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새벽 2시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윤태호 작가 화실에서 작가(왼쪽 맨 위 모자 쓴 사람)와 문하생들이 만화 <인천상륙작전> 24화를 바쁘게 마감하고 있다.
[토요판] ‘인천상륙작전’ 마감 현장
목요일 밤이면 어김없이 ‘레이스’가 시작된다.
지난 5일 오후 6시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한 오피스텔에 자리잡은 윤태호 작가의 화실은 <한겨레> 토요판과 포털사이트 네이트에 동시 연재중인 만화 <인천상륙작전> 제24화의 마감을 앞두고 있었다. 마감 시한인 ‘데드라인’은 늦어도 금요일 오전 9시. 그래야 토요일치 신문에 무리 없이 실을 수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 아니 본격적인 마감 작업에 앞서 체력을 비축해야 했다. 윤 작가는 자신의 문하생 서아무개(31), 박종혁(24), 정지현(24)씨 등과 함께 같은 건물 1층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가 김치찌개와 제육볶음을 먹었다. 그는 이날만 밥을 따로 먹은 홍민지(24)씨와 평소에 외부에서 배경 그림을 그리는 2명의 문하생을 포함해 모두 6명과 공동으로 작업한다. 그중 박씨와 정씨는 화실에서 먹고 잔다. 저녁식사 주문을 마친 윤 작가가 말했다.
“3년 전쯤 (한겨레 토요판) 편집장님을 만나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만화를 구상중이라고 말씀드리고 올해 3월에 연재를 시작했어요. <미생>이 끝난 7월까지 두 작품을 병행하느라 힘들었죠. 초반에 글이 많아서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고 글을 줄였어요.”
윤 작가는 문하생들이 그려둔
248개의 배경 그림을 이용했다
태블릿펜으로 슥슥 선을 그었다
드로잉 도구를 낀 손의
움직임이 작고 빠르고 섬세했다 작가가 데생을 다 마치고 나면
문하생 6명이 배경 그리고 채색
“18페이지 신문 출처 넣어라”
최종점검 나선 윤 작가의 말투는
<미생>오 과장을 보는 듯했다 문하생들 “옛날 신문자료 그리기는 최악” 오후 6시39분, 화실 문이 다시 닫혔다. 윤 작가의 컴퓨터에는 인천 풍경, 전쟁 장면, 구한말 자료가 폴더별로 촘촘히 정리돼 있었다. 한국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모던보이>와 <장군의 아들> 파일이 알차다. 연재 시작 반년 전부터 자료 수집을 시작했다. <인천상륙작전>은 <미생>보다 컷 분량이 3페이지가 더 길기도 하지만 역사물을 그린다는 부담도 상당한 작품이다. 책꽂이에 꽂힌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편년 대한민국사 1>, <대한민국사 연표 1>과 현대사 연구논문 등은 취재자문을 하는 역사 전공자 구완회(42)씨가 전해준 것들이었다. 구씨가 참고할 만한 자료를 건네면 윤 작가가 이를 토대로 이야기를 쓴다. 감시자의 등장은 달리는 말을 때리는 채찍과도 같다. 마감 현장을 가득 채우는 것은 스포츠 채널의 야구 중계뿐이었다. 연필이 종이에 스치는 소리 대신 달각달각, 태블릿피시에 태블릿펜 부딪히는 소리가 더해졌다.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김태균 선수 유니폼을 입고 그림을 그린다는 문하생 정씨가 배경으로 쓸 장승을 그리다 살짝 말을 꺼냈다. “오늘은 선생님이 평소보다 빨리 시작하시네요. 보통 ‘필’이 꽂히셔야 (데생) 작업을 시작하시는 편이거든요. 전에 한번 금요일 오후 3시40분에 마감하셨나? 그때 신문사 난리나지 않았어요?” 난리가 났고 그 이유로 지금 여기에 왔노라 말하지는 않았다. 이미 윤 작가는 A4 크기 스프링 연습장에 코를 박고 콘티(대본)를 그리고 있었다. 자를 대고 샤프로 대사와 설명을 넣었다. 작가는 문하생들이 미리 그려둔 248개의 배경 그림을 잘라 이용했다. 남은 칸에 태블릿펜으로 슥슥 선을 그었다. 드로잉 도구를 낀 손의 움직임이 작고 빠르고 섬세했다. 대여섯번의 획만으로 하얀 평면에 철구 아빠 김상근의 표정이 살아나고 1950년대 건물이 세워지고 이야기가 흘렀다. 10여분 만에 머릿속에 있던 모습을 그대로 구현해냈다. “1, 2 끝냈다.”(윤태호) “넵!”(문하생 일동) “1페이지 제가 하겠습니다.”(박종혁) “2페이지 제가 하겠습니다.”(정지현) 작가의 말이 떨어지자 건반이 연주되듯 문하생들이 도맡아 할 면을 외쳤다. 데생을 따라 문하생의 터치가 더해질 차례였다. 작가의 그림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할 수 있는 인물 터치(데생 위로 덧그림)는 가장 선배인 서씨 몫이다. 태블릿펜으로 긋는 간단한 선에서 힘의 강약이 느껴졌다. 초야의 고수가 난을 치는 듯했다. 콘티 복사본을 보며 그림의 느낌을 확인중인 서씨가 말했다. “작가님 데생에 맞게 따라 그려요. 표정을 섬세하게 나타내는 데 가장 신경 쓰는 건 눈이에요. 당황할 때는 눈동자를 크게, 화가 났을 때는 눈초리를 조금 더 올리죠.” 박씨와 정씨는 배경을 그리고 채색을 했다. 홍일점 홍민지씨는 콘티를 보고 대사와 효과음을 치고 그림의 밑색을 넣었다. 문하생들이 바삐 손을 움직이는 사이 콘티 작업을 끝낸 윤 작가는 담배를 태우거나 페이스북을 하며 잠시 머리를 식혔다. 밤 10시30분, 절반의 데생이 끝나자 여유를 찾은 느낌이다.
“오늘 완전 빠르죠. 기자님이 오셔서 그런가? 하하하.”
작가와 함께 웃는 순간 등 뒤가 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이후 윤 작가는 지인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응대를 1시간 동안 하느라 앞서 벌어둔 시간을 소진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콘티 작업도 10페이지에서 막혔다. 작가는 적산불하(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 불하)에 대한 갈등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옛날 신문 자료를 검색했다. 콘티를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다. 진행 속도가 느린 것은 작가뿐이 아니었다. 데생이 끝난 10페이지를 받아본 박씨가 펜을 놓고 생각에 잠겼다. 총 5컷 중 4컷이 한자가 빼곡한 옛날 신문과 책, 지도였다.
“아니 하기 싫다기보다 단순작업이라 그대로 그리긴 하는데…. 음…. 하아….”
박씨가 주저하며 말했다. 마주 앉은 정씨도 피곤해 보였다.
“옛날 신문은 거진 한자라 최악인데….”
선배인 서씨가 후배들을 위로하는 듯했다. 마지막 문장 빼고.
“대충 하지 말고 꼼꼼히 해라.”
씨스타 보라의 유혹은 마감의 걸림돌
왜 이렇게 힘든 작업을 하는 걸까. 윤 작가는 지금 20대에게 애정이 있다고 했다.
“시대극에 대한 향수가 있어요. 허영만 작가 문하생 시절 <오! 한강> 그릴 때 느낌이 좋았거든요. 한국전쟁을 다루는 주기가 있는데 이제 나올 때가 됐다고, 당시를 살지 않았던 세대가 읽어주리라 생각하면서 그리게 됐죠.”
마감으로 가는 길, 장애물은 곳곳에 있었다. 정적을 깨려고 틀어 둔 티브이 예능프로그램에서는 라면 ‘먹방’이, 걸그룹 씨스타 보라의 아찔한 유혹이 쉴 새 없이 몰아쳤다. 가끔은 의지와 상관없이 입이 벌어지고 눈은 풀렸으나, 여기서 멈출 수 없는 듯 다시 집중하기로 했다. 한 문하생이 걸그룹 노래에 맞춰 흔드는 몸놀림은 퇴근하지 못한 자의 억압된 자유의지였을까. 새벽 3시 끓여 먹는 라면은 긴 마감이라는 터널에 비치는 한줄기 자연광이었나.
정신이 뻐근한 목과 허리에 가 있는 새벽 4시50분, 이미 2시40분쯤 데생을 다 마치고 다른 작품(만화잡지로부터 청탁받은 만화 <아키라>에 대한 짧은 만화)을 마감중이던 윤 작가가 최종 점검에 나섰다. 평소 부드럽던 윤 작가의 말투가 <미생> 오 과장의 빨간 눈처럼 선명해지는 순간이었다.
“11페이지 첫 번째 컷이랑 12페이지 마지막 컷, 위에서 아래로 그러데이션(농담 조절) 넣자. (중략) 16페이지 *의 위치를 조정하고 18페이지 신문 출처 넣어라.”
해는 아직 뜨지 않았다. 새벽 5시5분 윤 작가의 목소리에 힘이 더 들어갔다. 최종본을 신문사에 보내기 위해 그림파일로 변환해 웹하드에 올리라는 지시였다. 아, 이제 퇴근인가. 누군가 소리쳤다.
“지금 (파일) 올라갔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양호한 마감이었다며 화실 사람들이 밝게 웃었다. 만화는 해방 후 1947년 초까지 그려졌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까지 3년여의 이야기가 계속될 예정이다. 다음은 독자들에게 남기는 윤 작가의 전언이다. “해방부터 인천상륙작전까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보여주는 게 하나의 드라마라고 생각하거든요. 인천상륙작전 그 자체를 빛으로 그릴지 또는 재해석이 되는지, 독자들도 지치지 마시고 잘 따라와주시길 바라요. 하하하.”
글·사진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248개의 배경 그림을 이용했다
태블릿펜으로 슥슥 선을 그었다
드로잉 도구를 낀 손의
움직임이 작고 빠르고 섬세했다 작가가 데생을 다 마치고 나면
문하생 6명이 배경 그리고 채색
“18페이지 신문 출처 넣어라”
최종점검 나선 윤 작가의 말투는
<미생>오 과장을 보는 듯했다 문하생들 “옛날 신문자료 그리기는 최악” 오후 6시39분, 화실 문이 다시 닫혔다. 윤 작가의 컴퓨터에는 인천 풍경, 전쟁 장면, 구한말 자료가 폴더별로 촘촘히 정리돼 있었다. 한국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모던보이>와 <장군의 아들> 파일이 알차다. 연재 시작 반년 전부터 자료 수집을 시작했다. <인천상륙작전>은 <미생>보다 컷 분량이 3페이지가 더 길기도 하지만 역사물을 그린다는 부담도 상당한 작품이다. 책꽂이에 꽂힌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편년 대한민국사 1>, <대한민국사 연표 1>과 현대사 연구논문 등은 취재자문을 하는 역사 전공자 구완회(42)씨가 전해준 것들이었다. 구씨가 참고할 만한 자료를 건네면 윤 작가가 이를 토대로 이야기를 쓴다. 감시자의 등장은 달리는 말을 때리는 채찍과도 같다. 마감 현장을 가득 채우는 것은 스포츠 채널의 야구 중계뿐이었다. 연필이 종이에 스치는 소리 대신 달각달각, 태블릿피시에 태블릿펜 부딪히는 소리가 더해졌다.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김태균 선수 유니폼을 입고 그림을 그린다는 문하생 정씨가 배경으로 쓸 장승을 그리다 살짝 말을 꺼냈다. “오늘은 선생님이 평소보다 빨리 시작하시네요. 보통 ‘필’이 꽂히셔야 (데생) 작업을 시작하시는 편이거든요. 전에 한번 금요일 오후 3시40분에 마감하셨나? 그때 신문사 난리나지 않았어요?” 난리가 났고 그 이유로 지금 여기에 왔노라 말하지는 않았다. 이미 윤 작가는 A4 크기 스프링 연습장에 코를 박고 콘티(대본)를 그리고 있었다. 자를 대고 샤프로 대사와 설명을 넣었다. 작가는 문하생들이 미리 그려둔 248개의 배경 그림을 잘라 이용했다. 남은 칸에 태블릿펜으로 슥슥 선을 그었다. 드로잉 도구를 낀 손의 움직임이 작고 빠르고 섬세했다. 대여섯번의 획만으로 하얀 평면에 철구 아빠 김상근의 표정이 살아나고 1950년대 건물이 세워지고 이야기가 흘렀다. 10여분 만에 머릿속에 있던 모습을 그대로 구현해냈다. “1, 2 끝냈다.”(윤태호) “넵!”(문하생 일동) “1페이지 제가 하겠습니다.”(박종혁) “2페이지 제가 하겠습니다.”(정지현) 작가의 말이 떨어지자 건반이 연주되듯 문하생들이 도맡아 할 면을 외쳤다. 데생을 따라 문하생의 터치가 더해질 차례였다. 작가의 그림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할 수 있는 인물 터치(데생 위로 덧그림)는 가장 선배인 서씨 몫이다. 태블릿펜으로 긋는 간단한 선에서 힘의 강약이 느껴졌다. 초야의 고수가 난을 치는 듯했다. 콘티 복사본을 보며 그림의 느낌을 확인중인 서씨가 말했다. “작가님 데생에 맞게 따라 그려요. 표정을 섬세하게 나타내는 데 가장 신경 쓰는 건 눈이에요. 당황할 때는 눈동자를 크게, 화가 났을 때는 눈초리를 조금 더 올리죠.” 박씨와 정씨는 배경을 그리고 채색을 했다. 홍일점 홍민지씨는 콘티를 보고 대사와 효과음을 치고 그림의 밑색을 넣었다. 문하생들이 바삐 손을 움직이는 사이 콘티 작업을 끝낸 윤 작가는 담배를 태우거나 페이스북을 하며 잠시 머리를 식혔다. 밤 10시30분, 절반의 데생이 끝나자 여유를 찾은 느낌이다.
태블릿펜으로 24화 3페이지 데생 작업 중인 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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