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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방을 운영 중인 에블린(양자경)에게 오늘은 특히 버거운 날이다. 아버지를 위한 파티를 준비하면서 세무당국에 빨래방 운영 비용을 소명해야 하는 와중에 남편 웨이몬드(키 호이 콴)는 이혼 서류를 내민다. 게다가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딸 조이는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여자친구를 할아버지에게 소개하겠다고 나선다.
현생만으로도 아득한데 갑자기 남편과 똑같이 생겼지만 능력치가 완전히 다른 ‘알파 웨이몬드’가 눈앞에 나타난다. ‘알파버스’에서 온 또 다른 웨이몬드다. 그는 말한다. “순수한 악인 조부 투파키가 우주를 멸망시키려고 하는데, 그걸 막을 수 있는 건 오직 당신뿐이다.” 에블린은 당황한다. 아무것도 제대로 해낸 것이 없는 인생,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구나)이라는 체념 속에서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내가 세상을 구한다고? 그 비밀은 ‘버스 점프’에 있다.
버스 점프란 다른 멀티버스의 에블린의 삶에 접속해서 그 능력을 나의 몸에 다운받아 사용할 수 있는 놀라운 테크놀로지다. 에블린은 살아오면서 수많은 나쁜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의 갈래마다 멀티버스가 하나씩 등장했다. 에블린이 경험해온 좌절과 실패가 이생망 에블린을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다른 멀티버스의 에블린은 무언가를 성취한 것이다. 그가 태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들었던 말이 “죄송하지만 딸입니다”라는 사실은 그의 선택에 무엇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쳐왔는지 서글프게 암시한다. 알파 웨이몬드는 덧붙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당신에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버스 점프로 만난 에블린들은 다양한 삶을 살고 있다. 무림 고수인 에블린, 피자 광고판을 잘 휘두르는 에블린, 뛰어난 가수가 된 에블린, 철판 요리의 달인 에블린. 심지어 손가락이 소시지인 레즈비언 에블린도 있다. 에블린은 조부 투파키에게 맞서는 과정에서 여기저기의 에블린들과 시시때때로 연결된다.
한편 조부 투파키는 알파 에블린의 딸 알파 조이(스테퍼니 수)다. 버스 점프를 발명한 장본인인 알파 에블린은 딸의 정신 훈련을 극한까지 밀어붙였고, 알파 조이는 정신이 완전히 조각난 상태로 온 우주를 한꺼번에 경험하는 차원으로 진화해버린다. 너무 많은 걸 동시에 알아버린 그는 윤리감각을 잃고 거대한 공허에 빠지고 말았다. 그 공허함을 어찌할 줄 모르는 채로, 알파 조이는 베이글(그렇다. 그 ‘빵’ 말이다) 위에 전 우주의 모든 걸 올려놓는다. 그리하여 마주하게 된 세계의 진리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는 것.
이제 이생망 에블린의 우주에 모두가 모여든다. 에블린과 함께 베이글로 들어가 공멸하려는 조부 투파키, 멀티버스의 조이들을 제거함으로써 그를 절멸시키려는 알파버스인들. 난장판 속에서 에블린은 선택한다. 나의 조이마저 죽이려는 알파버스인들과 싸우면서, 동시에 조부 투파키를 거대한 공허로부터 꺼내는 일. 이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위해 멀티버스의 에블린들이 연결을 넘어 한자리로 통합된다.
우리가 다른 세계를 꿈꾸지 못하는 건 현대사회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국수를 삶고, 세탁을 하고, 가족을 돌보는 일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처리해야 할 공과금과 세금은 산처럼 쌓여 있고, 관련 서류 뭉치들은 외계어처럼 복잡하다. 빨래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드럼세탁기의 모습은 에블린이 소명해야 하는 영수증 위의 검은 동그라미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조부 투파키의 베이글이 된다. 공허감은 숨 쉴 틈 없이 반복되는 생활의 쳇바퀴로부터 새어 나와 우리를 잡아먹는다.
그러나 조이들을 진정으로 고통스럽게 만드는 건 그 일상이 갇혀 있는 “편협하고 작은 상자”다. 멀티버스라는 화려한 설정을 걷어내면 우리는 아주 평범한 소외와 마주하게 된다. 살을 빼라, 스펙을 쌓아라, 성공해라, 레즈비언임을 숨겨라. 그리고 그 모든 명령의 시작에는 “죄송하지만 딸입니다”가 놓여 있다. 이성애 중심의 정상성에 기대고 있는 우리 우주의 가부장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한 문장.
감독들은 이 황당한 영화에서 “세대 차이와 인터넷, 그리고 현대인들의 공포”에 대해 다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조이의 베이글은 작은 상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들어간 또 하나의 일상, 인터넷인 건 아닐까. 우리 역시 그랬다. 온라인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했던 우리는 ‘재스민 혁명’과 ‘월가를 점령하라’가 뜨겁게 요동치던 2010년대 초반에 <분노하라>는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와 만났다. 분노는 시대적 요청이었고, 정당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지난 10년간 그 메시지는 왜곡되어왔다. 분노의 핵심은 나의 고통을 타인의 고통에 접속시키고, 우리의 고통을 정치화해서 끝내 공존 가능한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2022년에 이르러 우리에게 남은 건 나만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강자에게 동일시하며 사회의 더 약한 고리를 공격하는, 기득권에게는 안전하고 서로에게는 위험한 분노다. 그럴수록 더 크게 자라는 건 조부 투파키의 말처럼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괴로움”일 뿐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분노로 폭주하는 에블린의 앞을 가로막는 건 이생망 웨이몬드다. 까다로운 상대를 위해 쿠키를 준비하는 마음을 가진 웨이몬드는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말한다. “우리 그만 싸우면 안 될까요? 나도 혼란스러워요.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를 때일수록, 서로에게 다정해야 해요.” 에블린이 이마에 박힌 총알을 장난감 눈알로 바꿔내면서 제3의 눈을 뜨게 되는 건 바로 이 순간이다. 베이글로 빨려 들어가기보다는 친절하기를 선택하는 순간. 타인을 외면하기보다는 관심을 기울이기로 마음먹는 순간. 그리하여 다정하게 싸우는 법을 배우는 순간.
영화를 보면서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만큼이나 레즈비언 코미디언 엘런 디제너러스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생각났다. “서로에게 친절합시다.” 퀴어를 차별하는 세상에 치열하게 맞서온 엘런의 ‘친절’은 분노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친절한 마음을 품을 때 제대로 분노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 퀴어한 친절함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더 이상 잃을 게 뭐가 있나? 서로에게, 마음껏, 친절해보고 싶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