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종영한 드라마 <완벽한 아내>에서 물오른 연기를 선보인 조여정. 크다컴퍼니 제공
“캐릭터에서 미련 없이 빠져나왔어요.” 4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조여정은 의외의 말을 했다. 그는 2일 종영한 드라마 <완벽한 아내>(한국방송2)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사랑해준 ‘구정희’(윤상현)에게 집착하는 여자 ‘이은희’를 제 옷 입은 듯 소화해냈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눈빛, 미소 등의 미세한 변화로 안정과 집착의 경계를 오가며 불안정한 심리를 표현했다. 평균 시청률은 5%(닐슨코리아 집계)로 저조했지만, 조여정의 연기력은 물이 올랐다는 호평이 쏟아진다. 그래서 배우로서 가치를 빛내준 이은희에게 ‘집착’할 줄 알았더니 웬걸 너무 쿨하다. “힘들었거든요. 정신적으로 피폐했어요. 잘하고 싶은데 너무 어려워서.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아 은희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캐릭터 분석이 안 끝난 채 잠이 들면, 현장에서 슛을 받고 발을 동동 구르는 꿈까지 꿨어요.” 그러나 “나와 너무 달라서, 이 여자가 벌이는 일들이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나와 다른 사람, 할 수 없을 것 같은 인물에 도전하는 것. 이는 조여정이 연예계 데뷔 20년, 배우 데뷔 18년 만에 ‘진짜 배우’로 거듭나게 만든 비결이다. 1997년 잡지 모델로 데뷔해 99년부터 연기를 시작한 조여정은 주로 로맨틱 코미디 등 그 또래 배우가 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이미지의, 다소 뻔한 인물을 연기했다. 그의 말마따나 “20대 때는 또박또박 변수 없는 정직한 연기를 하며, 특별히 잘한다 못한다 소리도 듣지 않았다.” 그러나 2010년 영화 <방자전>을 기점으로 달라졌다. 그때부턴 영화 <인간중독>(2014년), 드라마 <베이비시터>(2016년, 한국방송2) 등 연기 의욕을 부추기는 색깔 있는 역할을 선택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대 때는 가능성을 봐주지만 30대 때는 숨을 곳이 없잖아요. 그동안 해왔던 연기를 또 하면 재미있지만 늘지는 않겠더라고요.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왜 이리 어려워’, ‘해볼 수 있을까’ 하는 역할에 도전했어요. 자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이걸 해결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늘겠지’라는 생각.(웃음) 그걸 좋게 봐주셨다면 제가 잘 지나왔네요.” 나이가 들면서 생각이 깊어진 것도 용기를 줬다. “한살 한살 먹으면서 책임감이 생겼어요. 많은 경험이 쌓이다 보니 다양한 인간 군상을 관찰하는 등 시야도 달라지더라고요. 20대 때였다면 이은희는 못 했을 거예요.”
조여정은 눈빛과 표정으로 말하는 배우라고들 한다. 동작이 크지는 않지만, 큰 눈망울이 주는 느낌으로 다양한 감정을 드러낸다. 눈동자엔 선악이 공존한다. <완벽한 아내> 마지막 장면에서도, 같은 웃는 표정인데도 눈빛의 변화로 상황에 따라 섬뜩함과 슬픈 미소를 오갔다. 그는 “종이 한 장 차이로 가짜로 보이면 우스워질 수 있는 장면이라 고민을 많이 했다”고 했다. 내공이 쌓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작품이 끝날 때마다 호흡, 발성, 손의 위치 등 내 연기를 미세하게 들여다보며 단점을 찾아내고 이걸 갖고 있다가 다음 작품에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왔다”고 한다. 이런 미세한 노력이 단숨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17년간 차곡차곡 쌓여 배우 조여정을 빚었다.
조여정은 “이 외모에서 생각지 못한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실제로도 부드러운 외모와 달리 내면이 강해 보였다. 인터뷰 내내 “무소유의 깨달음”을 얘기하거나 “인간관계에 집착하지 않고 불평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모든 것은 내가 한 선택이고, 그 선택에 책임지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게 된다”고 했다. “자신을 믿어야 한다”며 웬만한 성인군자도 하기 힘든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회사 문제로) 한동안 기회가 안 온 적이 있어요. 그때만큼 힘들었던 적은 없어요. 그 슬럼프를 겪으면서 모든 건 내 선택의 문제이고, 내가 풀어야 하는 숙제라는 걸 깨달았어요.”
오랜 세월 참고 견딘 내공이 지금의 조여정을 만든 것은 아닐까. 그는 “<완벽한 아내>를 하면서 ‘모든 것에서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댓글을 보며 감동받았다. 잘하고 싶다는 진심을, 내 나름의 노력을 알아봐주는 것에 감사한다”고 했다. 그 노력이 더 쌓이면 어떤 모습이 될까. 조여정의 연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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