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눈’뜨고 ‘진보’하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눈’뜨고 ‘진보’하기에
미국 시트콤 <프렌즈>는 1990년대 미국의 시대상을 대표하는 인기 작품이다. 종영된 지 14년 만에 최근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에서 재상영됐지만 반응은 이전처럼 뜨겁지 않다. 이유는 무엇일까. 엔비시 제공
재상영됐지만 과거의 찬사보단 혹평
성소수자 비하 및 성차별적 묘사 때문
그간 시청자가 진보했다는 방증인 셈 최근 <프렌즈> 공동제작자가 제작한
시트콤 <그레이스 앤 프랭키> 호평
여감독 메가폰 잡은 히어로물도 등장
시대 한계 넘는 사회적 분위기 고무돼 한 시대를 정의하는 프로그램이란 말은 다시 말하면 그 시대의 한계까지 선명하게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1990년대는 낡은 고정관념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하던 시기인 동시에 그 고정관념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던 시기였다. <프렌즈>와 비슷한 시기 인기리에 방영되던 에이비시(ABC) 시트콤 <엘런>(1994~1998)은 1997년 주연배우 엘런 디제너러스와 작중 엘런이 시차를 두고 커밍아웃을 한 이후 심각한 공격에 시달렸다. 온 가족이 보는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못마땅해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시청률 감소와 논란이 이어지자 에이비시는 다음해인 1998년 프로그램을 종영했다. 그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프로그램에 꾸준히 성소수자 캐릭터들을 등장시키는 건 모험 취급을 받았다. 한쪽에서는 유리천장을 깨부수려는 여성들이 고군분투하는 동안 여성에게 느끼하게 추파를 던지는 남성의 행동은 별다른 지적을 받지 않던 시절. <프렌즈>는 그런 시절의 모습을 최대한 유쾌한 톤으로 기록했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들과 사랑했던 이들 모두 그게 어떤 이들에겐 심각한 결례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지금보다 훨씬 단순하고 간명하던 시절. 그 ‘단순하고 간명한’ 미덕은 멀쩡하게 눈앞에 존재하는 것들을 몰라도 됐던 무지에서 나왔다. 억압이나 불평등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사람은 은연중에 그 상황을 정상 상태로 인지하게 된다. 장애인의 이동권이 극도로 위축된 서울에서 일평생을 보낸 비장애인들은 길이나 대중교통에서 휠체어를 탄 보행 장애인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당황한다. 길에서 장애인을 만날 일이 거의 없기에 보행 장애인과 마주친 상황 자체를 낯설어하는 것이다. 이성애를 정상이라고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성소수자에게 무례한 농담을 낳고, 전통적인 성 역할을 표준이라 강요하는 사회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가린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신분제와 노예제는 말도 안 되는 폭력이지만, 신분제와 노예제가 잔존하던 시절을 살던 이들에겐 그게 당연한 세상의 이치였을 것이다. 호주제도, 동성동본 금혼도, 이혼 뒤 여성에게만 6개월의 재혼금지 기간을 부과하던 개정 전 민법도, 그 시절에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이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 사실을 끊임없이 묵살당해왔던 이들에게나 이상했던 것이지,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가 아닌 이들에겐 “뭘 그렇게 고통스럽다고 난리냐”는 식으로 넘겨버릴 수 있는 일들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우리가 오늘날 <프렌즈>를 다시 보면서 불편하다고 느끼는 건 <프렌즈>를 만들고 향유하던 이들이 이성애 중심적인 성차별주의자에, 외모지상주의를 옹호하는 인종주의자 집단이기 때문은 아니다. 오늘날 불편을 느끼고 호소하는 이들이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공정한 ‘프로 불편러’들이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지난 14년 동안 그런 묘사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과거에서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에 조금씩 눈을 뜨며 천천히 진보해 그게 터무니없이 부당해 보이는 오늘까지 도착했다는 사실을 말해줄 뿐이다. <프렌즈>의 공동제작자였던 마르타 카우프먼의 최신작 <그레이스 앤 프랭키>(2015~)는 동성결혼, 입양으로 이뤄진 다민족 가정, 열린 연애, 노년의 성 등 다양한 가치를 포용하는 시트콤이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들도, 향유하는 이들도 조금씩 더 공정한 세상을 향해 진보하고 있는 것이다. 소수자가 당당히 서는 그날을 향해 2018년 3월 넷플릭스에서 2번째 시즌을 공개한 여성 슈퍼 히어로물 <제시카 존스>(2015~)는 새로 공개된 13편의 에피소드 모두 여성 감독에게 연출을 맡겼다는 소식으로 화제가 됐다. 누군가에겐 신나는 소식이겠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참 서글픈 일이다. 드라마나 영화의 제작진이 전부 남성으로 가득 채워지던 시절 그에 대해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거나 흥미롭다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다는 걸 생각해보라. 감독 전원이 남성인 건 화젯거리가 될 까닭 없이 당연한 일이지만 감독 전원이 여성인 건 어찌나 드문 일인지 그 자체로 화제가 되고 셀링 포인트가 된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멕시코 출신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가 <셰이프 오브 워터>(2017)로 작품상과 연출상을 수상한 게 화제가 되고, 핵심인물 전원이 흑인인 슈퍼 히어로 영화 <블랙 팬서>(2018)가 박스오피스에서 돌풍을 불러일으키는 게 화제가 되고, 펜타곤 페이퍼를 보도하기 위한 워싱턴포스트 사람들의 고군분투를 다루며 남성 저널리스트가 아닌 여성 사주의 관점을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한 <더 포스트>(2017)의 성취가 화제가 된다. 신나는 동시에 서글픈 일이다. 신나는 기분을 서글픈 자각이 덮어버리려 할 때마다 미국의 코미디언 티나 페이가 2010년 마크 트웨인 상을 받으며 남긴 수상 소감을 다시 떠올리려 한다. “저는 이 상을 수상한 사상 세번째 여성이 됐습니다. 릴리 톰린과 우피 골드버그에 이어 이름을 올리게 되어 영광입니다만, 하루빨리 여성이 더 많은 성취를 거둬 몇번째 여성인지 세는 일을 그만두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날의 새벽으로 진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더 많은 여성 작가와 감독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성소수자를 농담거리로 삼는 이성애자들의 농담 대신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성소수자들이 새로운 물결을 이루고,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이들 대신 이민자들과 핍박받던 인종이 마침내 당당하게 함께 서는 그날의 새벽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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