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침묵> 촬영 현장에서 최민식(왼쪽)과 정지우 감독.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더라.”
영화 <해피엔드>(1999) 이후 18년 만이다. <침묵>으로 다시 만난 배우 최민식(55)과 정지우(49) 감독은 서로를 향해 똑같은 말을 했다. “오랜만에 만나 소주 한잔 하는데 엊그제 만난 것 같더라. 어느 계통에서 이런 기간에 다시 만나 일을 하겠나. 흔한 일은 아니다. 너나 나나 꾸준히 뭉개고 있으니 이렇게 만나는구나 싶었다.”(최민식) “최민식 선배는 그때도 지금도 (더하거나 흠잡을 데 없는) ‘완전한’ 배우다. 그저 자연 연령이 늘어 주름만 더 생긴 기분이었다. 나이를 잘못 먹으면 낡아진다고 느끼는데 최민식 선배는 늙지도 낡지도 않았더라.”(정지우)
“한결같더라”는 서로에 대한 평가는 단순한 상찬이 아니다. 영화 <침묵>은 약혼녀 유나(이하늬)가 살해당하고 그 용의자로 자신의 딸 미라(이수경)가 지목되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건을 쫓는 남자 임태산(최민식)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침묵>의 장르는 최민식” “정 감독의 가치관과 감성이 다 녹아 있는 작품”이라고 말할 만큼 <침묵>은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만들어졌다. 두 사람을 각각 지난 26일과 31일에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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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은 ‘해피엔드’
<해피엔드>는 정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이 작품으로 충무로에 인상적인 신고식을 한 그는 이후 <사랑니>(2005), <모던보이>(2008), <은교>(2012), <4등>(2015)을 만들며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가진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민식에게 <해피엔드>는 영화 <쉬리>(1998)의 차기작이었다. 흥행에 대한 부담에도 모험처럼 선택했을 신인 감독의 치정극은 그의 빛나는 필모그래피 중 하나가 됐다.
“어쩌다 보니” 함께 작품을 하는 데 18년이 걸렸다는 그들의 재회 소감은 어떨까. 최민식은 정 감독의 영화들을 봤다며 “하나도 안 변했네 싶어 반갑더라”고 했다. “특히 <4등>은 정지우가 만든 거라는 느낌이 딱 왔다. 정지우는 장면이나 대사의 의미가 이미 머릿속에 정리가 돼 있다. 배우로서는 그런 연출가가 좋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오랜 시간) 자기 주관을 고수하는 게 쉽지 않은데 자기가 분명한 사람이다. 우리가 <해피엔드> 이후에 공유할 게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 감독에게 최민식이란 배우는 든든함 그 이상이다. 정 감독은 <해피엔드> 첫 대본 리딩 현장의 떨림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최민식, 전도연이잖나. 대본 리딩을 하는 날, 부담감이 상당히 커서 미적거리며 늦게 갔다. 오랫동안 쓴 시나리오를 두 사람이 읽기 시작하는데 마술 같더라. 내 글 속의 인물이 살아 있는 사람이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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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과 정지우의 하모니
<침묵>의 원작은 중국 영화 <침묵의 목격자>다. 원작이 법정 스릴러로서의 특징이 도드라졌다면 <침묵>은 돈과 권력을 다 가진 재벌 총수 임태산과 주변 인물의 심리 변화에 힘을 싣는 휴먼 드라마다. 최민식은 돈만 밝히는 자수성가한 기업가, 한 여인을 진정으로 사랑한 남자, 딸을 아끼는 아버지로서의 다양한 감정을 연기했다.
최민식은 자신이 맡은 임태산 역에 대해 “이 작품의 구조 자체를 대변하는 캐릭터”라고 설명했다. “뒤늦게 찾아온 사랑을 잃고, 그 사건의 중심에 내 딸이 있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맞으면서 반성과 참회를 하는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기업가로서 챙길 건 챙기는 모습으로 스스로가 영화의 속임수(페이크)가 되는 인물이다.”
정 감독은 “이 영화의 장르가 최민식”이라며 “처음부터 최민식 선배를 놓고 만든 작품”이라고 했다. “정말 감탄한 장면은 임태산이 법정에서 증언선서를 할 때다. 어떤 정보를 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복선을 만들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오만불손하고 패배를 모르는 남자가 ‘앉아라’ ‘읽어라’라는 지시를 받을 때의 불쾌함을 몸으로 다 보여주더라. 저런 게 캐릭터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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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해피엔드’의 연장선?
대사와 장면 하나에서도 서로 의견이 어긋난 적이 없었다는 두 사람은 영화를 만들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이 영화의 백미인 엔딩신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타이의 한 노천 국숫집에서 찍은 영화 속 마지막 장면이자 실제 마지막 촬영분이었던 장면은 최민식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최민식은 “예정에 없던 장면을 찍자고 한 건데 감독이 동의해줘 고맙더라”고 했다. 정 감독은 “최민식 선배가 갖고 있는 미세함이 드러나길 바랐고, 영화 찍는 내내 함께 나눈 이야기를 임태산이 돼 꿀꺽 삼켜서 소화해내셔서 감사했다”고 말했다.
<침묵>의 마지막에서 임태산이 깊게 내뱉는 담배 연기는 <해피엔드>의 마지막 담배 연기와 닿아 있다. 어딘가 닮은 두 작품의 연관성에 대해 정 감독은 영화제작사 대표가 했다는 농담을 들려줬다. “18년이면 <해피엔드>에서 실직한 가장인 서민기가 자수성가해 대기업 총수가 되고, 그 딸이 미라가 될 수 있지 않나 하더라. 그리고 뒤늦게 사랑을 찾았다고 해도 말이 된다고 말이다.(웃음)”
“흥행 여부를 떠나 동료들과 행복한 작업이었다”는 최민식은 “<파이란>(2001), <올드보이>(2003)처럼 이 영화도 후유증이 긴 작품으로 남을 것 같다”며 만족감을 표했다. <침묵>은 11월2일 개봉이다.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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