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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정애리와 스캔들·이미영 ‘가짜 전화’·오지명과 육박전…웃지 못할 사연들”

등록 2018-04-15 05:02수정 2018-04-15 11:59

[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⑭ 굴절시대-제1공화국의 굴절
1981년 10월 정치드라마 <제1공화국> 연출로 복귀한 고석만은 82년 2월 11일 39회 종영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었다. 사진은 서울 동숭동 이화장에서 촬영을 하면서 고석만(앞줄 왼쪽 둘째) 피디와 이승만역의 최불암(뒷줄 가운데), 이기붕역의 박규채(뒷줄 오른쪽) 등 제작진과 출연진이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게 한 모습이다.
1981년 10월 정치드라마 <제1공화국> 연출로 복귀한 고석만은 82년 2월 11일 39회 종영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었다. 사진은 서울 동숭동 이화장에서 촬영을 하면서 고석만(앞줄 왼쪽 둘째) 피디와 이승만역의 최불암(뒷줄 가운데), 이기붕역의 박규채(뒷줄 오른쪽) 등 제작진과 출연진이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게 한 모습이다.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1980년 ‘5월 광주’를 딛고 집권한 5공 정권은 이른바 ‘3허(허문도·허화평·허삼수) 주도로 ’3S정책’(스포츠·영화·섹스)을 도입해 대중의 관심을 호도하고 변질시켰다. 1982년 3월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시구하는 대통령 전두환(오른쪽)을 유창순 국무총리(왼쪽)와 ‘엠비시 청룡 야구단’을 창단한 이진희(가운데) 사장이 지켜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5월 광주’를 딛고 집권한 5공 정권은 이른바 ‘3허(허문도·허화평·허삼수) 주도로 ’3S정책’(스포츠·영화·섹스)을 도입해 대중의 관심을 호도하고 변질시켰다. 1982년 3월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시구하는 대통령 전두환(오른쪽)을 유창순 국무총리(왼쪽)와 ‘엠비시 청룡 야구단’을 창단한 이진희(가운데) 사장이 지켜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휴전 무렵, 밤, 이(E)여대, 수백명의 군인들이 호위하는 중에 50여명의 여학생들이 줄줄이 끌려나와 군용 트럭에 태워진다. 대령 계급장의 지휘관이 유독 한 여학생을 주시한다. 그들은 어디론가 끌려가 문초를 당한다. 그때, 대령은 그 여학생을 납치하듯 빼내고 그들은 밀회에 빠진다. 급기야 홍콩으로 밀행을 감행한다. 그들의 홍콩잠행은 해를 넘기며 깊어졌지만 꼬리가 잡히자, 일본 도쿄로 옮긴다. 곧 어느 재벌 회장에게 여인을 소개한 뒤 대령은 귀국하더니 소식이 끊긴다. 여인은 유복자를 낳는다.(훗날 아들은 문제작의 영화감독이 된다) 회장은 친손녀처럼 여인을 아꼈다. 여인의 일본 상류사회 화려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시절 교류한 한국인 중에 허문도(주일 한국대사관)·이원홍(주일 한국일보 특파원)이 보인다. 바로 전두환정권의 언론 관련 실세들이다.

여인은 그 재벌이 세상을 떠날 때, 한국의 쌍용그룹 김성곤 회장에게 유언처럼 인계됐다고 한다. 귀국한 여인은 쌍용의 후원으로 한국 최대의 프로덕션을 차린다. 여인의 주변엔 문화계의 거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감싼다. 최고 인기 소설가도 보이고, 영향력 있는 문화부 기자도 보이고, 유명 통기타 가수도 보인다. 물론 이름 있는 드라마 작가와 연출자도 보인다. 프로덕션의 탤런트 공모에 심사위원으로 앉아있는 모습들이 이채롭다. 날로 번창한다. 일본의 프로덕션 성장과정을 그대로 답습한다.

1981년 6월 ‘남산 4박5일’ 뒤 입원
서먹했던 김수현 작가까지 병문안
‘김수임’ 정애리는 두 차례 다녀가
스포츠지 ‘병실에서 살더라’ 가십

미스 해태 이미영에 ‘고석만 사칭’ 전화
“맨하탄호텔로 오디션하러 오래요”
이튿날 만난 연예기자 “고 피디 만났지?”

‘제1공화국’ 출연 요청 못받은 오지명
“야!” “인마라니!” 고석만과 주먹다짐
후반부 ‘임화수’ 배역 뒤늦게 알고 ‘사과’

‘4·19 세대’ 김기팔 작가 ‘큰 부채감’
시간·제작비 바닥나 고민하던 연출자
미 국립보관소서 ‘4·19 희귀필름’ 발굴
1982년 2월 ‘제39화 제1공화국 종식’

1980년 ‘5공 실세 중의 실세’로 꼽힌 허문도·허화평·허삼수, 이른바 ‘3허’가 도입한 ‘3에스정책’(Sport·Screen·Sex)는 일제의 전철을 그대로 밟은 것이었다. 일본이 3·1운동 이후 문화정책으로 선회하더니, 신군부가 ‘5월 광주’를 겪은 뒤 3에스정책을 펼치고 있다. 문화방송(MBC)이 중심이 되어 프로야구단을 창설하고, 전국적으로 포르노 필름과 옐로우 페이퍼가 기승을 부린다. 사회가 굴절되어 가고 있다. 죽이지 않고 꺾지 않고 변질시킨다.

연예 담당 민완기자가 대접을 받고 스포츠지가 가판의 주인공이 되었다. 인기 가수 조용필이 어느날 갑자기 결혼식을 올려 대서특필이 되었다. 뒷날 알고보니, 두 남녀가 한두번 만나는 게 기자 눈에 띄더니, 남녀를 따로 어느 절로 초대해 만나는 장면을 찍고는 ‘산사에서 비밀결혼’ 민완기자의 특종이다. 착한 연기자 심혜진은 평범한 셀러리맨과 양가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해 행복한 신혼을 보내는데, 시도때도 없이 부부의 근황을 묻더니, 불화를 조장한다. 근거없는 괴담도 늘어놓는다. 급기야 파경에 다달으니 대서특필하여 신혼을 깬다. 수영 선수 한 명도 옐로우 페이퍼가 결혼에 골인 시킨 예이다. 강수지가 이혼하며 힘들어할 때 ‘눈물의 신곡’을 출반시킨다. 왜곡을 통한 착시를 즐기는 것이다. 하지만 최대의 물량과 최고의 기획력을 발휘했다는 ‘뉴키즈언더블록’이 ‘비틀즈’를 이길 수 없다. “문화는 선별과 여과의 오랜 과정이다.”

1981년 6월 안기부에서 고초를 겪고 나오자마자 순천향병원에 일주일간 입원했다. 그 사이 회사에서 인사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제1공화국> 연출자는 이연헌 선배 피디로 곧 바뀌었다. 병문안 와 주는 동료들이 참 많았다. 조연출 때 심한 언쟁 끝에 교류가 끊겼던 김수현 작가까지 다녀갔으니 올 사람은 다 온 셈이다. 그 중엔 탤런트 정애리도 있었다. ‘여간첩 김수임’ 편 때문에 고초를 겪었으니 공범의식 차원에서 두 차례 병문안을 왔다.

그 일주일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면서 전업까지 염두에 두었다. 안기부에서는 담당이 정해졌다. 악역을 자처하던 피(P) 과장이다. 시시각각 안부를 묻고 있다. 그로부터 만 2년 동안 그는 끈을 놓지 않았다. 퇴원 뒤 회사에 출근해 탤런트실에서 무용담 아닌 무용담을 늘어 놓으며 공공연하게 큰소리로 외쳤다.“내 인생에 돈과 여자는 담 쌓았다”공언을 했다. 그리고 실행에 옮겼다. 그해 6월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1981년 6월 ‘안기부 조사’를 받고 나온 뒤 고석만은 전담 요원의 감시는 물론 황색 언론의 집요한 스캔들 공작에 시달려야 했다. ‘미스 해태’ 출신의 20대 초반 신인 탤런트 이미영(사진)은 한밤중에 고석만을 사칭한 ‘호텔 호출’ 전화를 받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 사진
1981년 6월 ‘안기부 조사’를 받고 나온 뒤 고석만은 전담 요원의 감시는 물론 황색 언론의 집요한 스캔들 공작에 시달려야 했다. ‘미스 해태’ 출신의 20대 초반 신인 탤런트 이미영(사진)은 한밤중에 고석만을 사칭한 ‘호텔 호출’ 전화를 받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 사진
그런데 퇴원 얼마 뒤 디(D) 스포츠지의 한 기자가 ‘나와 정애리의 관계’를 물고 늘어졌다. ‘병원에서 살더라’는 식이다. ‘24시간 아내가 병실에 함께 있었는데 무슨 말이냐? 맹세코 손 한번 안 잡은 투명관계다.’아무리 해명해도 기사를 쓰겠단다. 간호사한테 들었다는 거다. 결국 기사가 나왔다. 아주 단신이지만 기사는 기사다. 김성희 국장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웃으며 정문 수위실에 회사로 배달되는 D주간지 전량을 묶어두고 배포를 못하게 막았다. 집에 와 아내에겐 퉁명스럽게 전말을 얘기했다. 아내 역시 퉁명스럽게 듣고 나가 버린다. 그 다음날 밤 아파트 베란다엔 무릎 높이의 주간지 더미가 담요에 덮여 있는 거다. 아내가 하루종일 정신병자처럼 그 주간지를 사들인 것이다. 족히 300~400권은 될 것같다. 그 주간지 더미는 보름쯤 지나 치워졌다.

그 얼마 뒤, 어느날 밤 9시가 넘어 탤런트 반효정이 집으로 전화를 했다. 처음이다. 그의 남편인 이상현 작가와는 최근 8·15 특집극을 졸속제작한 뒤라, 서로 얽힌 감정이 남아 있던 참이다. 의례적 인사로 끊고나서 생각하니 이상하다. 다음날 녹화 스튜디오로 찾아갔다. 그는 자꾸 웃기만 한다. 재차 물었더니, 웃지 못할 사연이 있었다. 즉, 전날 밤 후배 신인 탤런트 이미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반효정에게 전화를 했단다. “고석만 선생이 전화해서 바로 나오래요. 여의도 맨하탄호텔 706호로…, 곧 주말연속극 제작 들어가는데 오디션 보자고요. 어떻게 해요?”그럴 사람이 아닌데 의아해서, 목소리는 맞느냐 물으니 “그 선생님하곤 일도 같이 해본 적도 없으니 전화 목소리를 어떻게 알아요?”나가지 말고 기다리라 해놓고 당사자인 내게 전화해 집에 있는지를 자연스럽게 확인한 거다. 그 다음날 오후 이미영은 디 주간지의 그 기자를 분장실 앞 로비에서 부딪혔단다. “너, 어제 맨하탄에 갔지? 고석만과 같이 있는 걸 본 사람이 있다.”, “말도 안되는 소리 말아요!” 이미영이 쏘아붙였더니, 기자는 듣기 민망한 욕을 혼잣말처럼 하면서 가더란다.

이연헌 연출의 <제1공화국>은 예정대로 씩씩하게 방송되었다. 그러다‘제16·17화 반민특위’ 때는 정권 쪽에서 바싹 점검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보수 세력은 친일파에 약하다. 반민특위는 역사적으로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 친일파 척결을 내세웠지만 용두사미로 끝이 났던 사건. 그것이 끝이 아니다. 현재진행형이다. 오늘의 반민특위는 이 땅의 지식인들을 부끄럽게 한다. 김기팔 작가도 부끄러워 했다. 굴절된 시대 만큼, 드라마 <제1공화국>도 굴절되었다.

그럴 즈음, 1981년 10월 18일. 천주교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하는 신앙대회가 여의도광장에서 80만명이 넘는 신자들과 500명이 넘는 사제들이 모여든 가운데 엄숙히 진행되었다. 인간성 상실과 물신주의를 극복하고 희망과 사랑의 등불을 밝히자고 기도했다. 이튿날 신문들은 이 미사에 80만 신자들이 운집했지만 그들이 떠난 자리에 단 하나의 쓰레기도 남지 않았다는 시민의식에만 주목했다. 쓰레기만 잘 치우면 민주주의 선진국인가.

1981년 10월 <제1공화국> 연출을 다시 맡은 고석만은 제28화 ‘반공포로 석방과 휴전’편에서 송추의 유원지에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재연하고 500여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한 야외촬영으로 화제를 모으며 성공적인 복귀 신고를 했다. 문화방송 제공
1981년 10월 <제1공화국> 연출을 다시 맡은 고석만은 제28화 ‘반공포로 석방과 휴전’편에서 송추의 유원지에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재연하고 500여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한 야외촬영으로 화제를 모으며 성공적인 복귀 신고를 했다. 문화방송 제공
<제1공화국>의 연출이 다시 전격적으로 교체되었다. 의외였다. 고석만, 3개월만의 복귀작은 ‘제28화 반공포로 석방과 휴전’.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한 방’ 먹인 사건이다.“치고 나가자! 기가 질리게 하자!” 반미 소재의 의외성도 좋고, 김기팔 극본의 활력도 좋다. 그간 침체된 분위기를 새롭게 하자. 야외 촬영에 힘을 주었다. 송추의 신흥유원지를 통째로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만들고 엑스트라 500명을 투입했다. 군복 등판에 흰색 페인트로 ‘피 더블유’(PW)를 써넣고 촬영을 나서면서부터 시선이 집중되더니, 방송이 나가면서 물량면이나 내용면에서 시청자들을 압도했다. 무겁게 가라앉은 국민들을 카타르시스 시키며 엄청난 폭발력을 보였다.<제1공화국>은 일거에 활기를 되찾고 화제작이 되었다.

<제1공화국>은 드라마의 인기와 비례해 갖가지 화제도 많았다. 출연 요청을 기다리던 탤런트 오지명은 후반 배역으로 내정된 줄 모른 채 고석만에게 시비를 걸어 ‘주먹다짐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사진은 ‘반공예술인단과 임화수’(38회) 편에서 1959년 12월 임화수(오지명·사진)의 희극배우 김희갑(정진) 구타 사건을 재연하는 장면이다. 문화방송 제공
<제1공화국>은 드라마의 인기와 비례해 갖가지 화제도 많았다. 출연 요청을 기다리던 탤런트 오지명은 후반 배역으로 내정된 줄 모른 채 고석만에게 시비를 걸어 ‘주먹다짐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사진은 ‘반공예술인단과 임화수’(38회) 편에서 1959년 12월 임화수(오지명·사진)의 희극배우 김희갑(정진) 구타 사건을 재연하는 장면이다. 문화방송 제공
<제1공화국> ‘반공예술인단과 임화수’편에서 희극배우 김희갑과 닮은 꼴 이미지로 발탁된 탤런트 정진은 이 작품을 계기로 이름을 얻어 훗날 ‘한명회’로 큰인기를 얻게 된다. 문화방송 제공
<제1공화국> ‘반공예술인단과 임화수’편에서 희극배우 김희갑과 닮은 꼴 이미지로 발탁된 탤런트 정진은 이 작품을 계기로 이름을 얻어 훗날 ‘한명회’로 큰인기를 얻게 된다. 문화방송 제공

1959년 12월 임화수에게 구타당하고 백병원에 입원한 희극배우 김희갑(사진)이 기자들에게 사건을 증언하고 있다. 그는 1981년 <제1공화국> ‘반공예술인단과 임화수’편에 직접 출연할 예정이었으나 국외 공연 일정 탓에 무산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1959년 12월 임화수에게 구타당하고 백병원에 입원한 희극배우 김희갑(사진)이 기자들에게 사건을 증언하고 있다. 그는 1981년 <제1공화국> ‘반공예술인단과 임화수’편에 직접 출연할 예정이었으나 국외 공연 일정 탓에 무산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인기만큼이나 관심도 많고 시기도 많아진다.‘자유당 압승,’스튜디오 녹화날이다. 두 개의 스튜디오를 통째로 열어 녹화를 하면, 다른 프로그램들은 낄자리가 없다. 2층 분장실을 지나 스튜디오 문을 밀고 들어설즈음 어디선가“야!”소리에 돌아보니 탤런트 오지명이 분장실 문을 열며 소리친 것이다.“나 말입니까?”“그래,여기 너 말고 누가 있어 임마!”“뭐? 임마라니?”“이 짜식이…”하며 달려들어 멱살을 잡는다.서로 멱살 잡고, 오지명이 한 대 치자,고석만도 한 대 치고,또치면 또받아치고,멱살잡고 밀고 당기고.사람들이 달려와 말린다.이정길, 김용건은 선배 오지명에게 쩔쩔매며 어쩌지 못한다. 탤런트 세계에서 오지명이 누군가. 절대 파워맨 아닌가. 의상 담당 장 여사가 중간에 끼어 들며 육박전은 끝났다.

30초간의 주먹다짐 소문은 2층은 물론 3층 제작부 스튜디오까지 순식간에 퍼졌다. 방송사의 모든 녹화가 일시에 중지되었다. 두 시간 이상 사과를 요구하며 버티다가 소식 듣고 달려온 김기팔 작가의 중재로 일단, 녹화는 계속되었다. 연출자와 연기자의 폭행 충돌.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오지명의 소외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1공화국>의 출연진은 문화방송의 탤런트실 대다수, 연극배우들까지 대거 참여하는데, 오지명, 그 소외감이 어떠했으랴. 사실 오지명은 임화수역으로 방송 초반에 이미 내정하고 발표만 안 했던 것이었다. 이정재에 조경환, 김희갑에 정진...후반부 비장의 캐스팅이 숨어 있었다.

정치드라마 <제1공화국>은 ‘이정재(조경환)와 김두한(강인덕)’로 상징되는 정치깡패들의 세계도 실감나게 그려내 큰호평을 받았다. 문화방송 제공
정치드라마 <제1공화국>은 ‘이정재(조경환)와 김두한(강인덕)’로 상징되는 정치깡패들의 세계도 실감나게 그려내 큰호평을 받았다. 문화방송 제공
다음날 김기팔 작가를 앞세워 오지명이 사과를 하러 왔다. 흔쾌하게 화해되었다. 이 화해 분위기로 자유당 시절의 깡패 이야기는 예정보다 좀 일찍 등장하게 된 것이다. 희극배우 김희갑이 임화수 일당에게 몰매를 맞아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고, 가수 나애심이 등장하여 조폭과 연예계의 뒷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이정재와 김두한의 대결은 대단하였다. 밀폐된 장소에서의 대결도 볼만 했지만 공개된 장소에서의 멱살잡이. 이 대결은 그때나 드라마에서나 화제만발이었다. ‘조폭과 정치’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데…반응이 너무 좋다. 연기자도 좋아하고, 조폭의 후예들도 좋아하고, 정치인도 좋아하고, 정부 정권도 좋아하고, 시청자도 좋아하고, 광고주도 좋아하고, 방송사도 좋아한다. 오로지 작가와 연출은 고통스럽다.

굴절시대의 <제1공화국> 후반부는 역사 앞에 무릎 꿇고 제작했다. <제1공화국> 같은 작품은 다시 제작되어야 한다. 1850년 나폴레옹이 1950년에는 다르다. 대한제국과 한일합방, 해방공간과 좌우분열…. 한민족의 숙명이 아니라 창피한 교훈이다. <제1공화국>에서 보았다. 2018년에도 그냥 그대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듯하여 슬픈 느낌을 받기까지 한다.

1982년 2월11일 <제1공화국> 마지막회 ‘민주당 신구파와 4·19 제1공화국 종식’ 편에서 고석만은 미국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직접 발굴해 온 ‘60년 4월19일 경무대 앞 경찰의 조준 발포 장면’(사진) 등 희귀 필름을 공개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2년 2월11일 <제1공화국> 마지막회 ‘민주당 신구파와 4·19 제1공화국 종식’ 편에서 고석만은 미국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직접 발굴해 온 ‘60년 4월19일 경무대 앞 경찰의 조준 발포 장면’(사진) 등 희귀 필름을 공개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기팔 작가는 4.19 세대이다. 4.19에 대한 작가적 의무감이 있다. 상층부의 은근한 조기종료 압박을 받고 있지만 4.19의 무게감은 극본의 골격을 탄탄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시간과 제작비 지원은 고갈상태였다. 우리는 고민했다. 우리의 모든 지혜를 동원해 다큐드라마 형태를 창안 해냈다. 모든 인연을 동원해 4.19 당시의 필름을 찾아냈다. 리버티 뉴스는 물론이고 미국 워싱턴 중심가에 있는 ‘내셔럴 아카이브’필림창고에서 찾아낸 ‘미 정리된 한국편’ 생필름이 여러통 있는데 그 중에서 30분 한 마끼로 ‘4·19’ 부분을 정리해왔다. 연출자는 이런 때를 대비하여 ‘내셔널 아카이브’의 정회원 자격을 확보해놓았다. 창고에 방치된 방대한 분량의 필름에서 골르고 엮고 이어가고 붙여서 4·19의 기개를 드높이는 데 손색 없도록 편집했다. 특히 처음 공개되는 희귀 필름, 경무대길 경복궁옆 담장에서 정복 경찰의 앉어쏴 자세는 충격적이었다. 일련의 경찰들의 조준 사격 장면은 보는이를 격동시켰다. 우리 경찰의 총에 맞아 학생들이 죽어갔다. 죽음을 넘어 또 밀려오는 학생들. 경찰은 또 쏘아댔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죽어갔다. 1982년 2월 11일 <제1공화국>도 ‘제39화 민주당 신구파와 4·19, 제1공화국 종식’편으로 막을 내렸다. 그해 3월 미문화원방화 사건을 시작으로, 이 땅에 반미운동의 불이 붙었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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