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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낙태, 모든 걸 감내하겠나” 천사 만드는 여자가 물었다

등록 2022-03-26 09:29수정 2022-06-21 16:54

[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레벤느망

임신중절 범죄로 취급받던 시절
예상못한 임신과 이로 인한 ‘사건’
주인공 ‘안’의 심리 철저한 묘사
압도적 영화 언어 경험, 극장서 보길
영화 <레벤느망>. 영화특별시SMC 제공
영화 <레벤느망>. 영화특별시SM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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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안(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은 교수의 기대와 동급생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장학생이다. 가족의 전폭적인 지지로 계급적 한계를 넘어서 대학까지 올 수 있었던 안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문학 교수의 꿈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안은 예상치 못했던 임신을 하게 된다. 서늘한 불안이 그를 휩싸고 우수졸업을 향했던 모든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때는 1963년, 프랑스 여성들에겐  혼전순결이 강요되었고 낙태는 범죄였다. 이 영화의 원작자인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에 따르면 임신중절이라는 말 자체가 “언어 속에 자리잡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삶을 걸어야 했던 임신중절

당장에 엄마가 될 생각이 없는 안.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이를 낳으면 공부를 포기하고 ‘미혼모 낙인’을 떠안은 채 살아가야 하고, 낳지 않으면 감옥에 가야 하는 상황. 안은 이 강요된 선택 안에서 고통스러워하면서 제3의 길을 만들어줄 사람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다. 아무도 처벌받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안을 도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함께’ 책임져야 할 남자는 알아서 처리하라며 나 몰라라 한다.

대바늘로 자궁경부를 쑤시기까지 하면서 혼자 해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보지만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고 부질없이 시간만 흘러간다. 그리고 안은 천신만고 끝에 비밀리에 낙태를 도와주는 임신중절 시술사를 소개받는다. ‘천사를 만드는 여자’는 묻는다. “모든 걸 감수하겠느냐”고. 안은 고개를 끄덕인다. (당시 프랑스에서 임신중절 시술사는 천사를 만드는 여자(faiseuse d’anges)로 불렸다고 한다.)

지난해 9월 열린 제78회 베네치아(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오드리 디완의 <레벤느망>은 프랑스 소설가 아니 에르노의 동명의 에세이를 원작으로 한다. 에르노는 1963년 낙태를 했고, 1999년에 그 경험을 글로 옮겼다. 제목인 ‘레벤느망’(L’Événement)은 ‘사건’이라는 의미다. 작품 속 사건은 대체로 임신중절로 해석된다. 갑자기 닥쳐와 삶을 온통 뒤흔들어놓은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일. 하지만 에르노의 사건은 그런 단절적인 ‘해프닝’에 그치지 않는다.

에르노는 글을 시작하면서 미셸 레리스의 말을 제사(題詞)로 인용했다. “이중적인 소원, 사건이 글쓰기가 되고 글쓰기가 사건이 되는 것.” 결국 한 여성이 자신이 맞닥뜨린 세상의 부조리와 임신중절을 망각의 상자 속에 묻어두지 않고 되살려내서 기어코 이야기로 만들어낸 것, 그렇게 살아난 이야기 속에서 한 여성의 사적인 기록이 여성의 역사라는 도저한 흐름과 만나 그 야만의 시간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 그리하여 그 글쓰기가 견고한 사회에 균열을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일어나기까지는 36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동안 프랑스 여성들은 페미니즘 제 2물결을 만들어냈으며, 낙태죄를 폐지시켰다. 343명의 여성이 “나는 낙태했다”고 선언했고, 973명의 남성이 “나도 공범이다”라며 목소리를 보탰다. ‘임신중절과 피임자유를 위한 운동’은 여성은 곧 어머니라는 오래된 편견을 깨고 여성의 의미를 다시 썼다. 이에 힘입어 1975년 당시 보건부 장관이었던 시몬 베유는 임신 12주 이내 임신중지를 합법화하는 ‘베유법’을 발의했다. 그러고 나서도 <레벤느망>의 출간까지 25년의 시간이 더 걸렸던 건, 개인이 그 상처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되기까지, 그리고 제도가 문화로 자리잡기까지, 또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레벤느망>은 처음부터 끝까지 안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영화는 고집스럽게 안이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만을 스크린 위로 가져온다. 그렇게 관객들은 전적으로 안이 바라보고 이해하는 세계 안에서 안과 함께 흔들린다. 논디제틱 사운드(배경음악처럼 영화 안에서 등장인물에게는 들리지 않고 관객에게만 들리는 소리들)는 한정된 순간에만 안의 혼란을 묘사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사용된다. 러닝타임 100분 동안 안의 의식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장면은 단 한 프레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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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벤느망>. 영화특별시SMC 제공

1.37:1 화면비의 의미

특히 1.37:1의 화면비는 특별하다. 이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1.85:1이나 2.35:1에 비해 현격하게 가로의 길이가 좁아 다소 답답해 보일 수도 있는 선택이지만, 덕분에 관객은 안의 시야각 안에 갇히게 된다. 안이 볼 수 있는 만큼만 볼 수 있기 때문에 관객의 감각적 경험은 안에게 더욱 강하게 동기화된다. 그렇게 관객은 낙태가 불법인 시절에 임신중절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을 덮쳐오는 심리적인 압박감을 함께하게 된다.

어떤 영화든 손바닥 위의 작은 화면으로 보는 것과 극장에서 만나는 것은 확연하게 다른 영화적 경험을 만든다. 올해 상반기 극장에서 꼭 보아야 하는 단 한편의 영화를 꼽아야만 한다면 그건 용산 씨지브이 아이맥스관에서만 감독의 의도대로 구현될 수 있었던 <듄>도 아니고 화려한 스펙터클의 향연을 선보였던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도 아니다. 그건 <레벤느망>이다.

영화 언어가 하는 일을 극적으로 경험해볼 수 있을 테고, 그 경험은 당신의 의식을 바꿀 수도 있다. 자신이 임신중절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레벤느망>을 보시기를 권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공간만이 의식을 지배하는 건 아니다. 기꺼이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려는 그 마음이 의식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한국 사회가 아직도 2019년 낙태죄 폐지 이후 성적 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비로소 절박하게 다가올 것이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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