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정우성이 들개 같은 북한군을 연기한다고?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면 안심해라. 정우성은 야생의 남자 ‘엄철우’에 맞춤이다.

19일 개봉 엿새 만에 누적 관객 200만명을 돌파한 영화 <강철비>는 색다른 정우성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영화는 북한 내 쿠데타가 발생하고 다친 북한 권력 1호가 남한에 넘어와 벌어지는 이야기다. 엄철우는 1호를 피신시킨 뒤, 남한 외교 안보수석 ‘곽철우’(곽도원)를 도와 핵전쟁을 막으려고 고군분투한다.

최정예특수요원으로 늘 매서운 눈으로 상대를 경계하고, 생존을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길들여지지 않는 거친 남성의 매력이 스크린 너머로 다가온다. 최근 서울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우성은 “있을 수 있을 법한 이야기를 극대화한 상상력이 기발해서 이 작품을 선택했을 뿐, 개인적으로 어떤 이미지를 얻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다만 “엄철우가 지닌 고단한 삶과 책임감을 충실하게 보여주려고 멋이 아닌 생존을 위한 액션을 했다. 살기 위한 치열함도 담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동작의 각도부터 표정 등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 쓰며 <아수라> 등에서 보여준 화려한 액션과 차별화했다.

데뷔 23년 만에 처음 하는 북한말 연기도 그가 영화에 쏟은 열정을 드러낸다. 입에 붙게 하려고 평소에도 사용하는 등 노력 끝에 유일한 사투리 연기였던 2003년 <똥개> 때보다 평가는 훨씬 좋다. “새터민 출신 여자 선생님께 배웠다. 동시대 남자들이 어떤 뉘앙스와 속도로 얘기하는지가 궁금해 2014~2016년 평양에서 촬영한 다큐멘터리와 유튜브에 올라온 영화 <홍길동> 등 북한 영상을 따로 찾아보며 공부했다. 특히 평양사투리 특유의 속도감에 신경 썼다.” 그 속도감과 낯섦 때문에 영화 초반 대사가 잘 들리지 않기도 하지만, 그는 “이질감이 들게 하는 게 중요해 스스로 (속도를 늦춰 사투리를 왜곡하는) 타협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양우석 감독은 <강철비>에서 정우성의 섬세한 감정 연기에 놀랐다고 했다. 엄철우는 말도 많지 않고 큰 표정 변화 없이 다양한 감정을 드러내야 하는, 내공이 필요한 역할이다. 정우성은 아내와 헤어질 때의 그리움, 진실을 알게 됐을 때의 혼란스러움 등 요동치지만 절제된 감정을 눈빛으로 잘 표현한다. 1994년 <구미호>, 1997년 <비트> 등에서 방황하는 청춘을 담았던 그의 눈빛은 이제 인생을 담을 줄도 안다. 정우성은 “곽도원이 내 눈이 너무 슬퍼서 못쳐다보겠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관객들은 ‘먹방’이라고 말하는 ‘망향 국수’ 장면도 정우성은 “철우에겐 고향 음식 앞에서 자존심이 무너진 장면”이라고 해석하며 그 마음을 담으려고 노력했단다. 눈빛이 열마디 말을 대신해서인지, 영화에서는 유독 엄철우가 상대 혹은 뭔가를 잠시 쳐다보는 장면이 많다.

안팎으로 단단해진 느낌이다. “생계를 꾸려야 해 부딪히고 싸워 이겨내야 하는 삶”이었던 10대, 정신없이 흘러갔던 20대를 지나 30대의 숱한 경험들이 40대에 내공의 자양분이 된 듯했다. “인권, 존중이 한때 나의 화두”였고, 국민으로서 정치적 소신도도 당당히 말할 줄 알게 됐다.“영화가 사회에 전하는 메시지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20대 때 경험했지만, 메시지를 던지는 방법을 40대가 돼서야 알게 됐다”는 그는 “<강철비>는 우리가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이고, 배우로서 그 관점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우성은 ‘누구의 연인’을 고집하지 않고, 세월의 흐름 따라 자연스럽게 남편, 아빠 역할까지 범위를 넓혀왔다. <강철비>에서도 그는 아빠다. “관객이 나한테 기대하는 이미지가 있겠지만, 나이를 먹으면 거기에만 머무를 순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연기하면서 한번도 외모를 신경 쓴 적은 없었다. 배우이기에 잘생겼다는 말보다 연기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다”는 정우성의 바람은 <강철비>에서 이뤄질 듯하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