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규가 1937년 유명을 달리한 뒤 추모사가 실린 <삼천리>12월 상순호. 신나라레코드제공
<삼천리> 12월상순호의 나운규 추모 기획 ‘그리운 나운규여’. 신나라레코드 제공
“당신은 외그리도 일즉이 떠나시엿단 말입니까. 당신이 입버릇갓치 말하든 ‘나는 꼭 세상을 놀내일 작품을… 내고말 것이야. 나는 영화를 위하야 살고 영화를 위하야 죽을 것이야’하든 그 말소래 아직 나의 귀에 들니는듯한 오날 움즈기는 당신에 그림자를 다시 차저볼 수 없다니 그것을 믿어야 오를가요.”
처절한 슬픔에 젖은 이는 여배우 신일선이요, 당신은 일제강점기 조선 민중의 애환을 그린 영화 <아리랑>의 감독 나운규다. 나운규가 1937년 8월9일 35살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뒤, 잡지 <삼천리>가 12월 상순호의 기획 ‘그리운 나운규여’에 실은 글이다. 오는 10월1일 <아리랑> 개봉 90주년, 나운규 타계 80년을 맞아 신나라레코드 쪽이 이 글들을 발굴해 28일 공개했다.
기획에는 네 여배우의 조사가 묶여 실렸다. 1932년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에 출연한 문예봉은 “내가 영화인이 되었다는 것은 오직 나운규씨 때문이었다”며 아버지를 통해 직접 말을 넣은 결과로 선망하고 존경하던 나운규의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고 돌이킨다. 김연실은 여학우들과 테니스를 치고 있는데 “아무렇게나 수염을 기른 험상궂은 사람” 나운규가 나타나 이른바 ‘길거리 캐스팅’을 당했던 기억을 썼다. 복혜숙은 <장한몽>에 같이 출연했던 나운규의 대단한 연기를 회고했다. 복혜숙은 자신이 신일선을 함흥의 한 극단에서 빼냈던 일도 이야기하는데, 신일선은 그 뒤 상경해 나운규에 의해 <아리랑>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된다.
문예봉, 신일선, 김연실은 모두 나운규가 데뷔시킨 인물이었다. 문예봉과 김연실은 해방 뒤 월북하여 인민배우로 활동했고, 신일선은 남쪽에서 70년대까지 1세대 원로배우로 활동했다. 복혜숙은 한국 최초의 재즈 가수이기도 했다.
<삼천리> 기사는 당시의 문화 예술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 구실을 한다. 공개된 기획 지면의 한 구석에는 시인 모윤숙이 편집진에 합류하며 ‘입사의 변’을 적은 것도 보인다.
구둘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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