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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교사인 연수(하윤경)는 얼마 전 자취를 시작했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하나밖에 없는 딸을 금이야 옥이야 키워온 경아(김정영)는 그런 연수가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불안하다. 늦게 다니는 건 아닌지, 옷차림은 방정한지, 집에 남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아닌지…. 입만 열면 “몸조심”을 강조하는 엄마 때문에 연수는 숨이 막힐 것 같다. 연수에게 독립은,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때로는 벗어나고 싶은 엄마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하다.
“네 부모에게 알리겠다”는 협박
그런데 연수를 자기 손 위에 올려놓고 뜻대로 길들이려고 하는 건 경아만은 아니다. 전 남자친구 상현(김우겸)도 연수에게 집착하면서 이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연수가 근무하는 학교 앞까지 찾아가 매달리는데도 끝까지 거절당하자, 상현은 말한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며칠 뒤, 연수는 친구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연수야, 내가 이상한 메시지를 하나 받았는데, 네가 봐야 할 것 같아.” 메시지를 전달받은 연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상현이 함께 촬영한 ‘지극히 사적인 동영상’을 연수의 지인들에게 보내고 온라인에 업로드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지인 리스트에는 경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동영상을 본 경아는 걱정과 실망이 얽힌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혀 연수에게 외친다. “걸레가 따로 없더라.” 심지어 동영상을 찍는 걸 알고 있었다는 연수의 말에 경아는 경악한다. 그러나 괴로움은 당연히 경아만의 것이 아니다. 기댈 곳 없이 막막한 상황에서 엄마에게조차 손가락질당하자 연수는 깊이 상처 입는다. 결국 연수는 직장을 그만두고 경아와도 연락을 두절한 채 홀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분투한다.
영화는 한국 사회의 강간문화를 꼼꼼하게 성찰한다. ‘강간문화’란 성폭력을 통해 여성의 자율성과 활기를 제압하는 사회 전반적인 환경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강간문화는 성폭력의 원인을 여성에게 돌림으로써 여성의 행동을 단속하고 운신의 폭을 제한한다. 리베카 솔닛에 따르면 강간문화는 무엇보다 “여성의 권리와 안전을 경시하는 사회”를 낳는다. 그리하여 (당연하게도!) 모든 남자가 강간범이 아니고 모든 여자가 피해자가 아닐 때에도, 강간은 “여성 인구 전체가 남성 인구 전체에 종속된 위치에 머물도록 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우리 시대의 강간문화는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실천된다. 디지털 성범죄는 실제로 강간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어느 단계에선가는 반드시 피해자의 의지에 반하여 사건이 벌어진다는 점에서 강간이나 마찬가지다. 연수는 상현을 아끼고 사랑하던 시기에 그와 섹스를 하고 동영상을 찍었다. 그러나 그것이 연수의 의지와 무관하게 동영상을 유포해도 괜찮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성을 모욕하고 굴복시켜서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목적으로 보복성 성범죄물을 유포하는 행위는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다”는 뒤틀린 소유욕의 극단적인 표현이다.
한편으로 이런 강간문화의 바탕에 놓여 있는 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고 여성의 몸은 그것을 담고 있는 ‘연약한 그릇’이라는 인식이다. 그래서 여성의 몸은 언제나 잘 간수해야 하는 것이 된다. 이때 “조심하라”는 명령은 그 누구보다도 어머니의 입을 통해 딸의 몸으로 전수된다. 영화 속 경아가 연수의 초자아가 되어 신데렐라의 신체에 걸려 있는 마법처럼 딸의 시간으로 침해해 들어오듯이 말이다. 그리고 “나의 헌신과 믿음을 배신하지 말라”는 일종의 애원은 이 마법의 핵심 주술이다. 하지만 어머니 본인 역시 그 명령을 통해 통제당하고 괴롭힘 당해왔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한 역사의 반복을 보여준다.
연수는 다른 누구보다 경아가 그 동영상을 볼까봐 두려웠을 것이다. 엔(n)번방 사건에서도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을 옭아매고 가해자들의 ‘명령’에 따르도록 만들었던 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네 사진, 네 동영상을 부모에게 보내겠다”는 협박이었다. 엔번방을 취재 보도했던 <한겨레> 김완 기자의 말처럼 “네 부모에게 알리겠다”는 말이 구조의 신호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지옥문의 열쇠가 된다는 현실을 우리는 더 이상 묵과해서는 안 된다. “하지 마라”, “조심해라”보다는 제대로 된 지식과 정보를 나누고 “내가 너의 편이 되어주겠다”고 말하는 것이 지금과는 다른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과거로부터 한걸음 나아간 경아
‘경아의 딸.’ 곱씹어볼수록 제목이 절묘하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끔찍한 사건의 피해자는 ‘경아의 딸’ 연수지만, 이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과거로부터 벗어나 한걸음 나아가는 것은 오히려 경아다. 그러므로 제목을 통해 그의 이름을 먼저 소개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경아는 가정폭력을 당하면서도 남편을 떠나지 못했고, 끊임없이 여성을 탓하고 의심하는 사회 속에서 시달리며 살았음에도 그 문화를 내면화하고 있었다. 그는 사라진 딸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비로소 딸이 어떤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 사회에서 여성이, 그리고 자신이 어떤 시간을 통과해왔는지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경아와 연수의 관계에만 갇혀 있지는 않다. 영화는 ‘경아와 딸’을 서사의 중심에 놓고 그로부터 뜨개질을 하듯이 관계의 망을 넓혀나간다. 그래서 ‘의’라는 소유격 조사는 경아와 연수, 두 사람의 배타적 관계를 지칭하는 것을 넘어 시간과 공간, 종횡으로 맞닿아 있는 ‘여성들 간의 관계’를 지시하는 수사로 해석될 수 있다. 특히 연수가 생계를 위해 시작한 과외에서 만난 하나(박혜진)와 맺는 관계는 특별하다. 때로는 그토록 미워했던 엄마의 모습을 닮기도 하고 넘어서기도 하면서, 연수는 하나에게 좋은 선생이자 선배가 되어주고자 한다. 경아와 연수와 하나가 영위하는 시간은 어떤 면에서는 동질하지만, 우리가 변하고 있으므로 그 시간 역시 조금씩 달라질 터다. 그렇게 영화는 수많은 경아들과 딸들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손희정 |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