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신랄한 정치풍자가 시작된 <에스엔엘 코리아 시즌9>. 티브이엔 제공
9년 만에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한 지난 18일. <한국방송(KBS) 2라디오>(106.1㎒) 프로그램들의 선곡도 특별했다. 오전 11시 <이정민의 음악이 있는 풍경>, 낮 12시10분 <임백천의 라디오 7080>, 오후 2시 <행복한 두시 조성모입니다>까지 연이어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왔다. 영화 <화려한 휴가> 테마곡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 서영은 등 다양한 버전이 등장했다. 지난해 같은 날 106.1㎒를 기준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았다. 공식적인 금지곡은 아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사실상 금지곡 취급을 받은 노래인 탓에 피디들이 선곡하기 부담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한국방송> 관계자는 “올해는 방송사 내부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들려줘 5·18의 취지를 잘 살렸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다”고 말했다.
극중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인 장판수(왼쪽)와 그의 아들 장민재. 문화방송 제공
열흘 남짓 지났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많은 것이 달라지고 있다. 그 변화가 라디오·텔레비전에서도 읽힌다.
오늘날 모든 문제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않은 데서 비롯됐다고 외치는 드라마가 등장했다. <문화방송>(MBC)이 13일 시작한 주말드라마 <도둑놈, 도둑님>은 독립운동가 후손과 친일파 후손의 대비되는 현실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부조리한 민낯을 비춘다. 친일 부역자는 일제가 망해갈 즈음 우리나라 보물을 독식하려 한다. 이를 알게 된 독립운동가로 구성된 ‘의열단’은 보물을 훔쳐 숨겨놓고 지도를 세 장으로 나눠 갖는다. 재벌이 된 친일 후손이 그 보물을 찾으려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찾아내 살해하는 등 괴롭히는 이야기다.
드라마에서, 그것도 온 가족이 함께 보는 주말드라마에서 친일 청산의 메시지를 깔아놓는 것은 이례적이다. 이 드라마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전인 지난해 5월부터 기획했고, 9월 편성이 확정됐다. 12월께 시놉시스가 나왔다. 제작사인 메이퀸픽처스 관계자는 “정권교체와 관계없이 진행됐다”고 하지만, 서슬퍼런 권력의 시대였다면 방영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선영 대중문화평론가는 “박근혜 정부 시절 역사 교과서를 통해 역사를 왜곡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점에서, 친일파에 대해 제대로 된 사실을 전달하려는 시도는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드라마에는 친일 후손 홍일권(장광)이 일제 부역자 신분을 세탁하거나, 독립운동가 후손 장판수(안길강)가 “할아버지는 뭐 하러 독립운동 같은 걸 해서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그깟 나라가 뭔데”라며 소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친일파 후손은 잘살고 독립운동가 후손은 가난한, 불합리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담은 설정 등이 폐부를 찌른다.
다시 신랄한 정치풍자가 시작된 <에스엔엘 코리아 시즌9>. 티브이엔 제공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만큼 탄압받았던 정치풍자가 되살아나는 것도 바뀐 세상을 체감하게 한다. 문재인 정부가 시작된 주인 13일 방영된 <에스엔엘 코리아 시즌9>은 지난 정권에서 꽁꽁 묶여 있었던 정치풍자 특집이나 다름없었다. 분장수석 고국, 비주얼실장 임종서, 경호실장 김경호, 대통령 문재수 등 패러디 인물들을 오프닝에 내세웠다. “웃음이, 웃음을, 웃음으로 통하는 에스엔엘을 꼭 만들겠다”며 그동안 받은 설움을 토해내겠다는 듯 비장한 각오로 시작했다. 떨어진 후보들의 소회를 노래로 패러디도 했다. 문 대통령이 후보였던 당시 자신을 패러디하는 문재수(김민교)를 만나 “정치가 개그의 소재가 되는 게 참 좋다”고 말하는 영상이 등장해 수많은 개그맨들은 “세상이 변했다”고 환호했다. 신동엽은 이날 방송에서 “정치가 개그 소재가 되는 게 좋다는 그 한마디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선영 평론가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블랙리스트 파문 같은 대중문화 탄압을 둘러싼 논란이 일었던 것과 달리, 새 정부 들어 표현할 수 있는 수위가 높아진 것을 피부로 느낀다”며 “이것은 예고편으로, 앞으로 더 다양하고 자유로운 문화콘텐츠가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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