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2월 고석만(가운데 흰옷) 연출과 김기팔 작가는 ‘김구 선생 서거 40주기’를 기려 <백범일지>를 만들었다. 한중 수교 이전 최초로 중국 현지 촬영으로, 상하이 임정 청사 근처 거리에서 백범(김진태·오른쪽)이 걸어가는 장면을 찍을 땐 인파가 너무 몰려, ‘가짜팀’이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린 뒤 ‘진짜 팀’이 몰래 찍어야 할 정도였다. 사진 엠비시 가이드 제공
[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34회) ‘백범일지-최초의 공식 중국 촬영’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한중 수교 3년 전인 1989년 2월 <백범일지> 제작진 8명은 홍콩을 거쳐 베이징공항에 도착했다. 중국 쪽에서는 대형 화환까지 준비하고 통역 등 4명이 마중나와 환대해줬다. 사진 고석만 피디 제공
1989년, 최초의 공식 중국 촬영이 실행되었다. 그 첫 작품은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로 정해졌다. 이때가 한-중 수교 3년 전. 지금 왜 백범이고 왜 중국인가?
<백범일지>의 기획 의도. ‘백범 서거 40주기를 맞아 그의 유년기, 청년기의 삶과 인간적 면모, 대장 김창수 시절, 상하이(상해) 임정 투쟁, 해방과 환국, 그 이후의 제2 독립운동을 서사극 형식을 빌려 역사적 실체를 조명한다. 고전적 민족주의가 무엇인지. 그 대표적 인물 백범에 대해 평가절하된 부분은 바로잡으며, 객관적인 자세로 백범의 일대기를 90분 4부작으로 제작한다.’
이른바 ‘87체제’ 이후 민족사적 서사의 시대도 고비를 만났다는 섭섭함을 되씹고 있을 때였다. 88올림픽 이후 우리의 방송이 내밀한 미세 정서로 일정 부분 풍요로운 듯하지만, 그들이 전개한 역사와 현실에 대한 뜨거운 재현은 보기 힘들어졌다. 국제 역학관계는 중국의 개방을 요구했고, 중국 또한 88올림픽 이후 한국과 수교의 수순만 지켜보고 있었다. 이때 문화가 첨병 역할을 해야 했다. 공식 허가를 받아냈다. 안기부와 친숙한 부장의 능력이다. 기업에서 도와주었다고 하지만 근거가 없다.
백범의 ‘삼천만에 읍고함’과 ‘나의 소원’의 여정을 그리기 위해 출국했다. 홍콩에서 2박3일을 기다려 중국 비자를 받아야 했다. 유효기간 한달. 임시사증을 받았다.
1989년 중국에서 <백범일지> 제작진에게 내준 한달짜리 임시사증. 사진은 탤런트 최병학(최낙천)이 받은 비자.
1989년 2월11일 베이징행 차이나항공에 탑승했다. 1919년 3·1운동의 기운을 안고, 신의주를 거쳐 도망치듯 상하이 황푸(황포) 선창에 당도하는 청년 백범을 떠올리며….
우리 제작팀 8명이 베이징공항에 도착하자 중국 쪽에서는 기내에 들어와 영접하는 파격 환대를 해주었다. 트랩을 내려서니 활주로에 커다란 화환을 앞세운 여성 안내원도 기다리고 있었다. 기념촬영을 하면서 긴장이 많이 풀렸다. 베이징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가로수길 뒤쪽으로 마차가 지나가고, 스치는 작은 마을들은 석탄공장의 뒷길 같았다. 배춧잎 색깔의 상의를 걸친 사람들은 가게 앞 당구대에서 한가하다. 흙바람을 맞으며 늙은 개가 어슬렁거리고 있다. 베이징 시내로 들어서니 특정 지역을 알리듯 드문드문 대형 건물이 보일 뿐 모두가 가라앉았다. 우리가 머물 호텔은 ‘쉐라톤’ 체인점. 20층 건물의 로비엔 만리장성 극사실화가 전면 벽 전체를 압도하고 있다. 체크인을 기다리는 우리 일행에게 지나치는 몇사람이 말을 시키자 안내원이 일러준다. “옆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절대 관여하지 말라. 자칫 거꾸로 당한다. 볘관셴스(別管閑事)!” 그래선지 중국에선 옆에서 사람이 맞거나 죽어도 그냥 지켜보는 사건이 많다고 한다. 이튿날 우리 일행은 하루를 잡아 만리장성과 자금성 주변을 말 타고 달리듯 주마간산하고 다음날 상하이로 향했다. 그런데 베이징공항에서 문제가 생겼다. 이유를 모르는 지체가 두시간 이상 계속된다. 지체가 풀리자 탑승이 시작되는데 단체승객 최우선이다. 사회주의국가답다. 어렵게 상하이공항에 도착했다.
1989년 상하이는 번화한 유럽 도시에 동양인만 가득찬 격이다. ‘상하이의 중심에 있는 석재 황포다리를 봇짐을 멘 한복 차림의 김구(김진태)가 인파 사이로 걸어온다.’ 상하이는 베이징과 다르게 사람들이 들끓었다. 도시의 반은 프랑스조, 포르투갈조, 영국조 등등 치외법권의 외교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오픈세트장으로 그만이다. 특히 상하이촬영소는 일제 때 크게 번창하여, 세트는 물론 대도구·소도구·의상들이 원형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그 원형은 박물관에 보존하고 복제해서 활용해야 하는데, 자금 부족으로 원형을 그대로 사용한다. 연기자들(최낙천·박영태)은 서울에서 준비해 간 의상은 내던지고 원형 의상을 고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우리 제작진(이강훈·조중현)은 중국에 도착한 그날부터 매일 밤 정산에 몰두한다. 외폐와 민폐의 혼용 문제가 심각했다. 무려 10배의 가치를 중국 기획사가 악용할 우려 때문이다. 중국 쪽에서는 기획사 대표, 프로듀서 격 실무자, 공산당에서 파견 나온 사람, 통역 한명, 업무보조 한명 등 기본 5명에 그때그때 미술 등 여러 파트의 많은 사람이 수시로 들락거렸다. 그중엔 짧은 영어를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소녀들이 활발하다. 한국전쟁 직후 우리 미군 점령지가 떠올라 씁쓸했다. 우리 팀이 선물용으로 마련해 간 팩스 한대는 그들의 사냥감이었다. 귀국 때까지 ‘미끼’가 되어야 한다.
1989년 <백범일지> 제작진은 상하이 1925번지, 1920~30년대 임시정부 청사 건물을 찾아 촬영했다. 넓은 건물 가운데 2층 작은 방이었다. 사진 고석만 피디 제공
1920년대 임시정부는 가난했다. 임정 청사를 주소만 갖고 찾아 나섰다. 중국 쪽에 미리 부탁해 놓은 ‘1925번지’는 너무 넓다. 청사로 쓴 2층 방을 찾아냈다. 나이 든 할머니가 뜨개질하며 맞이했지만, 자신도 말만 들어 확실히 모른단다. 가난했던 그 시절의 백범 술회 한 토막이 인상 깊다. “독립운동하다가 ‘살신망가’ 하는 동포가 수십수백 늘어나고 있다는 참담한 소식을 듣고 앉은 마당에 어머님의 수연을 준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생일 같은 것은 입 밖에 내지 않고 지내다가, 임정 8년에 나석주가 식전에 많은 고기를 사가지고 와서 어머님께 드린다. ‘오늘이 선생님의 생신이 아닙니까? 그래서 돈은 없고, 의복을 전당하여 고깃근이나 좀 사가지고 왔습니다.’ 그리하여 가장 영광스러운 대접을 받은 것을 영원히 기념할 결심을 함과 함께, 어머님에 대해서는 너무도 죄송하여 내가 죽는 날까지 내 생일을 기념하지 않게 하고, 날짜를 기입하지 않게 되었다.”
1989년 2월 사상 첫 중국 현지 촬영 드라마 <백범일지>는 임시정부 수립일 즈음해 5월 4부작으로 방영됐다. 앞서 88년 말 ‘김구’ 배역 선정을 두고 시청자들 사이에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제1공화국>의 이영후와 경쟁한 김진태(맨오른쪽)가 백범의 일대기를 연기했다. 사진 엠비시 가이드 제공
상하이 도착 2일째, 본격 촬영에 들어갔다. 전체 부감을 잡기 위해 18층 건물 옥상에 올랐다. 1919년에 세운 건물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촬영 준비를 마칠 즈음 ‘공안’ 마크가 눈에 띄는 경찰관리 두명이 나타나 촬영을 제지한다. 그간 우리 일행을 주시해온 당원이 항상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노란 봉투에서 16절지 증명서를 보여주자 관리들은 아주 깍듯이 경례를 하고 빠진다. 그 증명서엔 붉은색도 선명하게 ‘공작’(工作)이라 박혀 있었다. 드디어 길거리 촬영을 해야 한다. 중형버스가 서면 연출자가 맨 먼저 내려 위치를 잡고 신호하면, 배우가 내리고, 태양 반사판이 순서대로 서면, 저 인파 속으로 카메라가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큐’ 사인이 떨어지면 연기를 시작해야 한다. 간단한 연기 설정이다. 그런데 세팅이 되기도 전에 인파에 밀려 꼼짝할 수가 없다. 두세번 시도하다 실패하고 작전을 바꿨다.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은 가짜 촬영을 하며 사람들을 몰고 다니고, 실제 촬영팀은 한적한 곳에서 몰래 찍는 식이다. 길거리 낮 촬영은 육박전을 방불케 했다. 그리고 실내 촬영. 김구와 임정의 일상 업무, 회의 장면 등. 현지 조명팀과 우리 촬영팀의 소통은 원활했다. 현지 조명팀의 조명 원리와 용어가 완전하게 일본식이었다. 한국과 중국의 영화 문화가 생성되고 번창하며 만들어진 영화 문법이 일제 식민시대의 산물임이 여실히 드러났다.
<백범일지> 김기팔 극본, 고석만 연출로 1989년 5월6~9일(90분 4부작) 방송되었다. 애초 3·1절 특집극으로 기획됐으니 예정보다 늦어진 셈이다.
1932년 백범은 윤봉길(박영태)을 맞이했다. 백범 일생에 가장 빛나던 시절이다. 재현했다. “선생님께서 동경 사건(이봉창의 폭탄 투척)과 같은 경륜이 계실 줄 믿고 찾아왔습니다. 지도해 주시면 은혜 백골난망입니다.” 백범은 감복해서 말한다. “뜻이 있으면 일도 이룬다고, 안심하시오. 내가 근일에 연구하는 바가 있으나,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하여 번민하던 참이었소. 왜놈이 4월29일에 홍구(훙커우)공원에서 천황의 천장절 경축전례식을 성대하게 거행할 모양이오. 그러니 군은 일생 대목적을 이날에 달함이 어떠하오?” “저는 흉중에 일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해집니다. 준비해 주십시오.”
1989년 2월 <백범일지> 제작진은 ‘윤봉길 의거’의 현장, 홍구공원(뤼신공원)을 여러차례 사전답사해 실제 윤 의사(박영태)의 동선을 확인했다. 사진 탤런트 박영태 제공
다음날 아침, 강남조선소를 찾아갔다. 물통과 도시락 두 가지 폭탄을 시험하는 방법을 지켜보았다. 마당 한곳에 토굴을 파고, 속에 사면으로 철판을 두른 다음 그 속에 폭탄을 장치한다. 그러고서 뇌관 끝에 긴 끈을 매더니, 공원 한 사람이 끈을 잡고 수십보 밖으로 기어가서 잡아당겼다. 그러자 토굴 속에서 벽력 소리가 진동하며 파편이 날아오르는 것이 일대 장관이었다. 그날로부터 매일 홍구공원을 답사하였다. 재현 촬영 당시 홍구공원은 ‘루쉰공원’으로 개칭되었다. <아큐(Q)정전> 등 현실 비판 소설로 유명한 루쉰의 이름을 땄다. 윤봉길의 동선을 모두 촬영하였다. 특정 지형지물을 모두 찍었다. 서울에 도착해 재현할 홍구공원 단상과 거대한 폭파 장면을 제외한 투척, 체포 등 세부동작은 인건비가 싼 현지 출연자와 함께 다 찍었다.
1932년 4월29일 홍구공원 의거 이틀 전, 윤봉길 의사는 김구와 한인애국단에서 선서식을 한 뒤 태극기 앞에 수류탄과 권총을 들고 마지막 기념 촬영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특집극 <백범일지>에서 재현한 윤봉길(박영태) 의사의 마지막 기념 촬영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4월29일 아침, 윤봉길은 자신의 시계를 꺼내 백범에게 건네면서 “선서식을 한 뒤에 선생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산 것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나에게 주십시오. 나는 한시간밖에 소용이 없습니다.” 백범은 그 시계를 기념품으로 받았다. 윤봉길은 식장으로 떠날 때, 자동차를 타면서 소지한 돈도 꺼내 백범에게 쥐여주었다. “약간의 돈을 갖고 있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는가?” “아닙니다. 자동차삯을 주고도 5, 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자 곧 자동차가 움직인다. 백범은 목멘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봉길이 차창으로 백범에게 머리를 숙일 때 자동차는 큰 소리를 내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을 향해 달려갔다.
<로이터> 통신의 발고로 ‘동경 사건과 상해 홍구 사건의 주모 획책자는 김구요, 집행자는 이봉창과 윤봉길’이라는 사실이 세계 각국에 보도되었다. 60만원의 현상금이 붙었다. 도피 생활이 시작되었다. 가흥(자싱)은 산이 없으나 호수는 낙지발같이 사통팔달하여, 7·8살 아이들도 다 노를 저을 줄 알았다. 소녀 뱃사공과의 선상 생활을 재현하였다. 중국의 풍광과 정취가 가득하였다. 김구, 14년 만의 유쾌한 외출이다.
1933년 5월, 당시 장개석(장제스) 총통은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에 큰 감명을 받고 임정을 적극 지원했다. 백범과 장개석의 ‘남경군관학교 회담’은 임정을 기사회생하게 하였다. 이 장면의 재현은 불발되었다. 그때 그곳에서도 검열은 자행되었다.
1989년 5월 방영된 문화방송 특집극 <백범일지>는 1876년 8월 황해도 해주 백운당 시절부터 1949년 6월26일 암살로 쓰러질 때까지 김구 선생의 74년 거인의 일대기를 그렸다. 마지막 장면은 실제 국민장 기록영상으로 마무리했다. 사진은 1930년 상하이 임정 시절 결성한, 훗날 한독당의 전신인 대한독립당 창당대회 재연 장면.
국내 최초로 시도된 공식 중국 촬영은 2월17일, 해방 소식을 듣는 백범의 모습을 끝으로 모두 마쳤다. 백범은 미국 전략정보국(OSS) 훈련장에서 해방을 맞으며 통탄했다. 완전 독립을 위한 무장 훈련, 무장 침공, 본토 수복을 최고의 가치로 준비하던 백범은 참담한 ‘임정 1진’ 귀국길을 맞이한다. 그리고 45년 말 신탁통치 발표와 반탁운동, 연이은 요인 암살 사건, 이승만의 단독정부 획책을 목도하며, 제2의 독립을 선언하는 ‘삼천만에 읍고함’을 발표한다. 48년 2월13일.
“삼천만 동포여. 한국이 있고야, 한국 사람이 있고,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다른 단체도 있는 것인데…,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 세우는 일에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궂은날이면 38선을 싸고도는 원귀의 곡성이 들리지 아니한가…, 마음속의 삼팔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삼팔선이 철폐되는 것, 글이 이에 이르니 가슴이 콱 막히고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을 더 잇지 못하겠다.”
백범은 비통하여 외치고 또 외쳤다. 그러나 국내 정세는 그의 의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진행되었다. <백범일지>의 마지막 장 ‘나의 소원’은 49년 5월20일 마곡사에서 발표되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백범 김구, 그는 시대의 테러리스트인가? 위대한 독립운동가인가?
드라마 <백범일지>는 49년 6월26일의 암살 장면을 정교하게 재현하였고, 장례식은 기록영상으로 수록하였다. 온 국민의 오열 속에 거인의 일대기를 비장하게 마쳤다. 이렇게 고고한 분과 한 시대를 함께한 것은, 내 생애의 엄숙하면서도 자랑스러운 행운이었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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