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이는 2015년 방송을 그만둘 것을 고민하는 김숙을 붙잡고 “우리가 직접 하고 싶은 방송을 하자”며 팟캐스트 <비밀보장>을 시작했다. 이후 그가 유튜브 등 외곽에서 기획한 콘텐츠들은 방송계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에프엔씨엔터테인먼트, 비보티비 제공
도대체 숨 쉴 틈이 있긴 있는 걸까. 2018년 1월의 송은이는 정말 브레이크라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달린다. 10회 한정으로 시작한 한국방송 <김생민의 영수증 확장판> 1시즌은 동시간대 초장수 프로그램인 문화방송 <신비한 티브이 서프라이즈>를 위협할 정도의 시청률을 거두는 중이고, 김숙과 함께 진행 중인 팟캐스트 <비밀보장>과 에스비에스 라디오 <언니네 라디오>도 흔들림 없이 순항 중이다.
그뿐이랴. 김숙과 함께 결성한 팀 ‘더블 브이’의 명의로 발표한 노래 ‘3도’를 들고 엠비시에브리원 <주간 아이돌>에 나가는 기염을 토하는 동시에, 유튜브에 공개한 비보티비의 새 웹예능 <판벌려>를 통해 결성한 댄스 퍼포먼스 팀 ‘셀럽파이브’로는 엠비시뮤직 <쇼 챔피언>의 오프닝 무대를 열었다. <쇼 챔피언> 섭외 소식을 전하는 김신영에게 정색하며 “새해면 언니가 마흔여섯이야”라고 말하긴 했어도 막상 판이 깔리면 송은이는 몸을 사리지 않고 모든 걸 불사른다. <주간 아이돌>에선 가지고 있던 개인기를 쉴 틈 없이 쏟아내고, <쇼 챔피언>의 오프닝으로 소셜네트워크를 점령했다. 지금 이 순간 한국에서 송은이만큼 2018년을 힘차게 시작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관찰력과 기획력의 ‘명민’한 하모니
인기 있는 연예인들에게 일이 정신없이 몰리는 건 흔한 일이다. 밀려드는 섭외에, 겹치기 출연에, 끊임없이 광고를 찍으며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연예인들이야 자주 보는 광경이니까. 그러나 송은이의 2018년이 정말 대단한 건 이 모든 게 누가 판을 깔아줘서 생긴 일이 아니라 직접 판을 벌려 만들어 낸 일이라는 점이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언제 봐도 경이로운 행보이니만큼 송은이가 걸어온 지난 몇년을 잠시 되돌아보자. 자신과 김숙 모두 뚜렷한 이유 없이 일이 줄어들 무렵 송은이는 방송을 그만둘 것을 고민하는 김숙을 붙잡고 “우리가 직접 하고 싶은 방송을 하자”며 팟캐스트 <비밀보장>을 시작했다. 에스비에스가 <언니네 라디오>를 제안한 건 <비밀보장>이 돌풍을 일으켜 각종 언론이 주목한 이후의 일이다. <김생민의 영수증>도 마찬가지다. 코미디언으로서의 가능성을 내심 포기했던 김생민에게서 재테크의 화신이라는 캐릭터를 뽑아내어 팟캐스트 <김생민의 영수증>을 기획해 <비밀보장>에 버금가는 성공을 거뒀기에 그 포맷을 고스란히 들고 한국방송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주간 아이돌>, <쇼 챔피언> 섭외도 모두 밖에서 성과를 만들어낸 후 방송사의 초대를 받아낸 사례다. 유병재처럼 애초에 아마추어 동영상의 인기로 화제를 모아 방송에 진출한 사례는 있었어도 90년대 공채 시스템을 통해 방송에 데뷔한 정통 코미디언이 이렇게 제 가치를 다시 증명해낸 사례는 송은이가 처음이다.
송은이, 지난해부터 방송계 블루칩
남성 위주로 돌아가던 기존 예능판
‘일자리’ 잃은 여성 예능인들 토로에
직접 콘텐츠 제작해 돌파구 마련
<비밀보장> <김생민의 영수증> 등
큰 인기 끌며 지상파로 ‘역진출’
김숙·이승신 등 여성 예능인 재발견도
예능계 판도 바꿔낸 힘은 관찰력
송은이는 다시 지상파 채널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지점에서 만족하지 않고 <비밀보장>이라는 브랜드를 키워 스스로 콘텐츠를 기획, 제작해 유통하는 회사 ‘컨텐츠랩 비보’를 차렸다. <비밀보장>과 <김생민의 영수증>의 압도적인 성공에 가려 종종 간과되지만, 유튜브에서 회당 10만~20만뷰를 기록한 비보티비 웹예능 <쇼핑왕 누이> 또한 컨텐츠랩 비보의 성취다. 지상파가 몰라보고 있던 시절, 김숙과 김생민의 진가를 발견해 다시금 화제의 중심으로 밀어 넣은 것 역시 송은이의 관찰력과 기획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일본 도미오카고등학교 댄스부의 공연에 꽂힌 김신영이 다른 누구도 아닌 송은이에게 찾아가서 함께 일을 벌이자고 이야기한 것도, 그래서 차근차근 김영희, 신봉선, 안영미라는 멤버 라인업을 꾸려 팀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컨텐츠랩 비보라는 안정적인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될 만한 기획을 찾아 인터넷의 문법에 맞게 다듬고 자신의 광범위한 인맥 중 그 기획에 가장 잘 맞을 만한 사람을 선별해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어 성공시킬 수 있는 명민한 기획자. 2015년 4월 처음 <비밀보장>을 시작한 이후 고작 2년8개월 만에 송은이는 여기까지 왔다.
송은이는 2015년 방송을 그만둘 것을 고민하는 김숙을 붙잡고 “우리가 직접 하고 싶은 방송을 하자”며 팟캐스트 <비밀보장>을 시작했다. 이후 그가 유튜브 등 외곽에서 기획한 콘텐츠들은 방송계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에프엔씨엔터테인먼트, 비보티비 제공
한편에서 찬사가 이어지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김생민의 영수증>에 ‘공감요정’의 자격으로 초대되는 게스트들이 대부분 송은이나 김숙의 지인이라는 점을 짚어 “방송에서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냐”고 묻는 이들도 있고, 김숙과 김생민 모두 전에 없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 게 아니라 원래 잘하고 있던 걸 조금 더 돋보이게 포장해준 것에 지나지 않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다. 새로 시작한 <판벌려>의 인적 구성을 보며 “김영희만 제외하면 예전에 엠비시에브리원에서 하던 <무한걸스> 멤버들 그대로 아니냐”며 컨텐츠랩 비보가 대단히 새로운 걸 하고 있는 건 아니라고 지적하는 이도 있다. 사실 그들의 지적이 크게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다시 되물어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원래 이렇게 잘하는 사람들인 걸 알고 있으면, 왜 방송사에서는 이들에게 먼저 이런 기획을 제안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무한걸스>는 아직도 인터넷에 그 영상이 ‘레전드’라는 수식어를 달고 돌아다니는 전설적인 예능이고, 유재석이 ‘또라이’라고 칭했던 김숙과 ‘재테크의 달인’ 김생민 또한 그 캐릭터가 익히 알려져 있는 사람들이었다. 눈앞에 뻔히 있는 이들의 재능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선보인 게 바로 기획자 송은이의 힘이다.
자력으로 살아남은 여성 예능인
인맥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얘기는 한층 더 이상해진다. 송은이와 김숙의 지인으로 <김생민의 영수증>에 출연한 이들 중 누구 하나 못 웃기고 간 사람이 있긴 하던가. 누가 뭐라고 해도 팬질에 쓰는 돈은 아깝지 않음을 설파하던 박지선이나, 김숙보다 한 수 위인 소비 패턴과 합리화를 자랑한 이승신의 캐릭터는 소셜네트워크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유재석이 자신과 성향이 잘 맞는 이들을 발굴해 프로그램을 함께 하며 소위 ‘유라인’을 키워갈 때에도, 강호동이 ‘강라인’을 이끌고 이경규가 ‘규라인’을 자랑할 때에도 별로 나온 적 없었던 ‘친목 도모’라는 지적이 그간 방송이 미처 조망하지 못했던 여성 예능인 캐릭터들에 광을 내어 전시 중인 송은이에게 간다는 건 민망한 노릇 아닌가. 오히려 송은이의 라인을 타고 우리 시야에서 잠시 사라졌던 수많은 여성 예능인들이 멋지게 재등장할 수 있다면 방송이 더 풍성하고 새로워져서 좋은 일 아닐까?
2016년에서 2017년에 이르는 동안, 우리는 몇년간 싹이 말랐던 티브이 여성 예능이 마침내 부활하는 것이냐는 낙관적인 전망을 했다. 한국방송 <언니들의 슬램덩크>와 <하숙집 딸들>, 올리브의 <뜨거운 사이다>와 <바디 액츄얼리>, 엠비시에브리원 <비디오스타>, 그리고 모처럼 방송에서 이분법적 성 구분을 뛰어넘은 다양한 젠더의 목소리가 발언권을 얻었던 교육방송 <까칠남녀>까지 쏟아져 나오는 걸 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2018년 1월 현재 이 중 명맥을 유지하고 살아남은 프로그램은 <비디오스타> 정도가 전부다.(<까칠남녀>는 시즌1 종영 2회분을 남겨둔 상황에서 책임 프로듀서가 고정 패널인 은하선 작가에게 하차를 요구해 논란이 되고 있다. 책임 프로듀서의 해명과 달리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세력의 시위에 교육방송이 사실상 굴복한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방송에서 생리컵이나 여성의 자위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이유만으로 ‘음란하다’는 소리를 듣거나, 여성의 목소리만 대변해서 문제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성 예능들은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다시 처음부터 여성 예능 부활의 2라운드를 써내려 가야 하는 이 시기, 지금 가장 명민한 콘텐츠 기획자인 송은이의 활약에 주목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다행히 송은이는 마치 살면서 단 한번도 ‘멈춰’라는 말을 배워본 적 없는 사람처럼 달리고 있다. 다른 누가 판을 깔아주길 기다리는 대신, 자신과 동료들이 걸을 꽃길을 손수 깔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