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개봉한 <날, 보러와요>가 주말 30만명의 관객을 모으며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개봉 첫 주말 1위 관객 수로는 올해 들어 가장 적지만, ‘영화계 봄 가뭄’ 가운데 소규모 스릴러 영화가 거둔 성과다. 영화는 보호자 2인의 동의와 정신과 의사의 소견이 있으면 정신병원에 감금될 수 있는 법 조항을 소재로 삼았다. 시사프로 소재 같다. 실제로 영화에는 시사프로 피디가 등장해 사건을 추적해간다. 한 달 전 개봉한 <널 기다리며>는 총 관객 60만명을 불러모으고 막을 내렸다. 복수를 위해 연쇄살인범의 출소를 기다리는 희생자 딸의 이야기다. 심은경의 연기 변신으로 화제를 모았다. 두 영화는 몸집 작은 권투 선수처럼 링 위에 나섰다. <널 기다리며>는 순제작비 30억원, 촬영에 석 달이 걸렸고, 영화를 마무리한 뒤 재빠르게 개봉했다. <날, 보러와요>의 촬영 기간은 한 달이 조금 넘는다. 순제작비는 10억원이다. 지난해 8월 촬영을 마무리하고 적절한 개봉 시점을 잡았다.
발빠른 스릴러에 곰삭은 스릴러가 13일 합류한다. <시간이탈자>는 2013년 시나리오가 완성되어 캐스팅에 들어갔고 제작비도 60억원이 들었다. <엽기적인 그녀> 등 멜로영화를 만들다 최근에는 중국에서 여러 편의 영화를 감독한 곽재용 감독이 스릴러 영화에 도전했다. 과거를 재현하기 위한 제작비가 많이 투입되었다. 세 편의 스릴러 영화를 통해 한국 스릴러 영화의 현재를 짚어봤다.
■ 벽은 알고 있다 <시간이탈자>에서 연쇄살인범을 추적해온 한 인물은 벽에 신문기사와 사건 기록, 사진 등을 채워놓았다. ‘끈기’와 ‘추적’은 벽 하나로 요약된다.
<널 기다리며>에서 희주가 ‘수첩’으로 삼는 것은 안방 바닥이다. 사무실이나 구석진 방이 아니라 삶의 공간 안에 단서를 모아놓음으로써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 추적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벽과 방바닥, 두 공간 모두 따지고 보면 연쇄살인범이 만들어낸 공간이다.
<시간이탈자>는 시대 간의 교신을 통해 연쇄살인범의 살인을 막으려 한다. <널 기다리며>는 연쇄살인범 때문에 목숨을 잃은 희생자의 딸이 ‘도덕으로 가득 찬 연쇄살인범’이 된다. 2008년 <추격자>의 성공 이후 한국에도 ‘연쇄살인범 장르’가 자리잡았다. 역대 연쇄살인범 영화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연쇄살인 소재 영화가 쏟아져나왔다. 김봉석 문화평론가는 “살인마 스릴러는 우리나라에서는 무리수인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소위 극장형 연쇄살인범이 한 명도 없었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 비슷비슷한 연쇄살인마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는데 현저하게 리얼리티가 떨어진다”고 말한다. 할리우드에서 막장가족극을 소재로 가져온 <나를 찾아줘>처럼 스릴러 영화에 대한 새로운 소재 개발이 필요하다.
소재 부재는 중복 설정으로도 나타난다. <시간이탈자>는 시대 간 교신-사건 예방-역사의 변화 등이 3월 종용한 티브이엔 드라마 <시그널>과 판박이다. 드라마가 스릴러의 가장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되어버렸다.
■ 극과 극의 여자들 <널 기다리며>와 <날, 보러와요>에서는 모두 여성 캐릭터가 스릴러 전면에 나섰다. 그래서일까 제목이 공통적으로 친근하게 ‘날’과 ‘널’을 앞세웠다.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 외에도 이들 역할이 ‘딸’이라는 점도 공통점이다. <널 기다리며>는 경찰관 아버지의 딸 희주(심은경)의 끈질긴 추적을 보여주고, <날, 보러와요>의 강수아(강예원)는 의붓아버지와의 갈등으로 병원에 갇혔다. 두 영화에서 둘은 사건을 만들어내는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희주는 연쇄살인범을 기다리며 스스로를 교육시킨다. 완벽한 계획과 체력 훈련, 정신 무장을 혼자 해낸다. 강수아는 병원을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영화 내내 희주는 이야기의 진행을 틀어쥐고 있다. 문제는 그가 주도하는 것이 범죄라는 점이다. 그는 복수를 향해 도덕적 일탈을 한다. 변형된 ‘팜파탈’인 셈이다.
<시간이탈자> 속 여성의 역할은 위의 두 영화와 대비된다. 임수정은 두 시대에 걸쳐서 전형적인 희생자의 역할을 한다. 남성들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뛰어다닌다. 비주얼에서도 전형적이다. 추격 장면에서도 치마를 입고 뛰어다니며, 죽임을 당하는 장면에서 하얀 원피스를 걸치고 있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 감독의 지론도 ‘죽으면서도 예뻐야 한다’였다고 한다.
■ 스릴러는 스릴러다 최근 <내부자들> 등 스릴러 영화가 흥행을 주도하고 있다. 기피 대상이던 스릴러 영화가 유행상품이 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때로는 장르에 대한 이해 없이 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황진미 영화평론가는 <널 기다리며>는 설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상대편이 죗값을 치르게 하려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뒤집어씌운다. 폭력을 국가가 독점해온 근대적 사법 체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
스릴러에 대한 전반적인 문화가 형성되지 않은 한국의 상황에서 어설픈 시나리오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얼기설기 만들어지는 스릴러 영화의 공통점으로 ‘원작’의 부재가 지적된다. 김봉석 문화평론가는 영화에 원작을 제공할 만한 스릴러 소설 시장이 성장하지 못하는 것도 한 원인이라고 말한다.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드는 과정에서 액션적인 재미의 볼거리를 덧붙이면서 개연성이 흩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원작이 있다면 얼개를 살려갈 수 있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