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삽서! 자리 사~ 싱싱한 자리 와수다.”
(자리 사세요! 자리 사~ 싱싱한 자리가 왔어요.)
어린 시절, 청보리가 익어가는 봄이 되면 동네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소리였다. 생선장수는 자리돔을 트럭에 한가득 싣고 골목마다 돌아다니며 확성기로 그렇게 손님을 불렀다. 생선장수 목소리는 봄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전령이었다. 아련한 제주의 소리. ‘자리’는 자리돔의 줄임말로, 한자리에 머문다 하여 ‘자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제주, 일본 남부 일대에 사는 물고기로, 길이가 15㎝ 안팎으로 작지만 맛은 뛰어나다. 그래서 ‘참돔’이나 ‘옥돔’처럼 ‘돔’자를 붙여 ‘자리돔’이라 하며 사랑했다. 제주에서는 오래전부터 자리로 회나 물회, 구이, 젓갈 등을 만들어 먹었다.
자리를 재료로 만든 요리 중 으뜸은 단연 ‘자리물회’다. 제주도 향토 음식 323종 중 당당히 첫손에 꼽힐 정도로 유명한 요리다. 늦봄부터 냉국 대용으로 꼭 먹는 것이 물회인데, 가늘게 썬 자리와 제주식 된장 양념, 부추와 미나리, 풋고추, 양파 등을 물에 말아 먹는 제주의 별미 중 별미다.
제주의 물회는 육지 것과 다른 점이 많은데, 양념장과 식초 그리고 ‘줴피’(‘제피’의 제주도 사투리로 제주식 제피를 일컬음)가 가장 큰 차이점이다. 제주 물회의 양념장은 날된장만 쓴다. 옛 제주에서는 고추가 아주 귀해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만들지 못한 탓이다. 요즘 제주에서도 고추장 양념으로 만든 물회가 많지만, 이는 동해안 식으로 제주 전통식은 아니다.
물회를 먹을 때 반드시 첨가하는 것이 식초인데, 이 또한 제주식은 아니다. 막걸리를 만들 때 나오는 ‘막걸리 식초’처럼 제주에서는 보리밥을 삭히고 발효시켜 만드는 ‘쉰다리 식초’가 있다. 쉰다리 식초를 넣어야만 진짜 제주식 자리물회를 먹을 수 있지만, 지금은 구하기가 어려워 식당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대용으로 양조식초를 쓰지만, 제주도민들은 쉰다리 식초만큼 강한 맛을 내는 빙초산을 애용한다.
자리 물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줴피다. 자리를 날것으로 먹기 때문에 줴피를 넣어 비린내를 없앤다. 줴피는 제주에서는 육지처럼 가루를 내지 않고 어린 생잎을 직접 다져서 양념으로 쓴다. 씁쓸하면서도 특유의 신선한 향이 자리의 쫄깃하고 고소한 맛과 어울려 독특한 맛을 낸다. 양념 맛이 아닌 자리의 고유 맛을 원한다면 강회와 소금구이가 좋다.
몸집이 작아 뼈를 발라낼 수 없어 몸통을 조각내 통째로 먹는 것이 특징인 강회는 가시가 많아서 먹기 쉽지 않지만 씹을수록 고소함이 느껴져 마니아들에게 사랑받는 회다. 구이도 아주 맛이 좋다. 굵은 소금으로만 간을 해 구워 먹는 구이는 다른 생선에서 느낄 수 없는 고소함을 맛볼 수 있어 남녀노소에게 두루 환영받는다. 자리로 만든 음식 중에 가장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은 단연 ‘자리젓’이다. 자리를 숙성시킨 것으로, 6~7월에 담갔다 겨울에 먹는 젓갈이다. 제주에서는 밥도둑이란 말을 들을 만큼 인기가 좋지만, 특유의 냄새와 식감 때문에 처음 먹는 사람들에게는 힘든 음식이다.
자리로 유명한 곳으로는 서귀포시 대정읍과 보목동 그리고 제주시 한림읍이 있다. 이 세 곳의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 앞바다에 섬이 있다는 것이다. 보목동의 섶섬, 대정읍의 마라도, 한림읍의 비양도가 있다. 자리는 수심 2~15m의 암초와 산호초가 있는 얕은 바다에서 살기 때문에 주로 섬 주변에 많다. 그런데 같은 자리라도 환경에 따라 특징과 쓰임새가 다르다. 대정의 자리는 살이 탄력 있고 가시가 세다. 이는 바람이 모질고 물살이 빠른 대정 앞바다를 헤엄치느라 더 많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정 앞바다에 있는 마라도 주변은 자리의 먹이인 동물성 플랑크톤이 많아 오동통 살찌우기 좋다. 그래서 대정에서 잡히는 자리는 구이용으로 인기가 좋다. 반면 보목동의 자리는 앞바다 물살이 잔잔해 살과 가시가 부드럽다. 그래서 횟감과 물회로 많이 애용된다. 비양도 자리는 젓갈로 쓰기 좋다.
자리가 알을 낳기 시작하는 5월이 되면 세 포구는 바빠진다. 자리를 실은 어선이 수시로 포구를 오가고, 자리를 찾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포구로 몰려든다. 자리물회와 구이 등을 파는 포구의 식당에는 자리를 즐기기 위한 도민과 여행객들로 가득하다. 제주 어디서나 자리 요리를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자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곳을 원한다면 이 세 포구 앞으로 가는 것이 좋다. 날마다 잡혀오는 싱싱한 자리만을 팔 뿐만 아니라 직접 어선을 운영하며 자리를 잡아오는 식당도 있다. 대정의 돈지식당, 항구식당 보목의 보목해녀의집, 어진이 횟집, 한림의 톤대섬은 도민들뿐만 아니라 여행객의 입맛까지 사로잡은 맛집들이다. 혹여나 식당에 자리가 없다면 주변 식당을 이용해도 좋다. 자리가 워낙 싱싱하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은 없다. 주의할 점은 제주식과 육지식의 양념장이 다르기 때문에 기호에 맞게 주문하는 것이 좋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도 있듯 자리로 입이 즐거웠다면, 눈과 마음이 호강할 차례다. 세 곳의 자리에도 차이가 있듯이, 이 세 지역의 매력도 저마다 다르다. 재밌는 점은 자리의 특징과 지역의 특색이 비슷하다는 것.
대정읍은 제주도에서도 바람과 땅이 거칠기로 유명한 곳이다. 돌이 많아 농사짓기 힘들어 제주 사람들조차 모슬포라고도 하는 대정을 ‘못살포’라 했다. 하지만 대정읍의 5월은 제주에서 가장 생명력이 넘치는 계절이다. 제주에서 청보리가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는 곳이 대정이다. 섬 3분의 2가량인 60만㎡(약 18만1800평)가 청보리로 덮여 있는 가파도도 대정읍에 있다. 생명의 기운이 넘실대는 대정의 5월을 한눈에 보려면 송악산을 오르는 것이 좋다.
모슬포항에서 남동쪽으로 5㎞ 떨어져 있는 송악산은 20분이면 오를 수 있는 오름이다. 정상에서는 마라도, 가파도, 산방산, 한라산, 형제섬 등 제주 남부의 고품격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청보리로 가득 찬 가파도가 눈길을 이끈다. 바람이 불어와 청보리가 흔들리면 마치 섬 자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거칠지만 아름다운 곳, 5월의 대정은 그렇다.
보목 마을은 ‘해양수산부가 선정한 100대 아름다운 어촌 마을’ 가운데 하나로, 제주에서도 포구와 섬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보목의 매력을 보려면 섶섬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구두미 포구가 좋다. 섶섬은 화가 이중섭의 작품 <섶섬이 보이는 풍경>의 그 섬이다. 난대식물의 집합지로서 천연기념물 파초일엽의 자생지로 유명하고 어종이 풍부해 낚시터와 스쿠버다이빙 포인트로도 인기가 좋다. 구두미 포구에 가면 섶섬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구두미 포구는 보목동에서 가장 섶섬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으로, 작은 어선 몇 척만이 몸을 맡기고 있는 아담한 포구다. 거대한 섶섬과 작은 구두미 포구가 서로 의지해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긴 모습처럼 따뜻하고 평화롭다. 섶섬을 배경으로 해 질 녘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잊지 말자. 붉은 석양과 잔잔한 바다를 배경으로 검은 실루엣으로 바뀌어가는 섶섬의 모습은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한림읍의 매력은 단연, 바다다.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라 알려진 협재 해수욕장과 금능 해수욕장이 한림에 있다. 이 두 해수욕장은 남태평양 부럽지 않은 쪽빛 바다를 품고 있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그리고 봉긋하게 솟아오른 비양도까지 눈에 넣으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파도도 잔잔해 넓은 호수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소녀 같은 바다다.
5월의 자리처럼 생명력 넘치는 제주 자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 대정읍, 보목동, 한림읍이다. 제주 5월의 맛, 자리도 먹고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도 마음속에 담아보자.
■송악산
제주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사계 해안도로의 시작과 끝에 송악산이 있다. 제주의 남서쪽 모든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바닷가 해안 절벽에는 일제강점기에 만든 해안동굴이 있다.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의 배경지로도 유명하다.
■섶섬
섶섬은 서귀포항에서 출발하는 유람선을 타면 섬 가까이 가서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구두미 포구는 주소가 없다. 보목동에 있는 제주대학교 연수원에서 남동쪽으로 500m 떨어진 곳에 있다.
서귀포유람선 주소: 서귀포시 서홍동 707-5 전화: 064-732-1717
■협재·금능 해수욕장
제주에서 투명한 에메랄드빛 해변으로 유명한 곳이다. 푸른 바다와 속살처럼 뽀얀 모래 그리고 현무암과 바다 생물이 제주의 푸른 이야기를 제각기 들려주는 곳이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비양도가 그 아름다움을 더한다.
글·사진 문신기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