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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나운규 ‘아리랑’ 100돌 잔칫상에 원본 필름 올려야죠”

등록 2016-11-02 02:29수정 2016-11-02 09:06

[짬] 아리랑 전문가 한겨레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상임이사
10월14일 서울 광화문광장 서울아리랑페스티벌 개막식장에서 ‘나운규 서울아리랑상’시상식에 앞서 함께 자리한 김연갑(왼쪽) 상임이사와 나광열(오른쪽)씨.
10월14일 서울 광화문광장 서울아리랑페스티벌 개막식장에서 ‘나운규 서울아리랑상’시상식에 앞서 함께 자리한 김연갑(왼쪽) 상임이사와 나광열(오른쪽)씨.

지난달 1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2회 서울아리랑상’ 시상식의 주인공은 영화 <아리랑>을 만든 고 춘사 나운규 감독이었다. 1937년 35살 이른 나이에 요절한 나 감독과, 16년째 와병중인 아들 나봉한 감독을 대신해 손자 나광열(50)씨가 서울아리랑페스티벌 조직위원장인 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회장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이 장면을 누구보다 감회 어린 표정으로 지켜본 또 다른 주인공이 있었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 김연갑(62) 상임이사였다.

서울아리랑페스티벌 윤영달 조직위원장이  ‘서울아리랑상’ 수상자 나운규 감독의 손자 나광열씨에게 상패와 상금을 전달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서울아리랑페스티벌 윤영달 조직위원장이 ‘서울아리랑상’ 수상자 나운규 감독의 손자 나광열씨에게 상패와 상금을 전달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영화 ‘아리랑’은 1926년 10월1일부터 5일까지 서울 단성사에서 처음 상영됐으니 올해 탄생 90돌입니다. ‘민족의 혼’이 담긴 구전민요 아리랑을 소재로 식민지 백성들의 한을 대변해줘 개봉 이래 한국전쟁 이후까지 널리 사랑받은 작품입니다.”

그는 90돌을 기려 일본에서 수집해 소장하던 나운규 감독의 미공개 사진도 처음으로 공개했다. 지난해 서울아리랑상 첫 수상자인 호머 헐버트 박사도 그가 ‘헐버트 채집본 아리랑 악보’를 발굴해낸 인연이 있다.

그가 이번 수상의 의미를 각별히 여기는 이유는 단순히 ‘아리랑 90돌’의 역사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국 영화사는 물론 근대문화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작품인 ‘아리랑’의 원본 필름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으니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분명 어딘가에 남아 있다고 믿습니다. 수상을 계기로 100돌 잔치를 목표로 다시 한번 힘을 모을 계획입니다.”

1930년 3월 <아리랑> 2편 개봉 직후 28살의 나운규 감독. 1962년 북한에서 발행한 최초의 개인 전기인 <나운규와 그의 예술>(평양출판사)에 실린 사진이다. 김연갑 상임이사는 1999년 일본에서 입수했다고 밝혔다.
1930년 3월 <아리랑> 2편 개봉 직후 28살의 나운규 감독. 1962년 북한에서 발행한 최초의 개인 전기인 <나운규와 그의 예술>(평양출판사)에 실린 사진이다. 김연갑 상임이사는 1999년 일본에서 입수했다고 밝혔다.
70년대 최전방 군복무 시절부터 ‘아리랑 선율’에 매료된 그는 80년대 초 나운영·고은·허규 선생 등과 함께 ‘아리랑 기행단’을 꾸렸고 이어 ‘모임 아리랑’을 이끌다가 94년 ‘한민족아리랑연합회’를 만들어 지금껏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특히 그는 30년 넘도록 ‘아리랑’ 원본 필름의 존재를 추적해왔다. 93년 9월께 일본 나라시에 사는 아베 요시시게가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진 이래 정수웅·나봉한 감독 등과 더불어 수차례 일본으로 건너가 그를 설득했다. 아베는 선친이 20년대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때까지 한국에서 경찰의사로 근무하면서 모아놓은 6만여 편의 옛 영화 필름 목록에 ‘아리랑’도 들어 있다고 밝혔다. 98년에는 아베가 “김대중 대통령이 일왕에게 직접 반환을 요청하면 내주겠다”고 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으나 유야무야됐다. 아베는 끝내 필름 공개를 거부한 채 2005년 숨을 거뒀다. 그 뒤 아베가 소장해온 필름을 인수한 일본 문화청은 “아베의 창고를 조사했지만 ‘아리랑’ 필름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에 2010년 김 상임이사는 일본국립필름센터를 찾아가 아베의 소장 목록을 직접 확인했지만 ‘아리랑’ 등 한국 영화는 단 한 편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베가 죽기 직전 변호사를 선임해 사후 유품관리를 따로 맡긴 것을 보면 제2의 장소, 제2의 관리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아베는 북한에서도 70년대 초부터 총련 영화부장 여운각(여운형의 6촌 동생) 등을 통해 필름 반환을 요구해왔다며, 남북한이 통일되면 내놓겠다고 자주 얘기했어요. ‘아리랑’ 필름의 실종 배경에도 분단과 전쟁과 대립의 아픈 우리 현대사가 깔려 있는 셈이죠.”

개봉 90돌 기리는 ‘서울아리랑상’ 수상
‘와병’ 나봉한 감독 대신 손자 광열씨 받아
“북쪽 백부님 후손들에게 확인했으면…”

‘아리랑 지킴이’ 40여년 김 상임이사
93년 찾아낸 일본인 소장자 끝내 ‘침묵’
“새해 100돌기념사업회 꾸려 다시 추적”

함께 자리한 손자 광열씨도 “아버지는 3살 때 조부께서 돌아가신 바람에 가족사진 한장도, 추억도 거의 없으셨지만 유지를 잇고자 영화감독이 됐고 원본을 찾으려 애쓰시다 끝내 쓰러지셨어요. 그나마 조부께서 남긴 유품마저 잦은 이사로 유실됐고요. 북쪽에 남았던 백부와 그 후손들은 우리보다 더 많은 자료나 유품을 갖고 있지 않을까요?”라며 이산가족의 안타까움을 전했다.

김 상임이사는 “북에서 ‘아리랑’ 원본 필름을 본 적이 있고, 영상으로 찍어두기도 했다”는 신상옥 감독의 증언이 있었고, 80년대 일본의 핵기술자들이 김정일을 만나러 다닐 때 원본 필름을 선물로 전했다는 소문도 있다며, 남북 문화교류의 또 다른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가장 최근의 증언으로는 근현대사 자료 수집가 이석우씨가 <월간 조선>(10월호) 인터뷰에서 “일본에서 ‘아리랑’ 원본 필름을 팔겠다는 사람이 나왔다는 제보를 받고 건너가 확인해보니 앞부분 일부에 ‘아리랑’ 첫 장면이 들어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씨는 “미국에서 ‘아리랑’ 필름이 나올 수 있다”는 주장도 했다. 미군정이 국내·수입 영화 검열도 하고 필름 보급도 하는 등 영화정책을 관장했는데 한국 정부에 권력을 이양한 뒤 영화 필름을 모두 본국으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김 상임이사는 “‘아리랑’은 모두 3부작 시리즈로 제작됐고, 개봉 이후 50년대까지 전국에서 최소한 830회 이상 상영됐기 때문에 어딘가에는 분명 필름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 차길진 협회 이사장, 원로 영화평론가 김종원, 영화연예사가 김종욱 선생 등과 함께 새해 1월 100주년기념사업회를 구성해 일본으로 아베의 변호사를 만나러 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아리랑 원본 찾기 사업’에는 나광열씨와 서울아리랑페스티벌 조직위원회에서도 지원할 것으로 알려졌다.

글·사진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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