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모성애와 부성애는 위대하다지만, 이건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방영 중인 가족드라마의 상당수가 부모의 사랑을 강조하려고 이야기를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간다. 자식을 위해 사람을 ‘도구’로 이용하는 잔인한 설정이 등장하는가 하면, 신분세탁 같은 범죄도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다.
일일드라마 <이름 없는 여자>(한국방송2)는 백혈병인 아들을 살리려고 다른 아이를 그저 ‘골수 공여자’로 취급하는 등 생명을 경시한다. 재벌가 안주인 홍지원(배종옥)은 아들 구해성(주승혁)이 백혈병을 앓자, 골수가 맞는 운전기사의 딸 손여리(오지은)를 입양한다. 가족이 되면 골수 이식이 손쉬울 거라는 계산에서다. 손여리를 입양하려고 운전기사가 교통사고로 죽어가는 걸 모른 척하고, 손여리가 골수 이식을 거부하자 감금까지 한다. 아들의 백혈병 재발 소식을 들은 홍지원의 대사는 섬뜩하다. “우리에겐 손여리가 있잖아.” 그런데 알고 보면 손여리는 홍지원의 친딸이다.
말로만 듣던 신분세탁도 드라마에서는 부성애를 강조하는 용도로 버젓이 활용된다. 주말드라마 <아버지가 이상해>(한국방송2)에서 이윤석(김영철)은 죽은 친구의 이름인 변한수로 신분을 세탁하고 산다. 젊은 시절 누명으로 살인자 낙인이 찍힌 뒤 취업도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친구와 이민 가서 새 생활을 시작했지만 변한수가 사고로 죽고, 마침 여자친구가 임신을 하자 “아이를 위해서”라며 변한수로 살기로 결심하면서 부부는 비밀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주말드라마 <언니는 살아있다>(에스비에스)는 김은향(오윤아)의 남편 추태수(박광현)에 대한 복수심을 증폭시키기 위해 불이 나서 아이가 죽는 설정을 차용했다. 김은향이 돌아올 때까지 아이와 있어주기로 했던 추태수가 불륜녀와 여행 가려고 아이를 억지로 재운 뒤 집을 나온다. 아이는 뒤척이다가 불이 켜진 초를 건드리고 집은 불에 탄다. 아이가 불길 속에서 엄마를 찾으며 우는 모습은, 현실의 숱한 사건들이 떠올라 드라마일 뿐이라며 그냥 넘기지 못하게 만든다.
<이름 없는 여자> 김명욱 피디는 지난달 20일 제작발표회에서 “자식을 지키기 위한 모성애가 아름다울 수 있지만 한없이 잔인하고 이기적일 수도 있다. 모성애의 두 가지 얼굴을 보여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내면을 섬세하게 다루기보다 자극적인 상황을 연속해서 보여주는 데 더 공을 들여 시청률을 높이려 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한 케이블 방송사 피디는 “대부분의 가족드라마는 출생의 비밀과 복수, 결혼 이야기로 뻔하다. 치열한 경쟁에서 눈도장을 찍으려면 그 과정이 더 극단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 <마더> 등 이기적인 모성애를 다룬 작품은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스릴러, 액션 등 장르물에 주로 등장했던 비현실적 설정들이 온 가족이 보는 티브이 가족드라마에까지 등장함으로써 시청자들에게 왜곡된 가족상을 심어줄 우려가 크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이런 심각한 문제들을 (드라마의) 일상 공간 속으로 가져왔으면, 대사나 상황 등을 통해 깊이 있는 고민과 논쟁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그저 아이 때문에 그랬다는 식으로만 다루는 건 문제”라며 “남의 아이를 도구적으로 사용해 내 아이를 살리려는 배타적인 모성애로 몰아가면 일종의 모성 혐오를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아버지가 이상해>가 시청률 30%를 넘는 등 가족드라마의 파급력과 그 존재 목적을 생각할 때 “극한상황에서 인간적 갈등 같은 내면의 문제를 섬세하게 그려나가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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