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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아동학대’ 소녀 구하려 ‘유괴’ 결심…정서경표 잔혹동화

등록 2018-02-03 10:19수정 2018-02-03 13:58

티브이엔 드라마 <마더>의 한 장면. 작가 정서경은 이 작품에 대해 “주인공 아이의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바라보려는 노력이 내가 연대감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티브이엔 제공
티브이엔 드라마 <마더>의 한 장면. 작가 정서경은 이 작품에 대해 “주인공 아이의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바라보려는 노력이 내가 연대감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티브이엔 제공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마더> 정서경 작가의 잔혹동화
* 티브이엔(tvN) 드라마 <마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영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이들이 아닌 이상에야 영화의 각본집이 출간되길 기다리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 많지 않은 리스트 중에 박찬욱의 영화 <아가씨>(2016)가 있었다. 열광적인 팬들의 요청으로 2016년 8월 <아가씨>의 대본을 출간한 박찬욱은, 여세를 몰아 그때까지 정서경 작가와 함께 작업한 영화들의 대본집을 모두 출간했다. <친절한 금자씨>(2005),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 <박쥐>(2009)에 이르기까지. 할리우드에서 연출한 <스토커>(2013)를 빼고 나면 박찬욱의 후기 작품들은 전부 정서경과의 공동작업물이다. 영화의 팬들은 대본집에 환호하면서도 박찬욱이 작업한 부분과 정서경이 작업한 부분이 어떻게 다른지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을 못내 아쉬워했다. 같은 컴퓨터를 두고 각자 모니터와 키보드 한 쌍을 끼고 마주 앉아 같은 대본을 동시에 작업하기도 했다는 두 사람의 작업 스타일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칼같이 구분 짓는 것은 불가능했을 테지만.

박찬욱이라는 ‘상수’를 뺀 세계

정서경에게도 상황은 비슷하다. 그의 작업물 중 세상에 공개된 작업은 대부분 박찬욱과 함께 한 작품들이다. 남선호 감독의 영화 <모두들, 괜찮아요?>(2006)는 남선호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에 가까웠고, 임필성 감독이 10년 가까이 공을 들이고 있는 야심작 <악의 꽃>과 이해영 감독이 제작 중인 영화 <독전>은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다. 박찬욱과 함께 작가로 참여한 이경미 감독의 영화 <비밀은 없다>(2015)까지 셈하면, 극장에 걸려 관객을 만난 장편 상업영화 6편 중 5편이 박찬욱과의 협업이었다. 많은 이들이 정서경의 첫 티브이 드라마인 티브이엔 <마더>(2018)를 기다린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동명의 일본 원작(일본 니혼티브이, 2010년)의 존재를 감안하더라도, <마더>는 박찬욱이라는 상수를 뺀 정서경만의 세계는 어떤 모습인지 조심스레 살펴볼 수 있는 창구일 것이기 때문이다. <마더> 제작발표회 현장에서 7년 만에 드라마로 복귀한 이유를 묻는 질문을 받은 이혜영이 정서경에 대한 기대감을 꼽은 것 또한 비슷한 맥락이었으리라.

4부까지 방영된 지금, <마더>는 원작이 이미 이뤄 놓은 세계의 디테일을 존중한다. 가정을 이루고 사는 걸 두려워하던 주인공이 임시직 교사로 부임한 학교에서 심각한 아동학대를 당하고 있는 소녀를 발견해 갈등하다가 소녀의 엄마가 되어 주기로 결심하고 유괴한다는 중심 줄거리뿐 아니라, 소녀가 제 가정에서 당하는 학대의 내용이나 주인공의 원래 직업이 조류학자라는 설정 또한 고스란히 가져왔다. 그러나 정서경은 동시에 원작의 세계를 조심스레 확장한다. 원작의 주인공은 소녀와 화장실에 갔다가 짐을 도둑맞아 도피자금을 잃어버리지만, 정서경 판 <마더>의 수진(이보영)은 혜나(허율)와 함께 나라를 떠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위조 여권을 만들어 주겠다는 라 여사(서이숙)의 제안을 받고 돈을 건넸다가 그 돈을 떼인다. 따뜻한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장인 줄 알았던 라 여사의 얼굴은 “애기 엄마가 불필요한 걸 알면 나중에 곤란해질 수 있다”며 두 사람의 눈을 가린 채 허름한 건물의 어두컴컴한 계단으로 이끄는 브로커의 얼굴로 돌변한다. 원작의 주인공이 겪은 불행이 냉정하게 지나가는 짧은 ‘우연’의 형태로 찾아오는 반면, 수진이 겪는 불행은 난관을 헤쳐 나가는 ‘여정’의 일부로 찾아온다.

박찬욱과 공동작업해온 정서경 작가
첫 드라마 <마더>로 제 색깔 펼쳐
학대받는 소녀의 엄마가 된 교사
고난을 가로지르는 갈지자 여정

<친절한 금자씨>, <아가씨> 등
필모그래피 통해 꾸준히 보여준
약자가 서로를 구원하는 연대
고난을 관통하는 ‘정서경표’ 서사

정서경의 전작들에서 이와 같은 ‘여정’의 흔적을 찾아보는 건 어렵지 않다.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복수를 하기 위해 효율성과는 거리가 먼 여정을 걸으며 때로는 불필요한 위험에 처하기도 하는 <친절한 금자씨> 속 금자(이영애)가 그랬고, 딸의 죽음과 연관된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자신이 전혀 모르던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 가히 몽환적인 여정을 경험하는 <비밀은 없다> 속 연홍(손예진)이 그랬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다가 ‘핵폭탄이 되어 세상을 파괴한다’는 사명을 깨닫고 그것을 이해해주는 일순(정지훈)을 만나 폭우가 쏟아지는 벌판에 도착하기까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영군(임수정)이 겪는 여정이 그랬고, 뱀파이어가 되기 전 자신을 옥죄는 갑갑한 세상에 맞서 매일 밤 맨발로 골목을 전력질주했던 <박쥐>의 태주(김옥빈)가 그랬다. 정서경의 세계에서 주인공들이 가만히 제자리에서 고난을 맞이하고 그 자리에서 그 고난을 극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서경의 주인공들은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끊임없이 질주하고, 카이를 구하기 위해 온갖 역경을 디디며 길을 걷는 <눈의 여왕> 속 게르다를 연상시키는 그 갈지자 여정을 통해 비로소 성장한다.

실제로 박찬욱이 정서경의 장점으로 든 것은 ‘동화적 상상력’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아는 것처럼, 동화는 은유를 통해 현실세계의 잔혹함을 이해해 보기 위해 고안된 문학이다. 오래된 동화는 결국 가혹한 운명과 잔인한 세상의 실상, 그리고 그런 세상에 맞서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를 상징하지 않던가? 정서경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재학 시절 코닥-이스트만 단편영화 제작 지원에 출품해 만든 단편 <전기공들>(2003)을 보자. 은희(이효신)는 어느 날 갑자기 부른 적도 없는 전기공들이 찾아와 제 집을 헤집어 놓는 황당한 일을 겪는다. 아무 문제 없이 잘 살았다는 은희의 말에, 전기공들은 벽 안에서 배선 무더기를 끄집어 내며 “여기 이 부분 때문에 이 지역 전역이 전력에 문제를 겪었는데 문제가 없다는 거냐”고 따져 되묻는다. 은희는 제 안온한 일상이 망가지는 게 어쩐지 다 전기공들 탓인 것만 같다. 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걸 반복하는 허름한 제 집의 상태도, 동거 중인 남자친구 종수(장재용)와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도. 물론 거주자의 동의도 없이 함부로 집에 쳐들어와 공사를 하는 전기공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은희는 전기공들이라는 환상의 존재를 소환해 제 삶이 부서져 내리는 광경을 합리화한다. 종수가 자신을 완전히 떠난 후에야, 은희의 상상 속 전기공들도 공사를 마치고 은희를 떠난다. 정서경은 서정적이고도 비일상적인 동화적 상상력을 통해, 주인공을 둘러싼 세계의 야만과 그를 헤쳐내는 여정을 은유한다.

세계의 폭력을 극복하는 동화적 연대

동화로 은유된 세계의 폭력을 통과하는 노정에 오른 주인공. <마더>를 설명하는 정서경의 말 또한 그와 일맥상통한다. <마더>의 제작발표회 현장에서 작품 속 아동학대 묘사 수위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질문이 나오자 정서경은 이렇게 답했다. “작은 아이가 느끼는 공포와 수치감, 그리고 고통을 시청자들과 함께 통과하고 싶었다. 고통스러운 세계에서 탈출하고 싶은 바로 그 아이가 되어 같이 손을 잡고 나가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 아이가 고통받는 장면에 눈 돌리지 않고 끝까지 바라보려고 하는 노력이 내가 연대감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정서경은 그러한 고통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냥 인지하고 넘어가지 않는다. 그에겐 고통의 세계를 피해자와 함께 ‘통과’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같은 자리에서 정서경은 이 작품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두 개의 여정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한 사람의 마음에서 엄마가 태어나는 순간이 실제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처럼 감동적이고 고통스럽다는 점에 집중”했다는 전반부와, “우리가 구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작고 약한 아이가 점점 성장하고 강해져 결국 자신보다 크고 사나운 것을 이기고 만다는 이야기”의 후반부. 그러니까 <마더>는 혜나를 구원하기 위해 마음속에서 엄마라는 싹을 고통스레 피워 올리는 주인공 수진의 여정이자, 그렇게 구원받은 혜나가 성장해 수진을 구원하고 세계의 폭력을 이겨내는 여정이다.

마치 정서경의 전작 <아가씨>가 갇혀 있던 히데코(김민희)를 숙희(김태리)가 구원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숙희에게 지켜내고 싶은 단 하나의 존재를 줌으로써 히데코가 숙희를 구원하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처럼, <마더> 또한 수진과 혜나가 세계의 폭력으로부터 서로를 구원해내는 정서경의 동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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