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딸이 사라졌다. ‘내 인생에 엄마의 자리는 없다’는 듯 엄마를 거부하고 떠나버렸다. 12년 동안 딸의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고통. 이제 상처투성이 마음에 딱지가 앉고 겨우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때 딸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전해듣는다. 다시 딸을 찾아 헤매면서 엄마 줄리에타는 딸에게 자신의 인생에 대한 긴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당신이 엄마라면, 딸이라면, <줄리에타>를 보는 것은 고통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인 경험이며,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누구보다도 질기게 연결돼 있고, 가장 깊은 상처를 주면서도 끝내 화해를 갈구할 수밖에 없는 이 관계를 슬프고 아름답게 파고든 영화다.
딸에게 쓰는 편지 속에서 줄리에타는 20여년 전으로 돌아간다. 기차 앞자리에서 말을 걸어왔던 남자가 자살한 날 밤, 운명처럼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딸 안티아를 낳는다. 말다툼을 한 날 남편은 폭풍 치는 바다로 나가 목숨을 잃는다. 그날 이후 무너져내린 엄마를 극진히 보살피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듯 보였던 딸의 마음엔 무엇이 쌓여간 걸까.
여성의 삶, 여성들 간의 관계를 탐구해온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20번째 작품이다. 캐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의 소설 3편을 각색해 영화로 만들었다. 그의 전작들에 비해 이야기와 인물은 훨씬 간결하지만, 사랑, 죄책감, 애증, 상처, 분노, 용서를 통과해가는 여인의 삶을 간절하게 전달한다.
딸의 시선으로 어머니의 삶을 이해해가는 영화는 많지만, 이 영화는 어머니 자신의 이야기다. 어머니가 딸을 완전히 이해하고 화해할 수 있다고 섣불리 말하지도 않는다. 줄리에타는 나약하고 고통으로 주저앉는 어머니이지만, 용감하고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아름다운 여성이다. 사슴이 쫓아오는 기차에서 사랑의 격랑에 몸을 던지고, 딸이 머리를 말려주는 수건 아래서 나이든 여자로 변해버린 줄리에타는 신화 속 여인 같다. 아드리아나 우가르테, 에마 수아레스 두 배우가 젊은 시절과 중년의 줄리에타를 연기하며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감독은 애초 제목을 ‘침묵’으로 하려 했다고 한다. 가족 사이에 자기 삶을 솔직히 말하기는 얼마나 어렵던가. 그 침묵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오해와 상처가 쌓이는가. 줄리에타가 딸에게 자기의 삶을 털어놓는 편지를 쓰는 것은 가장 용기 있는 일이며, 인생을 직면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뒤에야 엄마의 고통을 이해하고 연락을 해온 딸을 찾아가는 어머니. ‘너 같은 자식 낳아 키워봐야 부모를 이해할 수 있다’는 뻔한 결론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모녀, 가족의 이야기란 어쩌면 가장 진부하면서도 강렬한 신화일 테니.
박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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