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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알파메일’의 이야기 아닌, 더 나은 남성서사가 필요해

등록 2021-11-05 19:29수정 2021-11-05 19:45

[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라스트 듀얼, 아네트

가부장 중심의 서사 던져버리고
뭉개졌던 여성의 이야기에 주목
피해자의 목소리에 조명 비추니
관객에 놀라운 각성의 순간 열려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페미니즘은 스크린 위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최근 몇년간 여성서사의 스펙트럼은 놀라울 정도로 확장되었고, 이제 그에 발맞추는 새로운 남성서사가 등장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주목을 끌었던 첫 영화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이다. 샹치(시무 리우)의 아버지 쑤 웬우(양조위)는 놀랍도록 멋지지만 여전히 분노와 억울함에 사로잡혀 있다. 샹치는 그런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맨 박스’(남자다움에 대한 강박)를 거부하고 “남자라면 응당 강력한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강요된 경로에서 벗어난다.

자신의 몸을 충분히 단련하여 스스로와 주변을 지킬 수 있으면서도 과시하지 않는 이 새로운 남자 옆에는 새로운 여자 케이티(아쿼피나)가 있다. 두 사람은 할리우드식으로 변용된 홍콩 무협영화의 전통 안에서 아시안 스테레오 타입을 가지고 노는 동시에 남성성과 여성성의 스테레오 타입 역시 사뿐히 즈려밟는다. (한 예로 ‘베스트 드라이버’이자 자동차광인 케이티는 아시아인과 여자는 운전을 못한다는 편견을 조롱한다.)

가해자의 쾌락을 그린 영화와 달라

그 뒤를 이어 11월 극장가에는 기존의 남성서사를 비판적으로 비평하는 또 다른 남성서사 두편이 관객을 사로잡고 있다. 리들리 스콧의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와 레오스 카락스의 <아네트>다.

<라스트 듀얼>은 14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장 드 카루주(맷 데이먼)와 자크 르그리(애덤 드라이버) 간의 결투 재판을 다룬다. 두 사람이 목숨을 걸고 신의 뜻을 묻고자 했던 건 “자크가 장의 아내 마르그리트(조디 코머)를 강간했는가”이다. 영화는 하나의 사건을 서로 다른 시점에서 보여주는 ‘라쇼몽’ 식 전개를 취하며 관객을 판관으로 초대한다.

영화의 첫 파트는 ‘장이 말하는 진실’이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된다. 충신이자 용맹한 전사인 장은 친구 자크를 용서할 수 없다. 젊었을 때부터 함께 전장을 누볐지만 아첨꾼이자 한량이라 신뢰할 수 없었던 자크는 부당하게 자신의 땅을 뺏고, 성주 자리도 뺏더니, 아내까지 겁탈했다. 그는 다짐한다. “신의 이름으로 그를 응징하고 명예를 회복하리라.”

두번째 파트는 ‘자크가 말하는 진실’이다. 아둔한 장과 달리 영민한 지략가인 자크. 운명에 이끌려 마르그리트와 사랑에 빠진다. 어렵게 밀회의 기회를 얻어 서로 사랑을 나누었는데, 황당하게도 마르그리트가 자신을 강간죄로 고발했다. 자크는 혼란에 빠져 생각한다. 당시 마르그리트가 “노”라고 말하긴 했다. 하지만 ‘여자의 노는 예스 아니냐’며 억울해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목숨을 걸고 끝까지 가는 수밖에.

영화 &lt;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gt;.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마지막은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이다. 그는 위태로운 가문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엄청난 지참금을 들고 파산한 성주의 아들 장과 결혼했다. 글을 읽고 쓸 줄 알지만 정숙한 여자로 살기 위해 앞에 나서지 않았고, 남편이 성을 비울 때면 착실하게 성내 살림을 관리했다. 그러나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결혼생활은 늘 가시방석이다. 그런 와중에 남편의 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진실을 밝힐 수밖에 없다.

영화는 세 사람이 하나의 사건을 어떻게 다르게 서사하는지에 집중한다. 각각의 판본을 구성하는 카메라, 사운드, 연기 등 영화 언어의 미세한 차이가 완전히 다른 감정의 파고를 만들어낸다. 특히 자크의 관점에서 그려지는 “노 민스 예스”의 섹스 신과 마르그리트 관점에서 그려지는 “노 민스 노”의 강간 신 사이의 차이는 관객에게 놀라운 각성의 순간을 제공한다. 지금까지 폭력을 그린다는 핑계로 가해자의 쾌락을 그려왔던 영화들과 <라스트 듀얼>은 다르다.

리들리 스콧은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이라는 자막에서 ‘마르그리트가 말하는’이라고 쓰인 부분을 페이드아웃으로 지우고 ‘진실’(the truth)만을 남긴다. 그는 ‘각자의 진실이 있다’는 안전한 선택에서 벗어나 가부장의 서사와 강간범의 서사가 지배했던 세계를 비판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거짓말’로 취급되어왔던 여성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30년 전 <델마와 루이스>라는 위대한 영화를 만들었던 그는 ‘#미투’ 이후의 시간 속에서 남성서사의 본질 자체에 질문을 던진다.

단죄하는 신 대신 피해자의 목소리

레오스 카락스 감독은 지난달 부산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아네트>가 “나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 영화는 “나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다. 화면이 열리면 영화는 뮤지컬의 액자식 구성을 취하면서 관객들에게 묻는다. “우리가 이제 (노래/이야기를) 시작해도 될까요?” 그리고 질문을 던졌던 배우들이 영화 속 영화로 들어간다.

자신의 이야기를 팔면서 관객을 웃음으로 “죽여주는” 스탠드업 코미디언 헨리(애덤 드라이버)는 매일의 공연 속에서 매번 새롭게 죽음을 맞이하면서 관객을 “구원하는” 오페라 가수 안(마리옹 코티야르)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딸 아네트를 얻는다. 그러나 행복했던 순간도 잠시, 타인의 말을 듣기보다는 온통 자신에 대해 떠드는 것에만 몰두하는 ‘나쁜 아버지’ 헨리는 자신의 폭력성을 이기지 못하고 안을 살해한다. 유령이 된 안은 딸 아네트에게 깃들어 복수를 다짐한다. 그 후, 어두운 밤 불빛이 비치면 아기 아네트는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이 노래는 결국 헨리의 범죄를 세상에 폭로하게 된다.

영화 &lt;아네트&gt;.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 <아네트>.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는 ‘알파메일’이 여성과 남성을 (때로는 은유적으로, 때로는 실제로) 죽여온 역사를 반향한다. 흥미로운 건 영화가 그동안 ‘군림해온 자’를 그리는 방식이다. 지금까지 남성서사는 그를 영웅으로 만들거나, 그가 폭력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해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네트>는 완전히 다른 길로 접어든다. 그를 연민하기보다는 그에게 폭력의 역사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그리고 고전적인 비극에서는 신의 목소리가 반영웅을 단죄한다면, 레오스 카락스는 헨리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피해자들, 그리고 다음 세대를 이어갈 아네트의 목소리에 진실의 권위를 부여한다.

우리에게는 더 다양한 여성서사가 필요한 만큼이나 더 나은 남성서사가 필요하다. <샹치>, <라스트 듀얼>, <아네트>가 그런 서사일까? 감독의 의도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영화들이 작품의 ‘결을 거슬러’ 적극적으로 읽는 비평적 실천을 자극하는 영화들임엔 틀림없다.

손희정 _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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