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윅: 리로드>의 키아누 리브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공
왜 할리우드 액션 영웅들은 가진 것 없이 떠돌까. 22일 개봉한 ‘존 윅 시리즈’ 2부 <존 윅: 리로드>가 일깨우는 궁금증이다. 지난해 11월 말 2편이 개봉한 ‘잭 리처 시리즈’의 잭 리처, 지난해 다시 돌아온 <제이슨 본>까지 최근 할리우드가 선보인 액션 영웅들은 모두 ‘무소유’가 몸에 밴 중년의 외톨이다.
1편 <존 윅>(2015년 개봉)에서 전직 킬러 존 윅(키아누 리브스)은 아내를 잃고 개를 잃고 복수를 위해 총을 다시 잡는다. 존 윅을 사회적으로 얽매는 것도 감정적으로 속박하는 것도 없다. <존 윅: 리로드>에서 존 윅은 복수를 다 마쳤고 갱에게서 차를 빼앗아온 뒤 조용한 삶을 살려고 한다. 하지만 그를 가만두지 않는다. 집은 불타고, ‘피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로마로 향한다. 존윅이 움직이는 이유는 모호하다. ‘피의 맹세’는 기계적 약속에 불과하며, 이를 지키는 것은 피바람을 부를 ‘암살’이기에 정의롭지도 않다. 사랑은 이미 죽었다.
<잭 리처: 네버 고 백>의 톰 크루즈.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잭 리처: 네버 고 백>의 잭 리처 역시 집도 절도 없이 떠돈다. 영화 첫 부분, 카페에 걸려 있는 전화로 사건을 해결하고 카페를 나와 히치하이킹으로 차를 잡는다. 잭 리처가 가지고 다니는 건 칫솔 정도로 옷도 한 번 입고는 버린다. 정처없이 떠돌다가 사건을 접하게 되면 그것을 해결한다.
‘본 시리즈’의 본은 아예 제이슨 본, 그 이름마저도 자신의 이름이 아니다. 아내 또한 잃고 만다. 지켜야 할 어떤 것도 남지 않은 존재다. 기억을 잃고 몸에 배인 ‘살인 기계’의 본능대로 움직이면서 이름을 수시로 바꾸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김봉석 영화평론가는 “이들은 모두 소속되어 있던 조직에서 배제된 인물들이다. 학교, 국가, 군대 등의 조직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불만이 투사되어 있다”고 말한다. 미국의 전형적인 영웅 ‘카우보이’는 원래 ‘개인적’이었다. 이 개인주의가 90년대 신자유주의가 도래하면서 심화되었다. “회사, 학교, 국가 어느 것도 개인의 일생을 담보해주지 않으면서, 믿을 건 개인의 폭력밖에 없게 되었다.” 세 액션 영웅이 떠도는 삶을 사는 것도 궁극적으로 이들이 체제와 불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의 폭력’은 ‘정의’에 대한 미국인들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정당화된다. 영화 속 잭 리처는 “난 세상을 올바르게 하고 싶은 것이 아니오. 그저 사람들이 잘못된 일을 하는 것이 싫을 뿐. 그 차이를 알겠소?”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미국 웹진 <뉴 퍼블릭>은 잭 리처 시리즈는 이전의 소설이나 영화 속 미국을 떠도는 삶이 주는 실존적인 메시지와 근본적인 차이점을 드러낸다며 “법관, 변호사, 법률가 등에서가 아니라 법이 없는 곳에서 정의가 나타난다고 미국인들은 생각하는 것 같다”(2015년, ‘잭 리처가 보여주는 미국의 정의관: 백인·남자·무법지대’)고 분석한다.
웹진 <버즈 피드>는 “존 윅에게서 ‘워커홀릭’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본다”고 말한다. 은퇴한 존 윅은 분노나 금전 때문이 아닌 상황에 밀려 현장으로 복귀한다. 근사한 집을 사고 청바지를 입는 삶을 열었지만 삶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존 윅을 연기한 키아누 리브스의 실제 삶 역시 영화 <존 윅>에 힌트를 주었다. 리브스는 임신한 아내를 잃은 뒤 노숙자의 삶을 살았고, 출연료를 기부하거나 제작진과 나누며, 집을 사지 않고 지하철을 이용한다고 한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