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아버지가 이상해>에서 아이돌 출신의 연기 못하는 배우 안중희 역을 맡은 이준. 방송 화면 갈무리
“연기를 발로 하나….” ‘발연기’ 하는 배우들을 볼 때면 나오는 자동완성어다. 발로 하는 것처럼 연기가 어색하고 부족하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두 문장을 읽고 떠오르는 사람이 있나? 맞다. 그 사람들이 발연기의 대표주자들이다.
예전에는 ‘발연기’가 배우의 수치였다. 연기 못하면 하루아침에 드라마에서 잘리기도 했다. 요즘엔 안 그렇다. 하나의 캐릭터가 됐다. 주말드라마 <언니는 살아있다>(에스비에스)와 <아버지가 이상해>(한국방송2)에서는 각각 발연기 하는 아역 출신 민들레(장서희)와 아이돌 출신 안중희(이준)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지난해 <배우학교>(티브이엔)에 이어 최근 시작한 <내가 배우다>(케이스타)처럼 연기 초보를 불러 훈련시키는 예능 프로그램도 인기다. 한 지상파 드라마 피디는 “못하는 걸 솔직하게 인정하는 순간 호감이 되는, 시대를 잘 만나 ‘발연기’ 배우들이 그 자체로 하나의 콘텐츠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장수원이 좋은 사례다. 2013년 <사랑과 전쟁>에서 연기를 못해 비판받았는데 이듬해 그 연기가 새삼 화제가 되며 ‘로봇연기의 창시자’로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출연 배우들이 대부분 연기를 못해 논란이 되는 한 드라마는 “배우들 발연기 보려고 챙겨 본다”는 시청평까지 나온다.
■ 발연기를 발연기라 못하고… ‘발연기’의 역사는 길다. 한국 드라마는 1956년 <사형수>(대한방송)를 시작으로, 1961년 <한국방송> 개국 이후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요즘은 한해 100편 넘게 만들어진다. 옛날에도 연기력 논란은 있었다. 1985년 데뷔한 배종옥은 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데뷔 초 내가 해야 하는 연기가 무엇인지 파악을 잘 못했다. 당시 내가 봐도 연기를 정말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때는 ‘훈련’이 가능했다. 지금은 은퇴한 한 원로 드라마 피디는 “예전에는 선배 연기자나 연출자가 연기에 대해 자유롭게 지적할 수 있었고, 배우들도 이를 수용하고 스스로 노력했다”고 전했다. 연기 못하면 캐스팅이 안 되어 결국 도태됐고, 대사 없이 외모만 강조하는 주변 인물만 맡는 등 배역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신인 때 연기 못한다고 했던 배우들이 지금은 연기파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류 열풍으로 연예인의 위상이 높아지고, 드라마가 산업이 되면서 ‘발연기 불변의 법칙’이 생겨났다고 방송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주연배우가 편성까지 좌지우지하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권력이 되면서 ‘발연기’를 모른 척해왔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이상해>와 <언니는 살아있다>에서 ‘발연기’ 배우들은 작가나 피디한테 “너 로봇이냐”, “개그 프로 나갈 거냐” 등 대놓고 지적을 당하지만,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또 다른 지상파 드라마 피디는 “주말이나 일일 등 가족드라마의 경우엔 중량감 있는 인기 작가들이 대본 연습에 참여해 주요 출연자들한테 얘기를 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연기 못한다는 ‘팩트 폭행’을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또 그는 “미니시리즈는 주연배우한테 아예 아무 얘기도 못한다. 그랬다가 출연을 번복하면 낭패다. 하더라도 기분 상하지 않게, 에둘러 좋게 얘기해야 한다”고 했다. 몇년 전 한 드라마는 감독이 주연배우들한테 연기 지적을 했다가, 이 배우들의 소속사에서 단체로 항의해 결국 피디가 교체되기도 했다.
드라마 <언니는 살아있다>에서 연기 못하는 걸 인정 못하는 배우 민들레로 나오는 장서희. 방송 화면 갈무리
■ 왜 안 바뀌나 한 프리랜서 드라마 피디는 “측근들이 아무도 너 연기 못한다는 얘기를 하지 않으니 자신을 모르고, 그래서 노력하지 않는 게 발연기를 키운다”고 지적했다. <아버지가 이상해>의 안중희처럼 자신이 발연기를 한다는 걸 알면 다행이지만, 대부분 <언니는 살아있다>의 민들레처럼 자신을 모른다. 아이돌 출신 한 배우는 인터뷰를 약속했던 한 언론에 자신의 연기를 비판하는 외부 칼럼이 나가자 당일 인터뷰를 취소하기도 했다. 그의 소속사 쪽은 “우리가 왜 연기를 못하느냐”는 항의를 연거푸 해댔다. 이 피디는 “발연기가 부끄러운 걸 알면 고치면 되고 그럼 나아진다. 고쳐지지 않는 이들은 대부분 연출 탓, 작가 탓 등 남의 탓을 한다”고 말했다. <언니는 살아있다> 1회에서 민들레가 작가의 연기 지적에 “대본이나 똑바로 쓰라”고 맞붙는 장면은 현실에서도 드물지만 일어난다. 지난해 사극에 출연한 한 배우는 오랜 연기 경력에도 불구하고 대사 처리조차 안 돼 비판을 받자, 소속사를 통해 기자들한테 기사를 쓰지 말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한 드라마 작가는 “발연기로 유명한 ○○○은 연기 선생님을 찾아간 적은 있는데, 지적을 당하자 울며 그냥 나왔다더라”고 전했다.
■ 발연기인데도 왜 늘 주연? <언니는 살아있다>의 민들레는 ‘발연기’ 때문에 2년간 일이 없었다. <아버지가 이상해>의 안중희한테는 미니시리즈 출연 섭외가 안 들어왔다. 현실은 다르다. 발연기를 해도 잇따라 주연으로 캐스팅된다. 한국 드라마 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주연배우는 연기력보다 상품성이 더 중시되기 때문이다. 한 지상파 드라마 피디는 “한류 배우가 캐스팅돼야 드라마 해외 판매도 되고, 피피엘(PPL·간접광고) 등 제작비 충당이 잘된다”며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지적했다. 드라마 시청률이 전반적으로 떨어졌고, 한국에서 성공해도 한류를 타지 않으면 수익을 낼 수 없는 구조에서 상품성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광고 시장에서도 상품성 높은 배우를 선호한다. 이 피디는 “연기를 잘해도 대중성이 떨어지는 배우를 캐스팅하면 광고국에서부터 난리가 난다”고 했다. 그래서 여자 배우가 ‘발연기’이면 연기 잘하는 남자 배우를 택하는 식으로 조절을 한다. 또 다른 지상파 피디는 “연기는 연출의 능력으로 다듬어줄 수 있다. 연기 못하는 배우를 캐스팅하면 감정신을 조절해주는 등 ‘발연기’가 티 나지 않게 대본도 수정한다”고 귀띔했다.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작가와, 산업을 생각해 연기력을 따지기보다 한류 배우를 우선적으로 섭외하려는 제작사 사이에서는 늘 캐스팅 전쟁이 벌어진다.
그 사이에서 피해는 고스란히 시청자들의 몫이다. 한 중견배우는 “배우의 기본은 연기다. 연기가 되지 않는 배우를 주연으로 캐스팅하는 일은 결국 한국 드라마의 질적 저하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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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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