면 그는 순정이 될 텐가, 윤희가 될 텐가.


그래서 나는 다음 생의 내 엄마가 정순정, 서윤희가 되길 원치 않는다. 최병건 정신전문의의 말마따나 “모성이란 숭고한 가치로 인해 개운한 폭력, 공감할 수 있는 폭력”을 만들어 보일 뿐이고, 이런 폭력을 필요로 하는 절망적 사회에서 내가 또 다른 생을 살아가게 됨을 예고할 뿐인 탓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