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해운대구 우동 영화의 전당 야외극장에서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이 열리고 있다.(위) 맨 위 작은 사진은 지난 9일 부산 벡스코의 아시아필름마켓. 씨네21 비프(Biff) 데일리 사진팀, 아시아필름마켓 제공
르포 10일간의 부산국제영화제
▶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가 10월2일부터 11일까지 열렸다. 아시아의 재능 있는 젊은 감독부터 알랭 레네, 리처드 링클레이터, 쉬안화, 임권택 등 거장들의 신작까지 다양한 작품이 소개됐다. 무엇보다 아시아필름마켓은 “역대 최고의 마켓”이라 불릴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열흘 동안 부산에서 만난 영화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극장에서 영화 많이 봤겠네예.”
부산 택시 기사가 물었다. 오며 가며 만나는 사람마다 물었다. … 불행하게도 한 편도 못 봤다. 단 한 편도. 영화 기자가 부산 영화제 출장 가서, 그것도 열흘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뭘 하고 다녔냐고? 띵까띵까 놀지 않았다. 아니, 개미처럼 일만 했다. 해가 떠 있을 때는 사람을 만났다. 부산에 온 감독, 배우, 제작자를 인터뷰했다. 영화제 기간 동안 열리는 아시아필름마켓 취재도 했다. 영화를 사고파는 사람들이 모인 시장을 둘러봤다는 얘기다. 해가 지면 사무실에 들어와 기사를 썼다. 신속하게 쓰고 정확하게 넘겨야 한다. 그렇게 매일 만든 책은 ‘부산 영화제 공식 데일리 <씨네21>’이라는 이름으로 영화제를 찾은 손님들에게 뉴스와 정보를 제공했다. 부산에서 영화를 보지 못했던 이유도 부산국제영화제 서울 사무실에 마련된 프리뷰룸에서 미리 영화를 보고, 데일리에 들어갈 프리뷰와 기획기사를 써놓고 내려왔기 때문이다. 부산에서는 인터뷰하고, 이런저런 행사를 취재하는 게 전부다. 이걸 올해로 5번째 하고 있다.
007 작전 방불케 한 탕웨이 표지 촬영 과정
미리 본 올해 부산 상영작은 부산의 정체성에 충실했다. 아시아 각국의 수작을 소개하고, 아시아의 재능 있는 신예들을 발굴하려는 원칙 말이다. 아시아영화의 창과 뉴커런츠 부문 상영작이 그것이다. 개인적으로 베트남 출신의 낌꾸이부이(킴퀴부이) 감독의 <번식기>가 인상적이었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지적 장애를 겪는 아들을 위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는 이야기인데, 아버지의 노력이 광기로 변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성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데뷔작이라는 사실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강렬했다. 유럽·북미·중남미·아프리카 영화 역시 거장과 대중적인 작품은 월드시네마로, 한두 편 만든 게 경력의 전부지만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작품은 플래시 포워드로 잘 구분했다. 예년에 비해 눈에 띄는 변화는 거장들의 작품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일단 유럽으로 눈을 돌려보자. 알랭 레네, 장뤼크 고다르, 그자비에 보부아, 다르덴 형제, 아벨 페라라, 켄 로치 등. 북미 지역은 또 어떤가. 리처드 링클레이터와 데이비드 고든 그린, 토미 리 존스 등. 다시 중남미로 시선을 돌리면 리산드로 알론소가 있었다.
어느 하나 놓칠 수 없는 작품들인데 하나만 꼽으라면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신작 <보이후드>다. 이 영화는 올해 베를린영화제에 출장 가서 본 작품이다. 주인공 메이슨(엘라 콜트레인)과 그의 가족 등 주요 등장인물을 미국 텍사스에서 12년 동안 꾸준히 담아온 ‘진짜’ 성장담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비포 선라이즈>(1995), <비포 선셋>(2003), <비포 미드나잇>(2013) 연작을 통해 같은 배우(이선 호크, 줄리 델피)를 집요하게 탐구한 적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42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틈나는 대로 배우와 스태프가 모여 꾸준히 찍은 대서사시다. 시간 경과를 알리는 자막 없이 어린 소년이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이건 영화가 아닌 실제 상황이라는 점에서 경이롭고, 아이가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 대견스럽다(베를린영화제에서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아이가 잘 자랄지 걱정도 많이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잘 성장해주어 고맙다”고 말한 바 있다). 10월23일 국내 개봉하니 놓치지 말 것.
부산에서 데일리 9권을 만드는 건 마라톤과 같았다. 나를 포함한 데일리팀은 10월2일 목요일 개막식과 3일 금요일 개천절, 4일 토요일, 5일 일요일로 이어진 황금연휴를 기사 마감과 함께 정신없이 보냈다. 영화제 초반, 가장 신경 썼던 게스트는 탕웨이였다. 쉬안화(許鞍華·허안화) 감독의 신작 <황금시대>로 컴백한데다 김태용 감독과의 결혼 뒤 한국에선 처음 참여하는 공식적인 자리다. <황금시대>는 중국 여성 작가 샤오훙(탕웨이)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인데, <색, 계>, <만추> 등 전작이 그랬듯이 탕웨이는 역경과 시련을 겪은 여인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탕웨이를 모시기 위해 영화제 시작 한 달 전부터 섭외를 시작했다. 섭외 방법은 물론 비밀이다. 분명한 건 섭외부터 인터뷰 진행, 표지 촬영까지 모든 과정이 007 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는 사실. 1년 만에 만난 그녀는 여전히 친절했고, 아름다웠다. 그 덕분에 그의 얼굴로 장식된 데일리 3호 표지와 인터뷰 기사는 주말 영화제를 찾은 관객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해준 탕웨이와 인터뷰 섭외에 도움을 준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주말이 정신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파티가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씨제이(CJ), 롯데, 쇼박스, 뉴(NEW) 투자배급사 4사, 극장, 제작사가 여는 밤 행사에선 각사의 내년 개봉 예정작들이 공개됐다. 누가 어디에 출연했는지, 내년에는 무슨 영화를 개봉할 건지, 언제 촬영을 시작하는지 등 온갖 정보가 좁은 해운대에서 팝콘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기자 역시 ‘불금’과 ‘불토’ 양일 동안 <군도: 민란의 시대>를 만든 윤종빈 감독과 함께 보냈다. 그가 부산에 내려온 건 <군도: 민란의 시대>의 영화제 상영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운영하는 영화사 월광의 두번째 작품 <검사외전>(제작 영화사 월광, 사나이픽쳐스)이 쇼박스의 내년 개봉 예정작에 포함됐기 때문이다(영화사 월광의 창립작은 <군도>). 쇼박스는 자사 밤 행사를 통해 <검사외전> 제작 소식을 알렸다. 이 영화는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가게 된 폭력 검사가 재능 있는 범죄자들을 모아 조직에 복수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다. 윤종빈 감독의 전작 <비스티 보이즈>와 <군도>, 강제규 감독의 <마이웨이>의 조감독을 맡았던 윤종빈 감독의 후배, 이일형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 술자리에서 윤 감독의 소개로 만난 이일형 감독은 홍콩 영화, 특히 오우삼(우위썬) 감독을 좋아하는 대구 사나이였다. 검사 역에 황정민이 캐스팅됐고, <신세계>를 제작했던 사나이픽쳐스가 함께 제작한다고 하니 꽤 강렬한 누아르 영화 한 편이 나올 것 같다.
서울서 미리 본 영화, 개인적으론
<번식기>와 <보이후드> 인상적
낮엔 인터뷰, 밤엔 데일리 마감
주말엔 각사 라인업 공개하는
파티에서 온갖 영화정보들 난무 벡스코서 열린 아시아필름마켓
올해 화두는 단연 ‘큰손’ 중국
베이징광파전영전시국 등 9곳 참여
자금난 겪는 APM에 3만달러 지원
마켓 폐막식도 후원하며 힘 과시
‘다이빙벨’ 시사회 현장엔 사복경찰관들도
폭풍 같은 주말이 지나자 영화인이나 관객들이 썰물처럼 부산을 빠져나갔다. 그때 영화제를 다시 달아오르게 한 건 <다이빙벨>(감독 이상호·안해룡)이었다. 서병수 부산시장의 상영 취소 발언으로 논란이 됐던 <다이빙벨>이 월요일 오전 부산에서 처음 공개됐다. 이를 취재하려는 기자들이 상영관의 입구를 가득 메울 만큼 관심이 집중됐다. 어디어디 경찰임을 알 수 있는 파일을 들고 있는 사복형사도 눈에 띄었다. 익히 알려진 대로 <다이빙벨>이 부산에서 상영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봉준호 감독은 10월3일 열린 뉴커런츠 심사위원 기자회견에서 “일단 개인적인 생각이다. 시장님이 딱히 나쁜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영화제의 생리나 프로그램 운영 과정을 잘 모르셔서 실수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며 “부산영화제는 내년이 20주년이다. (<다이빙벨> 상영 중단 요청은) 30년 된 명가 식당에서 육수의 어떤 재료를 빼달라고 하는 것과 같다. 시정 첫해이고 영화제 운영에 대해 잘 몰라서 벌어진 실수로 본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말이 맞다. 조직위원장의 정치적 입장이나 발언 때문에 영화제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미 지자체나 시장의 발언 때문에 홍역을 치른 영화제를 보아오지 않았나.
<다이빙벨>이 영화제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는 동안 벡스코(부산전시컨벤션센터)에서는 아시아필름마켓이 개막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대로 아시아필름마켓은 전세계 세일즈 관계자들이 모여 영화를 사고파는 시장이다. 올해 마켓의 화두는 단연 ‘큰손’ 중국이었다. 베이징(북경)광파전영전시국을 비롯해 베이징 소재 제작사와 배급사가 9개나 참여했다. 이 중 유쿠투더우, 아이치이, 베이징광파전영전시국 세 회사는 처음으로 부산에서 자사의 밤 행사를 열어 한국 제작사와 감독들을 적극적으로 만났다. 중국 온라인 동영상 사이트 아이치이(iQIYI.com)는 마켓 기간 동안 롯데엔터테인먼트 라인업(개봉 예정작) 40여편과 화인컷 라인업 50여편의 온라인 독점 판권 계약을 체결했다. 아이치이와 마찬가지로 온라인 동영상 사이트 유쿠투더우는 자금난 때문에 상 2개를 취소하려던 아시아프로젝트마켓(APM)에 3만달러를 지원하며 숨통이 트이게 했고, 마켓 폐막식도 후원했다. 한마디로 중국 자본이 막강함을 여실히 보여준 마켓이었다.
중국 회사들의 마켓 참여 덕분일까. 올해 마켓은 전세계에서 온 바이어들로 바글바글했다. 각 회사의 세일즈 부스, 아시아프로젝트마켓 부스는 미팅하려는 사람들로 만석이었다. 사실 전세계 세일즈 관계자나 바이어들에게 부산은 ‘간을 보는 곳’이다. 세일즈 관계자와 바이어들은 매년 마지막 마켓인 아메리칸필름마켓(American Film Market, AFM)에 가기 전에 가을에 열리는 토론토, 부산, 도쿄가 운영하는 마켓을 둘러본 뒤 최종 거래는 아메리칸필름마켓에서 해왔다. 그러다 보니 부산은 거쳐 가는 곳이 되었고, 거래 실적이 자연스럽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아시아필름마켓 전양준 운영위원장은 “아직 대외비라 실적을 공개할 수 없다. 눈에 띄게 는 건 분명하다”며 “중국 기업들이 대거 참여했고, 아이피티브이(IPTV)를 비롯해 국내 부가판권 시장이 성장하면서 국내 수입사들의 외화 구매가 증가했다”고 올해 마켓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마켓과 함께 매년 열심히 출석 도장을 찍은 행사도 있다. 아시안영상정책포럼이다. 쉽게 말해서 아시아 각국의 영상위원회들이 모여 아시아 영화 발전을 논의하는 자리다. 올해는 아시아 영화 지도를 그릴 수 있는 포털사이트를 구축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아시아 영화를 좀더 효율적으로 세계에 소개하고 교류를 장려하기 위해 온라인 플랫폼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이다. 온라인 플랫폼 구축은 자국에서 상영관 부족으로 상영 기회를 잡지 못한 아시아 영화들이 ‘영화제용 영화’로 남는 현상을 두고 공적 차원의 지원 방안을 논의하다가 나온 대안 중 하나다.
“혹시 아나, 어린이 관객이 자라서…”
사실 부산 마켓이나 아시안영상정책포럼 같은 얘기는 아무래도 딱딱하다. 하지만 영화제에서는 영화만 상영하는 게 아니라 관객에게 보여줄 영화를 사고파는 사람들도 있고, 아시아 여러 국가들이 더욱 효율적으로 영상 정책을 교류하기 위해 이렇게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 밖에도 장소를 잘못 전달해 해운대 한 곰장어집에 있는 김기덕 감독을 부랴부랴 만나러 갔던 일은 다시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이탈리아 호러영화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의 딸이자 신작 <아리아>를 들고 부산을 찾은 아시아 아르젠토 감독은 참 근사하고, 우아한 여자였다. 매일 마감이 끝나면 숙소 근처에서 한 짧은 뒤풀이는 피곤했지만, 지나고 나면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내년이면 20살이다. 좋은 영화를 소개하는 영화제로서, 좋은 영화를 사고팔 수 있는 마켓으로서 부산국제영화제는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다. 부산이 앞으로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개막식을 하루 앞둔 지난 10월1일, 올해 처음으로 어린이 관객을 위해 ‘씨네키즈’ 섹션을 신설한 홍효숙 프로그래머에게 들은 말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한다. “부산은 매년 발전해왔다. 이제부터 외형 성장보다 디테일한 운영을 하는 데 신경 써야 한다. 씨네키즈를 신설해 어린이 관객을 위한 작품을 상영하는 것도 그래서다. 혹시 아나, 어린이 관객이 자라서 부산의 충성도 높은 관객이 될지.”
김성훈 <씨네21> 기자 pepsi@cine21.com
3일 오후 쉬안화(허안화) 감독의 영화 <황금시대> 기자회견장인 부산 해운대구 월석아트홀에 모습을 드러낸배우 탕웨이. 씨네21 비프 데일리 사진팀
<번식기>와 <보이후드> 인상적
낮엔 인터뷰, 밤엔 데일리 마감
주말엔 각사 라인업 공개하는
파티에서 온갖 영화정보들 난무 벡스코서 열린 아시아필름마켓
올해 화두는 단연 ‘큰손’ 중국
베이징광파전영전시국 등 9곳 참여
자금난 겪는 APM에 3만달러 지원
마켓 폐막식도 후원하며 힘 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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