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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전태일 50주기’ 만들고 내쳐지는 방송 노동자들

등록 2020-11-28 17:29수정 2020-11-28 17:52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저널리즘 토크쇼 J’ 종료 논란

한국방송, 프로그램 중단 방침 밝혀
“프리랜서 20명 계약 종료 통보”
“합류 1주일 된 비정규직도 포함”

한국방송은 부당해고 아니라지만
프리랜서 피디 “전태일 얘기 만들며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하는 건 모순”

언론은 혁신에 비정규직 쥐어짜기
궂은일 맡지만 박봉에 신분 불안
그래도 개혁 말할 자격 있는지 의문
한국방송 <저널리즘 토크쇼 J> 방송 화면. 유튜브 화면 갈무리
한국방송 <저널리즘 토크쇼 J> 방송 화면. 유튜브 화면 갈무리

몇년 전부터 방송에 출연하는 일이 조금씩 늘었다. 글 쓰는 사람이 글 말고 다른 곳에 한눈팔면 못쓴다고 생각하지만, 프리랜서가 일을 너무 가려 받으면 먹고사는 문제가 애매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방송이면 크게 마다 않고 출연하는 중이다. 여기서 라디오 몇개월, 저기서 다시 티브이 몇개월, 다른 곳에서 팟캐스트 몇개월. 열심히 떠들고 오면 집에 있는 고양이들 먹일 사료 값은 벌 수 있었다.

그러다 보면 간혹 이런 일이 생긴다. 티브이 칼럼니스트 자격으로 내 견해를 말해 달라고 초대됐는데, 정작 방송에 들어가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못하게 되는 일들 말이다. 물론 방송의 생리상 늘 심중의 말을 있는 그대로 다 하고 나올 수는 없다. 때로는 같은 말도 최대한 둥글게 깎고 다듬어 온화하게 해야 할 때가 있고, 제한된 시간 동안 원활한 흐름으로 방송을 하기 위해 하고 싶은 말을 줄여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날엔 전혀 의도한 적 없던 멘트가 내 몫으로 배정될 때도 있다. 분명 그날 방송에서 논의할 이슈에 관해 어떤 입장인지 사전에 이야기했는데, 최종 대본을 보면 내 의도와는 사뭇 결이 다른 멘트가 내 이름 옆에 적혀 있는 것이다. 대본대로만 방송을 한다면 나로서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야 하는 상황. 아무리 방송의 생리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해도, 마음에 없는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제작진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나 대신 다른 사람을 섭외할 수 있는 위치를 이용해 무슨 말을 할지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멘트가 내 몫으로 주어졌고, 그걸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수위로 정리하기 위해 작가와 한바탕 언쟁을 벌여야 했다. 해당 멘트는 강요가 아니라 제안이었고, 소통의 과정에서 사전 조율이 부족해서 생긴 오해였다는 해명을 들은 뒤에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방송을 마쳤다. 당장의 큰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그제서야 다른 문제가 눈에 들어왔다. 작가와 언쟁을 할 때 내가 불필요하게 화를 낸 건 아닐까? 나는 작가에게 ‘언제든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섭외할 수 있는 제작진이 거절할 수 없는 갑질을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방어적으로 굴었다’고 해명하며 사과했다. 그러자 작가는 화들짝 놀라며 슬픈 목소리로 답했다. “굳이 갑을 따지자면 작가님이 갑이시죠. 저희가 무슨 갑이에요.” 생각해보니 그랬다. 방송사에 소속된 게 아니라 프로젝트 단위로 계약을 맺고 일을 하고 있는 건 그나 나나 같은 처지였으니까. 그 또한 내 멘트를 윗선에서 보기 좋은 수위로 다듬는 동시에 출연자인 날 설득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을이었고, 나처럼 언제든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다른 이로 대체될 수 있는 처지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울적해졌다. 둘이서 신나게 언쟁을 했는데, 알고 보니 둘 다 을이었다니. 대체 우린 뭐 한 걸까?

변화 향한 도전·개혁…‘과연’?

이게 어디 방송사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인쇄 매체에 글을 쓸 때도 외부 필자가 겪는 제약이 존재한다. 프리랜서 칼럼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의 이야기다. 완성된 원고를 보냈는데, 담당 기자가 자신은 원고 방향에 동의할 수 없다며 몇번씩이나 원고를 퇴짜 놓았다. 만약 외부 필자의 원고에 사회적 편견을 조장하는 선동이나 혐오 표현, 사실과는 다른 거짓 주장을 펼치는 내용이 담겨 있다면 당연히 담당 기자가 개입해 내용을 조율하고 수정을 요청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 건은 그런 게 아니었다. 한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이 자신과는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나를 들들 볶아 내 글의 방향을 그의 견해대로 뒤집는 데 성공했다. 그 글은 내가 쓴 글이 아니라, 그가 쓰고 싶었던 글을 외주 받아서 쓴 글이 된 셈이다. 지금이었다면 “나는 그렇게는 할 수 없으니 원고를 펑크 내든 말든 알아서 하시오”라고 했겠지만, 막 간신히 기반을 다지고 있던 어린 외부 필자인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게 언론의 정규직들이 제 위계를 이용해 계약직 외부 필자에게 자기 대신 궂은일을 하도록 시키는 갑질이란 걸, 그때는 미처 몰랐다.

‘언론의 위기’, ‘레거시 미디어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다. 언론과 방송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몇년째 모바일 시대, 뉴미디어 시대에 맞춘 혁신적인 변화와 뼈를 깎는 노력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혁신’과 ‘변화’는 대부분 비정규직이나 계약직들의 손에 맡겨져 있다. 계약직인 방송작가들에게 자꾸 뭔가 새롭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짜낼 것을 요구하고, 뉴미디어 부서 계약직 인턴들에게 유튜브 콘텐츠와 카드뉴스 제작, 팟캐스트 기획을 해낼 것을 요구하고, 외부 필자에게 날카로운 시야로 얻어낸 통찰을 요구한다. 기존의 방송 언어, 기존의 언론 관행에 젖어 있는 내부 인력 대신 외부자의 시선을 빌려 새 지평을 발견하고 동력을 얻겠다는 시도가 꼭 나쁜 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을 끊임없이 불안정한 고용 상태와 박봉에 시달리는 위치, 갑과 을의 지위가 가혹할 만큼 명확하게 구분되는 위치에 방치해두는 건 나쁜 일이다.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위협 속에서, 누가 윗선의 심기를 거슬러가며 파격적인 혁신과 변화를 제안할 수 있단 말인가? 인력을 그처럼 쉽게 자르고 바꿀 수 있는데, 혁신과 변화를 향한 도전의 경험이 어떻게 축적되고 계승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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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토크쇼 J> 방송 장면. 프로그램 누리집

한국방송(KBS) 〈저널리즘 토크쇼 J〉 제작에 참여했던 프리랜서 피디 정주현씨는 지난 23일 〈저널리즘 토크쇼 J〉 공식 카페와 페이스북 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개편을 이유로 〈저널리즘 토크쇼 J〉 제작에 참여한 스무명 남짓한 프리랜서 노동자들이 사실상 일방적인 계약 종료 통보를 받았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정주현 피디는 애정과 자긍을 담아 근무하던 프로그램에서 내쳐진 울분을 이야기하는 글에서 “노동자 정신의 근간인 전태일 열사 이야기를 방송으로 만들며, 그 방송을 만드는 노동자들을 부당하게 해고하는 이 구조적 모순. 이런 모순이 아무렇지 않게 존재하는 곳이 지금의 한국방송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문제를 취재한 〈미디어오늘〉 김도연 기자의 기사를 보면 “자막 크리에이터는 출근한 지 일주일, 막내 작가는 고작 3주. 진짜 실력 발휘도 전에 당장 나가야 할 어려움에 직면했다.”(저널리즘토크쇼J 중단·해지 통보에 ‘비정규직의 눈물’, 〈미디어오늘〉 2020년 11월22일)

한국방송 쪽은 이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프로그램의 개폐 또는 개편을 위한 일시 종영은 (…) 대내외 여건에 따라 그 결정이 급작스럽게 이뤄지는 경우도 적지 않”으며, 자신들은 “정부가 마련한 ‘방송영상프로그램 제작스태프 표준업무위탁계약서’에 따라 프리랜서 제작 스태프와 계약을 맺고 일하고 있”어서 이번 건도 계약 위배는 아니라고. “나아가 프로그램 재개 시 기존 스태프 상당수와 다시 일하겠다는 방침과 스태프가 KBS 내 다른 프로그램에서 일하기를 원할 경우 이를 알선하기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는데 이게 불법적이고 부당한 해고인 것처럼 일방적이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건 유감스럽다는 내용이었다. 요약하자면 “갑작스레 통보한 건 미안하지만 정부가 권고한 계약기준상 그래도 되는 거였고, 장담은 못하지만 계속 한국방송에서 일하고 싶다면 고려해 보겠다고도 말했는데 글을 쓰다니 괘씸하다” 정도 되겠다.

<저널리즘 토크쇼 J>의 논조나 태도에 한 번도 동의해본 적은 없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언제든 가볍게 잘려 나갈 수 있는 처지에 놓인 사람이 조직에 애정을 가지고 혁신과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한국방송이 스스로 개혁하겠다며 내세웠던 프로그램마저 이런 식으로 외주 인력의 손에 맡겼다가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없앤다면, 그다음에 그들이 어떤 개혁을 말한다고 한들 대체 누가 믿겠는가?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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