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문희(75)씨는 현재 충무로에서 가장 주목받는 배우입니다. 그는 최근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나옥분’ 역을 맡았습니다. 실제 미국 의회 영어연설 장면 촬영 전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라며 극심한 긴장감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연기 경력 56년차, ‘연기가 늘었다’는 칭찬이 가장 행복하다는 그를, 현재 충무로 영화전문가들 사이에서 가장 전도유망한 배우로 꼽히고 있는 이제훈(33)씨가 만났습니다.
“예스, 아이 캔 스피크.”(네, 말하겠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사죄 결의안 채택을 위한 미국 의회 공개 청문회장 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옥분’ 할머니는 ‘증언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담담하게 답했다. 그의 입이 열리기까지 수십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한 장면이다. 지난 9월21일 개봉한 이 영화는 현재 관객수 319만명(10월19일 기준)을 넘어섰다. “이 나이에도 다시금 연기가 늘었다고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어서 힘이 나고 행복하다.” 배우 나문희(75)는 <아이 캔 스피크>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나옥분’으로 분해 무거운 주제를 유의미하게 대중의 마음에 전달했다. 그는 “한-일 관계 갈등 때문에 젊은 배우가 참여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었다”며 이번 영화의 공을 배우 이제훈(33)에게 돌렸다. 그는 ‘옥분’ 할머니의 사회적 가족이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속죄하는 국민의 마음을 대변한 ‘박민재’ 역을 맡았다. 이번 영화에 출연하게 된 이유를 묻자 그는 “제 자신이 배우이자 한 인간으로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작품에 참여하고 싶었다”며 “무엇보다도 나문희 선생님과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고 말했다. 의미있는 작품에 56년 경력의 대배우와 속 깊은 젊은 배우가 만났다.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까. 이제훈이 묻고 나문희가 답하는 형식을 빌려 56년차 배우 나문희를 탐구해 봤다. 사진은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주연배우 나문희와 이제훈이 서울 연남동의 ‘그루맘' 사무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글 김포그니 기자 pognee@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꾸준히 관객이 든다고 하니까 너무 감사해요.”
이제훈의 말을 나문희가 활짝 웃으며 받았다.
“오늘 처음으로 (김현석) 감독님한테 전화해봤네. 우리 영감님(남편)이 영화 보더니 무거운 주제를 잘 만들었다고 그러는 거야. 참 좋았다고. 영화 본 뒤로 나한테 더 잘해. 그 이야기 대신 전해주려고.”
나문희는 미국에서 들려온 소식들도 이제훈에게 전했다.
“뉴욕에서도 관객이 꽤 많대. 홍보도 안 했는데. 입소문으로.”
“캬, 역시.”
“엘에이(LA)에서 먼저 상영하고. 뉴욕에서는 나중에 했는데. 미국 사는 우리 딸이 ‘엄마 여기도 500석이면 300석이 들어차서’ 영화 보면서 엉엉 울고 앉았대. 감독님이나 제훈씨에게 자꾸 전화하고 싶은데 그냥 혼자만 좋아하고.”(웃음)
“우리 철 좀 들면 좋겠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90) 할머니의 미국 의회 증언을 소재로 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가 북미에서 관객 호응에 힘입어 연장 상영에 들어갔다. <아이 캔 스피크>는 지난 6일 워싱턴디시와 뉴저지주,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추가 개봉한 데 이어 뉴저지에서는 연장 상영이 결정됐다. 로스앤젤레스(엘에이)와 캘리포니아주 부에나파크에서 먼저 개봉해 영화를 선보인 뒤였다.
앞서 이용수 할머니는 지난달 28일 엘에이를 방문해 영화를 직접 관람했다. 일주일 전(22일) 할머니는 샌프란시스코 세인트메리 스퀘어 공원에 건립된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제막식에도 참석해 “역사는 잊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아이 캔 스피크>는 2007년 미 연방하원에서 통과된 ‘위안부 결의안’(HR 121) 표결을 앞두고 이용수 할머니가 공청회에 참가해 증언하기까지의 과정을 주요 모티프로 했다. 지난 18일 <한겨레>는 서울 마포구 연남동 ‘그루맘’ 사무실에서 두 주연배우의 특별한 만남을 주선했다. 이제훈이 묻고 나문희가 답하는 형식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정리했다.
“난 청문회장 장면이 기억에 남아. 영어를 정말 잘해보려고 평소에 제훈씨와 우리 영감한테도 배우고 그랬는데. 미국에 사는 딸네 집에 가서도 쉬지 않고 열심히 했는데. 옥분 할머니의 감정이 관객에게 어느 정도라도 전달됐으면 좋겠다 싶었거든.” 연기 경력 56년차 배우 나문희는 “실제로 미국 의회에 가서 증언하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께 누가 될까봐 죽기 살기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아이 캔 스피크>는 배우 나문희에게 크게 의존하는 영화다. 나문희가 연기한 나옥분은 그동안 극중에서 묘사된 여느 위안부 할머니와도 달랐다. ‘올 연말 영화제 여우주연상은 나문희의 것’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영화계에서 나온다. 이제훈은 “영화가 대중에게 미치는 메시지의 힘과 영향력을 인지해야 하고 작품을 선택할 때나 임하는 자세에서 그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배우였다. 스타로서의 길보다는 ‘의미’있는 작품을 찾던 젊은 배우는 마찬가지로 스타로서의 삶보다는 작품 속에서만 살아온 대선배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어 했다. 사석에서의 이제훈과 나문희의 모습은 마치 손자와 친할머니의 모습과 닮아 보였지만 배우의 삶과 시대적 고찰을 나누는 과정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수평적인 대화를 나눴다. 대화 말미에 이제훈은 “잠깐 반짝하는 스타가 아니라 오래 연기에 머무를 수 있는 배우의 길”에 대해 나문희의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나문희는 어떤 답을 내놓았을까.
이제훈(이) 우리가 ‘케미’ 커플이라던데요.
나문희(나) 커플이라니, 그럼 내가 제훈씨한테 많이 미안하지. 나도 미안한 걸 알면서 아닌 척하고 앉아 있는 거야. (제훈씨가) 연기할 때 준비를 완벽하게 해서 오잖아. 아주 똑발라. 정말 자기 관리를 잘하고. 연기하면서 불편한 거 있어도 제훈씨가 잘 참아주니까 정말 좋았어. 고맙고. 암만 내가 준비를 해 와도 상대가 잘 받쳐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어.
이 처음엔 선생님 앞에서 감히 대사 한마디 제대로 내뱉을 수 있을까, 그런 걱정 했어요. 그런데 대본 연습 끝날 때마다 ‘왜 이렇게 준비 많이 했어’ 칭찬을 계속해주시니까.
나 칭찬 아냐. 느낀 그대로지.
“증언하시겠습니까?”
일본군 위안부 사죄 결의안 채택을 위한 미국 의회 공개 청문회장 안. 앉아 있던 위안부 피해자 나옥분에게 의장이 물었다. 시장 주변 재개발에 맞닥뜨린 한 할머니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아이 캔 스피크>가 이야기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나옥분은 담담하게 답했다.
“예스, 아이 캔 스피크.(네, 말하겠습니다).”
나옥분의 입이 열리기까지 수십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나옥분’으로 상징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기까지 그만큼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나문희는 영화에서 나옥분을 연기했다. 지난 9월21일 국내 개봉한 영화를 본 관객은 10월19일 현재 319만명을 넘어섰다.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미국 의회 증언 소재로 한 영화
미 각 지역 연장 상영하며 화제
이 할머니, LA 방문해 직접 관람
“‘좋은 영화다, 꼭 봐야 될 영화다’
생각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
“역사의 아픔으로 국한하기보다는
우리 바로 세우는 밑거름 됐으면”
1961년 MBC 1기 공채 성우 출신
연기에 대한 갈망으로 탤런트 전직
“연기하면 너무 좋아, 아주 신나
배역 속 숨은 인물 찾는 과정 재밌어”
나이 들수록 연기 폭과 범주 늘어나는
거의 유일한 여배우라는 평가 받기도
“거창한 말은 어렵지만 내 자리에서 생각
아줌마나 엄마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이 나옥분 할머니를 연기하시면서는 어떤 마음이셨어요?
나 그냥 관객들이 ‘정말 좋은 영화다. 봐야 될 영화다’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용기가 ‘역사의 아픔’으로 국한돼 비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 사회의 큰 틀을 바로 세울 수 있는 밑거름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동안 일본이나 큰 나라들이 우리한테 너무 잘못했잖아. 우리를 마치 자기네들 ‘놀이터 장난감’이라도 되는 양 취급하고. 결국 위안부 할머니들이 역사의 지옥을 견뎌내셔야 했잖아. 이번에 할머니들의 삶이 다시 조명된 걸 계기로 우리가 철 좀 들었으면 좋겠어. 요새 정치도 싸움을 위한 싸움은 이제 그만해야지. 화합해서 멀리는 언젠가 남북통일도 됐으면 좋겠고. 그래야 힘센 나라들도 앞으로 우리를 볼 때 적절한 예의를 갖출 거니까. 제훈씨는 어땠어?
이 저도 한 사람의 배우지만 한 인간으로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작품에 참여하고 싶었어요. 특히 <아이 캔 스피크>는 단순히 위안부 피해자분들을 동정하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끌렸던 것 같아요. 이 영화를 하면서 깨달은 바가 컸어요. 젊은 세대로서 그동안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께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적극적으로 한 적이 있었나 반성했어요.
“영화 중반부에서 선생님이 어머니 산소 찾아가 넋두리하는 장면이 있었죠. 그 장면을 보고 많이 울었어요.” 이제훈은 <아이 캔 스피크>의 나문희 연기 중 이 장면을 특별히 기억나는 장면으로 꼽았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아이 캔 스피크>는 2014년 씨제이(CJ)문화재단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시나리오 기획안 공모전’에서 75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선된 시나리오로 만들어졌다. 2014년에 시작됐지만 영화가 극장에 걸린 2017년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소재의 무게 때문이었다. 일본과의 합의안을 두고 비판받은 박근혜 정부가 위안부 이슈 자체를 불편해하는데다, 일본에 한류시장을 구축해 놓은 배우들은 일본 팬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제작하겠다고 나선 이들은 이런저런 암초를 극복하지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 올해 초 이제훈이 이 영화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촬영이 시작됐다. 나문희는 이제훈에게 “용기를 내줘서 고맙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분들에 대한 글을 많이 읽었지”
이 작품 들어가기 전에 배역 분석을 하잖아요. 선생님께서는 나옥분 역을 어떻게 이해하셨어요?
나 그분들에 대한 글을 많이 읽었지. 지난 7월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할머니들 사진이 매일 나왔잖아요. 어릴 적 방앗간에 있다가 그냥 잡혀 가신 거잖아. 첫째는 나라가 제 역할을 못하고 지켜줘야 할 가족들도 지켜주지 못하고. (위안부가 되고 싶어 된 사람이 없었는데) 그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 사람은 위안부니까’ 이러면서 무슨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처럼 대했잖아. 그 인생들이 너무 마음 아파. 저려.
이 옥분 할머니 역을 2년 정도 준비하신 거라고 들었어요.
나 이 대본 본 지가 한 2년 됐으니까. 나는 배역을 맡으면 처음에는 물론 성격부터 분석하고 다음에는 옷 중에서 내가 입고 싶은 스타일을 입어보고, 머리도 만져보고. 그런데 머리숱이 적으니까 이 머리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잖아. 그래서 또 고민하는 거지. 그렇게 어떻게 할지 다 준비한 다음에 대사는 촬영 들어가기 열흘 전쯤, 까다로운 연기면 일주일 전쯤부터 몰입해서 열심히 외워요.
나문희가 연기한 나옥분은 ‘도깨비 할매’로 불렸다. 옥분은 시장판을 헤집고 다니며 튀어나온 간판, 위험한 상태의 건물이나 도로의 보수 등 민원을 8000건이나 넣는다. 구청 직원들에겐 ‘골치 아픈 블랙리스트’ 중 한 명이었다. 이제훈이 연기한 박민재(극중 나이 34살)는 9급 공무원이다. 민재는 옥분의 민원을 두고 팽팽한 기싸움을 한다. 옥분이 어느날 민재에게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이 제가 연기한 민재와 달리 옥분 할머니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했는데 연기하면서 힘들지 않으셨어요?
나 할머니들껜 미안하지만 난 편했어요. 사소한 부분까지도 편했어요. 우리가 배우로서 이야기를 ‘믿고 안 믿고’에 따라 역에 임하는 데 차이가 있는데, 이건 믿고 하는 거니까. 정말 있었던 역사를 이야기하는 거니까. 일전에 제훈씨가 내게 이런 얘기를 했지? ‘아무리 노력해도 제가 어찌 감히 피해자분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냐’고. 그래서 ‘이 작품을 대하는 마음이 굉장히 조심스럽다’고. ‘혹시라도 제 연기가 직접 겪으셨던 분들에게 누를 끼치진 않을까요’ 하고. 제훈씨 고민하는 모습이 보기 좋더라. 기특해.
이 특별히 기억나시는 장면이 있으세요? 저는 선생님이 어머니 산소를 찾아가서 넋두리하시던 장면에서 눈물을 참기 힘들었어요. 제가 봐온 선생님의 모습은 항상 누군가의 어머니셨는데 ‘그녀도 누군가의 딸이구나’ 깨닫게 된 순간이었거든요.
미국 의회에서 증언하기로 결심한 옥분은 엄마의 산소를 찾아가 말한다. “엄마! 나한테 ‘욕봤다’라고 한마디만 해주었으면 됐는데. 엄마… 왜 그랬어? (누나가 위안부라는 사실이) 아들 앞길 막을까봐 그랬어? ‘우리 딸 참말로 욕봤다’고 한마디만 해주고 가지.”
나 난 청문회장 장면이 기억에 남아. 영어를 정말 잘해보려고 평소에 제훈씨와 우리 영감한테도 배우고 그랬는데. 미국에 사는 딸네 집에 가서도 쉬지 않고 열심히 했는데. 옥분 할머니의 감정이 관객에게 어느 정도라도 전달됐으면 좋겠다 싶었거든.
옥분이 더듬거리는 영어로 미 의회에서 하는 말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25년간 일본에 하고 싶었던 말을 대변한다. “아이 앰 소리. 이즈 댓 소 하드?”(I am sorry. Is that so hard? 미안하다. 그 말이 그렇게 어려운가요?)
“난 안 강해. 강한 척만 하지”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두 주연배우 나문희와 이제훈이 18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위치한 사단법인 ‘그루맘'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미경 대표가 미혼모 대상으로 지원 사업을 하는 곳이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나문희는 ‘70대의 나이에도 주연으로 나서는 몇 안 되는 연기자’로 꼽힌다. 1960년부터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던 그는 1961년 엠비시(MBC) 문화방송 1기 공채 성우로 데뷔했다. 연기에 대한 갈망이 있던 나문희는 성우에서 탤런트로 전직했다. 티브이를 틀면 어디서든 나문희가 있었다. 엄마, 할머니, 다방 마담 등 여배우들이 꺼리는 배역들을 도맡아 했다. 1995년 한국방송(KBS1) 일일연속극 <바람은 불어도>에서 이북 사투리를 쓰는 억척스러운 할머니로 분했다. 이 작품으로 자신의 연기 인생 최초의 트로피인 케이비에스 연기대상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2005년에는 <주먹이 운다>로 제42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영화계에서도 큰 배우로 자리잡았다. 영화 <열혈남아>로 제7회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연기상, 제4회 맥스무비 최고의 영화상, 최고의 여자조연배우상, 제1회 대한민국 영화연기대상 여우조연상, 제28회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등을 받았다.
이 50년 넘게 연기를 해오셨어요. 선생님에게 연기는 어떤 의미인가요?
나 나는 연기가 좋아. 누가 그렇게 오래 연기하면 스트레스 안 받냐고 묻는데 연기하면 무엇보다 나는 너무 좋아. 신나.
이 뭐가 특히 재밌으세요?
나 캐릭터의 성격을 찾는 것도 너무 재밌고. 말하자면 정신과 의사나 무당 같은 거잖아. 이렇게 이야기하면 정신과 의사들이 속상하시겠지만 정말 역할에 빠져들기 전에는 정신과 의사 노릇도 해야 하고, 무당도 되어야 하고. 그래야 이게 어떤 인물인지 찾아지거든. 난 그렇게 역 속에 숨어 있는 어떤 인물을 찾는 과정이 참 재밌어.
이 요즘 배우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나 제훈씨가 연기하는 거 보면 우리 때보다 훨씬 잘하고 있어요. 배우에 대한 자긍심이 크고. 내가 배우 할 때는 항상 뭐랄까, 감독한테 좀 많이 의존하고, 자신이 있어도 이게 확신이 없기도 하고 그랬는데, 제훈씨를 보면 그런 부분에서 잘났어요.(웃음) 이제 시대가 많이 바뀐 것 같고.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도 많아서 부럽고, 또 그런 시대에 사는 것도 부럽고.
이 연기를 오랫동안 꾸준히 쉼 없이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잖아요. 제가 나이 들어서도 선생님처럼 쉬지 않고 배우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에요. 선생님 같은 배우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나 이미 되고 있잖아. 지금.(웃음) 좋아서 하면 돼. 난 제훈씨의 자긍심, 그런 걸 배우고 싶어요. 난 안 강해. 강한 척만 하지.
한국방송 드라마 <굿바이 솔로>에서부터 티브이엔(tvN) <디어 마이 프렌즈>까지 수많은 드라마에서 나문희와 함께 작업한 드라마 작가 노희경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누가 배우 나문희를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저는 세상에서 가장 욕심 많은 배우라고 말할 겁니다. 그리고 또 누가 인간 나문희를 말하라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화면에 단 한 컷도 거짓이었던 적이 없었던 인간이라고요. 늘 서민의 어머니로 살면서 남들이 보지 않는 순간에도 잠자리에서도 길거리에서도 서민으로 살아야 한다고 핏속마저 거짓은 안 된다고 하는 배우입니다.”(<씨네21> 인터뷰)
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연기의 폭과 범주가 늘어나는 거의 유일한 여배우라는 평을 받으시는데요?
나 아냐 그렇지 않아. 이번에 작품 하나 해낸 것 때문에 그런 거고. 그렇진 않아요. 쪼그라드는 중이야.(웃음)
이 많이 바쁘실 텐데 사람과 사회, 시사에 대해서도 평소 공부하시는 편인가요.
나 아니 안 바빠. 많이 공부해야지. 언제부턴가 주로 음악을 통해서 공부해. 아르바이트로 음악 디제이를 한 적이 있어. 스물한 살에 방송국에서 주는 돈이 너무 적어가지고. 그때 베토벤과 드보르작을 제대로 만났지. 드보르작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디제이를 했어. 지금 들으면 너무 좋지만 그때는 그렇게 좋은지도 모르고 그냥 했어요. 그러다가 에릭 사티라는 사람을 몇 년 전에 음악으로 만났는데, 그 사람이 한가하게 살롱에서 연주했다던가. 그러면서 내가 연기를 이렇게 해도 참 좋겠다. 힘을 쫙 빼고 정말 그렇게 햇볕에 가만히 멍하게 앉아 있는 할머니를 해도 되겠다. 음악을 들으면서 그런 걸 배워요. 파바로티를 들어도 있지. 다른 사람하고 발성이 달라. 나는 혼자서 그 노래에 나오는 가사를 많이 따라 불러. 다행히도 우리 영감이 고전음악을 좋아해서 항상 그거를 깔아 놨어. 우리가 조금 이야기가 통해서 결혼했어요. 음악이라는 게 그렇게 도움이 돼. 어떤 연기를 할 때면 때로는 탁 떠오르는 음악을 마음 속으로 깔고 찍어.
이 선생님도 배우이기 전에 여성이시잖아요? 이번 영화 하면서 여성들의 삶과 인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시는 시간이 됐을 것 같은데요.
나 너무 거창한 말은 어렵지만 내 자리에서 생각해봐요. 아줌마나 엄마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이 나라가 어려운데 영화에는 아줌마가 너무 조금 나와. 그치?
이 뉴스도 챙겨 보세요?
나 문재인 대통령님이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 4시간 넘게 방문한 게 인상 깊었어.
이 (문 대통령이) 문화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되 대신 간섭하지 않겠다’ 그런 말씀을 했는데, 어떻게 보셨어요?
나 예술인들 입장에서 중요한 말이거든. 어느 분야든 간섭은 참 불필요한 거야. 제훈씨도 아까 그랬잖아. ‘간섭은 관객이 하는 거지, 권력이 창작자한테 압력을 넣어서는 안 된다’고. 참 적절한 말이야.
이 만약에 배우가 안 됐더라면 뭘 하고 싶으셨어요?
나 노래하는 사람. 그런데 이번에 영화에 삽입된 ‘꽃반지 끼고’는 너무 못해서 속상해. 양심고백이야. 노래하는 사람 되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 많이 듣고 많이 따라 불러요.
이 더 해보고 싶으신 역이 있다면요?
나 난 하고 싶은 역 다 했어.(웃음) 제훈씨는 어떤 연기를 하고 싶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재밌고 웃겼다, 잘 봤다’로 끝나는 것이 아닌 연기를 하고 싶어요. 사람들에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주고 그걸로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연기요. 연기를 할수록 점점 신중해지고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아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순 없겠지만 그래도 영화를 보시는 분들에게 그런 연기를 할 수 있도록 스스로 공부하면서 그릇이 커졌으면 좋겠어요. 어찌 보면 배우는 좋은 글을 기다리는 사람인데, 마음에 드는 작품 없다고 연기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 좋지 않거든요.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이 되어야지”
나 제훈씨도 스트레스 많이 받아?
이 작품을 하지 않을 때 배우가 도태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백 프로 마음에 들지 않아도 선택하는 순간도 있거든요. 그래서 좋은 기획이 있다면 배우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나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있어?
이 꾸준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비밀입니다. 제가 만들 거거든요.(웃음) 선생님도 꼭 출연해주셔야 합니다. 나중에 설득할 거예요.
나 할 마음이 생기면 난 아무거나 다 해.(웃음)
이 슬럼프도 겪으셨겠지요?
나 없는 사람은 없겠지. 그냥 노력해야지 어떡하겠어. 뻔한 대답이지? 공백이 슬럼프야. 난 작품의 노예야. 이 나이에도. 그냥 항상 다음 밑그림이 그려져 있는 게 좋아. 그래야 정말 자유스럽게 쉴 수가 있고.
이 착한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 같아요.
나 착한 마음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이 되어야지. 일상과 상식에서 밑그림이 그려질 수 있어야 표출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리가 생활이 안 되면 연기가 사실이 아니라 거짓일 경우가 많아.
이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나 연기를 잘하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지.
이 저는 ‘이제훈이 나온 영화나 드라마는 좋더라, 이제훈이 선택한 작품은 믿고 볼 수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믿음이 가는 배우. 극장에서 시간과 돈을 써서 오시는 거잖아요. 그 돈이 아깝지 않게 해드리고 싶어요.
나 우와, 멋있다. 그렇게 하고 있어.(웃음)
나문희는 지난 추석을 앞둔 9월28일 관객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친필 편지를 제작사를 통해 공개했다.
<아이 캔 스피크>라는 좋은 영화를 하게 되어서 많이 행복합니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고, 우리가 겪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실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고 실제로 2007년에 미국 청문회장에서 연설하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더라구요. 처음 강지연 대표한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우리의 아픈 역사를 참 무겁지 않고 재미있게 또 희망적으로 그렸다고 생각이 들어 정말 잘해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어연설을 준비하면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겁도 나고 실제로 미국 의회에 가서 증언하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께 누가 될까봐 죽기 살기로 준비했습니다. (중략) 이 나이에도 다시금 연기가 늘었다고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셔서 힘이 나고 행복합니다. <아이 캔 스피크>는 정말 좋은 영화이고 진실하게 만든, 진짜배기 좋은 영화입니다. 사랑합니다. 많이 와주세요. 나옥분 역을 맡은 나문희 올림.
정리 김포그니 기자
pognee@hani.co.kr
나문희는 1961년 <문화방송> 라디오 공채 1기 성우로 입사해 연기자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1976년 나문희(가운데)가 김혜자(맨 오른쪽) 등 당시 활동하던 배우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 모습. <문화방송> ‘아름다운 만남 45년’
<문화방송> 베스트극장 <노란 잠수함>(2000년)에서 시한부 삶을 사는 어머니 역을 맡은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문화방송> ‘거침없이 하이킥’(2006년)애서 ‘야동순재’ 할아버지(이순재)와 부부로 출연한 나문희. 문화방송 제공
코미디 범죄 영화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2007년)에서 ‘국밥 재벌’ 할머니 역을 맡은 나문희. 시네마서비스 제공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나문희는 도깨비 할매 옥분역을 맡아 민재(이제훈)에게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조른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