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하필 장르드라마를 쓰는 걸까요.”
범죄수사드라마, 이른바 ‘장르물’ 작가들은 오랫동안 푸대접을 받았다. 시청률이 안 나온다고 방송사들이 편성에 인색했던 탓이다.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는 일본이나 중국 판매도 어려웠다. 형사가 줄창 범인만 쫓으니 고급차를 탈 일도, 풍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여행을 갈 일도 없어 간접광고협찬(피피엘)을 받기도 힘들었다. 주인공들이 의기투합하는 장소도 기껏해야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는 허름한 고깃집. 한마디로 돈이 안 되는 장르였다고 할까?
그랬던 장르드라마가 최근 인기 콘텐츠로 떠오르며 화제의 중심에 섰다. 지난해 평균시청률 8%를 기록한 <시그널>(티브이엔)에서 폭발한 열기는 올해 <보이스>(오시엔, 4%)와 <터널>(오시엔, 5%)로 이어졌다. 케이블에서 평균시청률 5~8%의 영향력은 지상파의 20~30%와 맞먹는다. 지상파와 케이블 통틀어 방영 중이거나 방영 예정인 작품은 지난해에 견줘 갑절이 느는 등 제작도 활발하다. 3일 시작한, 복제인간을 다룬 <듀얼>(오시엔)처럼 소재도 다양해졌고, 10일 시작하는 <비밀의 숲>(티브이엔)에는 조승우와 배두나가 나오는 등 톱스타들도 발걸음한다.
2009년 방영된 <오시엔>(OCN)의 ‘조선추리활극 정약용’. 이 작품을 시작으로 <오시엔>은 본격적으로 장르물을 제작해왔다. <오시엔> 제공
장르드라마가 티브이의 핵심 콘텐츠로 떠오른 중심에는 <오시엔>이 있다. 요즘 화제를 모은 장르드라마는 대부분 <오시엔>에서 제작했다. 13년간 장르물에 집중하며 사실상 지금의 판을 깔았다. 1995년 영화전문채널로 시작한 <오시엔>은 2004년부터 자체제작을 시작했다. 공포물(<코마>)과 19금 선정물(<동상이몽>)로 출발해, 2009년 <조선추리활극 정약용>부터 범죄수사물을 만들었다. 2011년 3편(<신의 퀴즈 시즌2>, <뱀파이어 검사>, <특수사건전담반>)에서 2014년 5편(<처용>, <신의 퀴즈 시즌4>, <리셋>, <나쁜 녀석들>, <닥터 프로스트>)에 이어 올해 6편으로 제작 편수도 꾸준히 늘었다. 조율기 <오시엔> 마케팅팀장은 “2000년대 초중반 미국드라마에 관심 많던 시청자들이 30~40대가 되면서 장르물에 대한 수용도나 관심도가 높아졌다”며 “특히 우리 채널을 즐겨 보는 시청자들 중 <시에스아이> 등 ‘미드’ 장르물 팬이 많고, 영화채널이라는 특성에도 맞다고 생각해 (장르물 개발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오시엔의 주요 시청층은 25~49살이다.
초창기에는 미국드라마에 눈 높아진 마니아들을 사로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노하우가 없어 미국드라마를 어설프게 흉내내 내용도 연출도 ‘아마추어’라는 핀잔도 들었다. 하지만 포기하는 대신 ‘과감한 투자’를 선택했다. 조율기 팀장은 “장르드라마는 노하우를 쌓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 성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꾸준히 투자를 했다. 2013년과 2017년 편당 제작비를 비교하면 갑절 이상 늘었다”고 밝혔다. 장르드라마는 소품 하나도 허투루 나오지 않는데다, 촬영 시간도 오래 걸려 돈이 많이 든다. 투자한다고 바로 시청률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오시엔> 자체 제작 장르물은 2009년부터 조금씩 적자 폭을 줄이고 있다. 특히 올해는 <보이스>가 엄청난 화제를 모으면서 후속작인 <터널>에도 기대가 쏠렸는데, <터널>이 이 기대에 부응하면서 손익분기점에 가까운 성적을 낸 것으로 알려진다. 이 기세가 지속돼 <듀얼>이 성공하면 처음으로 <오시엔> 장르드라마에서 수익을 낼 것인지도 관심거리다. 지상파의 한 드라마 피디는 “적자를 보는데도 지속적으로 투자하는 것은 방송사가 확고한 의지가 있다는 것이고, 그 의지가 ‘장르=오시엔’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오시엔> 장르드라마 ‘나쁜 녀석들’ <오시엔> 제공
그동안 한국에서 장르드라마가 활발하지 않았던 이유에는 부족한 인력풀도 있다. 장르드라마를 잘 쓰는 작가나 잘 만드는 연출자가 별로 없었다. <오시엔>은 한국의 현실에 맞는 전략으로 이런 단점을 깼다. 서툴렀던 초창기에는 <시에스아이>를 벤치마킹해 10부작 등 짧은 시리즈로 내보냈다. 당시는 10부작이 생소했던 시절이라 도전하는 작가가 흔치 않았다. 자기 작품을 <오시엔>에서 편성받지 못하면 다른 방송사를 찾아 제안해야 하는데, 10부작을 내보내는 방송사 자체가 별로 없었던 탓이다. 조율기 팀장은 “2015년 <아름다운 나의 신부>를 시작으로 16부작 미니시리즈 형태를 갖추면서 <오시엔>이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서 방영할 수 있다는 생각을 작가들에게 심어줬다. 그러면서 작가들이 장르드라마에 도전을 더 많이 했고, 결과적으로 작가풀을 좀더 확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적절한 인재 활용은 작품이 거듭될수록 진화해왔다. 신용휘 피디는 <갑동이>(2014년)와 <나쁜 녀석들>(2014년) 연출진으로 노하우를 익힌 뒤 <터널>로 입봉했다. 한정훈 작가는 2011년과 2012년 <뱀파이어 검사> 시즌 1~2를 거쳐 <나쁜 녀석들>, <38사기동대>(2016년)로 창작을 이어갔다.
누가 범인일까를 두고 ‘떡밥’을 던지는 게 시청자를 끌어들이는 거의 유일한 작전이었던 극 구성도 달라졌다. <보이스>와 <터널>에서 봤듯, 매회 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이 잡히면서 시원시원하게 전개된다. 노하우가 쌓이면서 타임슬립에서 복제인간까지 소재도 풍부해졌다. 만듦새가 좋아지고 볼거리가 다양해지자 채널 전체 시청률도 꾸준히 오르고 있다.
<에스비에스>(SBS)에서 제작한 장르물 ‘신의 선물-14일’은 미국 지상파 <에이비시>(ABC)에서 리메이크해 7월 방영한다. <에스비에스> 제공
장르드라마 열풍은 지상파까지 번졌다. 올해 상반기에만 3사 통틀어 3개 작품(정통 장르물 기준)이 방송됐다. 지난해 전체 1편보다 많다. 사드의 영향으로 중국 수출이 막히면서 로맨틱 코미디의 수요가 줄어든 것도 이 흐름에 힘을 보탰다. 새로운 활로로 찾은 미국 등이 장르물의 본고장으로, 이런 드라마에 관심이 크기 때문이다. 한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는 “최근의 장르드라마 열풍은 한류 시장의 다변화와도 관련 있다. 전반적으로 시청률이 떨어진 상황에서 한국 시장 매출보다 수출 비중이 점점 더 커지는데, 막혀버린 중국 대신 이제는 미국이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른다. 장르물 개발이 활발해진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신의 선물-14일>(에스비에스, 2014년)은 미국 지상파 <에이비시>(ABC)에서 <섬웨어 비트윈>이라는 제목의 10부작 시리즈로 리메이크되어 7월에 방송될 예정이다. 오시엔도 <보이스>와 <터널>, <듀얼>의 방영권을 미주지역 등에 판매했다.
복제인간을 소재로 내세운 <오시엔> 장르드라마 <듀얼>. <오시엔> 제공.
그러나 장르드라마의 약진이 계속될 것인가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중국 시장이 다시 뚫리면 지상파가 로맨틱 코미디로 돌아설 것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사건이 발생하고 범인을 쫓는 드라마가 잇따라 방영돼 시청자들이 기시감과 피로감을 느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오시엔은 이런 단점을 보완하려고 기획안부터 대본 검토까지 모든 과정을 체계적으로 담당하는, 4명으로 구성된 전담인력팀을 올해 초 따로 만들었다. 새로운 대본을 발굴하고, 어떻게 수정할 것인지부터 편성 여부까지를 심도 깊게 논의한다. 조율기 팀장은 “지난해까지는 차기 제작 작품을 그때그때 결정했다면, 올해는 라인업 전체를 지난해에 결정했다. 체계적인 준비로 만듦새 좋은 결과물을 내놓아 장르드라마의 대중화를 안착시킬 것이다”라고 말했다. <듀얼> 이후에는 사이비 종교 스릴러인 <구해줘>, <나쁜 녀석들 시즌2>와 제목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다음 작품의 방송이 결정돼 있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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