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유튜브 등에 부쩍 자주 불려나오는 연기자가 있다. 그가 대통령으로 출연한 드라마 <프레지던트>(2010년)의 토론 장면은 동영상 사이트에서 거듭 리플레이 되고 있다. 그가 왕으로 출연한 여러 드라마의 장면들만 이어붙여 ‘이상적인 리더의 조건’을 강조한 게시글도 각종 인터넷 사이트를 장식한다. 좋은 지도자에 대한 고민이 깊은 시대상이 투영된 에피소드일 것이다. 바로 최수종이다. <조선왕조 500년 한중록>(1988~1989년)부터 <임진왜란 1592>(2016)까지 시대의 리더만 10여명을 연기했다. 고조선 단군 역할만 맡으면 1500년을 아우르는 역사책 한권이 완성될 정도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요즘은 <매일 그대와 최수종입니다>(한국방송 해피에프엠 106.1㎒)로 매일 오전 9~11시 청취자들과 만나며 또 다른 시도에 열중하고 있는 그를 21일 서울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마주했다.
-시국이 이래서 최수종이 출연한 작품이 재조명되고 있어요. 최수종이 연기한 왕들의 장점만 모으면 가장 이상적인 리더라고 해요.
“하하하. <프레지던트>에서 청년들하고 토론하는 장면이 화제인 건 알아요. 장일준이 당내 경선 출마를 선언한 뒤 청년실업을 주제로 대학생들 앞에서 연설해요. ‘대통령은 국민이 아닌, 투표하는 국민이 만드는 것이다. … 투표일을 휴일로 생각하고 놀러 갔고, 영어사전은 종이째 찢어 먹으면서 여덟 쪽도 안 되는 선고 공보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청년실업의 서러움을 오직 투표로써 나 같은 정치인에게 강력하게 보여줘라.’ 인상적인 대사죠.”
-조기 대선을 치를지도 모를 요즘 꼭 필요한 말이네요.
“이 나라에서 내 의견이 반영되려면 주권을 행사해야죠. 그게 투표예요.”
왕, 대통령 ‘리더’ 단골 배우로서…
“지금 필요한 건 이순신 리더십
모든 병사 이름 불러줬다잖아요
배려, 소통, 포용하는 게 중요”
DJ로 돌아와보니…
“예능은 무조건 경쟁하지만
라디오는 서로가 서로를 위로
아이 사연 소개할 땐 울컥해요”
-지금껏 연기했던 왕 중에서 지금 가장 필요한 리더는 누구라고 생각해요?
“왕은 아니지만, 전 이순신이라고 봐요. 내가 아프고 힘든 걸 감추고 사람들을 격려하고, 우리 시대 가장의 모습 같아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자식들이 아버지를 지키겠다고 몸을 불사르잖아요. 자기희생, 헌신을 전제로 한 리더십. 이 시대 진정한 리더라고 생각해요. 정말 중요한 건, 이순신이 모든 병사의 이름을 다 외웠다는 거예요. 배려하고 소통하고 포용하죠. 그런 리더를 보면, 알아서 행동하게 되거든요.”
-수많은 리더를 연기하면서 발견한 공통점은 뭘까요?
“드라마에서 리더는 부하, 백성들 앞에서 나를 낮출 줄 알고 겸손하게 다가가는 장면이 많이 나와요. 그러면 진심으로 따른다는 것.”
“이상적인 리더를 연기하면서 영향을 받은 게 있느냐”고 물으니 그는 “드라마가 끝나면 언제 왕이었나 싶게 바로 빠져나온다”며 웃었다. 그러나 함께 자리한 <매일 그대와 최수종입니다> 김창회 피디는 “소통하고 포용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최수종은 실제로도 이상적인 리더”라고 꼽았다. 27년 만에 라디오 디제이를 맡은 최수종은 스태프 한명 한명의 이름을 부르고, 2시간 일찍 나와 준비하는 등 솔선수범한다는 것이다. 드라마를 할 때도 유명한 얘기다. 100명이 넘는 대인원이 움직이는 대하사극 촬영장에서 그는 가장 먼저 현장에 나온다. 선배가, 주인공이 일찍 나와 준비하는 모습에 하루하루 지날수록 늦는 배우들이 줄었다고 한다. 한 지상파 드라마 간부는 “대하사극 주인공은 팀을 이끌어가는 리더십도 중요하다”고 했다.
-굵직한 사극에서 최수종을 많이 찾는 이유 중의 하나도 믿고 리더십이라고들 해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포용하려고 노력해요. 어떤 일이든 혼자 스스로 만들어가는 건 없어요. 의견을 나누고 함께 만들어가는 게 중요해요. 촬영장에 먼저 가서 기다리면 어때요. 대본 외우며 더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는 거죠. 내가 먼저 보여주면 후배들도 따라와요. 그래서 드라마 끝나면 피디들이 ‘덕분에 잘 마쳤다’고 해요. 예전엔 저더러 ‘연기를 못해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도 했어요. 최수종을 캐스팅하면 펑크는 안 난다고. 하하하.”
-한결같은 생활을 유지하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요.
“매일 오전 5, 6시에 일어난 게 30년도 더 됐어요. 운동도 꾸준히 하고. 규칙적인 생활이 일상이 되어서 괜찮아요. 저녁에 술 마시고 놀고 그러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죠. 무엇보다 사람들한테 폐 끼치는 걸 싫어해요. 그동안 라디오를 고사한 이유도 밤샘 촬영을 하는 작품에 나갈 경우 라디오 일정으로 팀에 피해를 주기 싫었기 때문이에요.”
-일단 맡으면 몸을 사리지 않고 임한다는 평가가 많던데요.
“‘저런 것까지 직접 해?’라고 생각하는 연기들도 직접 하려고 해요. (그는 <야망의 전설>에서 직접 절벽에서 뛰어내렸고, <해신>에서는 얼굴만 내놓고 땅에 파묻히기도 했다.) 지금도 부족한 게 많다고 생각하고,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요. 지난해 <임진왜란> 때도 대사톤을 물으려고 선배한테 전화를 했어요. 선배가 읽어주는 대사를 듣고 ‘아, 내가 놓친 호흡이 이거구나’ 체크하고. 라디오를 하면서도 모르는 건 막내 작가한테도 물어요. 배우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해야 해요.”
1990년. <서울뚝배기> 당시 모습.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외모 때문에 ‘뱀파이어’설이 있다.
그는 1987년 <사랑이 꽃피는 나무>로 데뷔한 이후 줄곧 중심에 설 수 있었던 비결도 “노력”이라고 했다. 역대 드라마 시청률 1위 <첫사랑>(1997년, 65.8%) 등 그가 출연한 드라마 세 편이 드라마 시청률 톱10에 올라 있다. 사극은 물론 <질투> 등 로맨틱 코미디부터 <야망의 전설> 같은 시대극, 주말드라마에 정치드라마까지 두루 성공했다.
-다양한 장르가 가능한 몇 안 되는 배우로 꼽혀요. 비결이 뭘까요?
“어떤 감독이 그래요. 뭐든지 처음할 때는 ‘또 최수종이야?’ 그러는데 시작과 동시에 그게 다 사라지고 끝날 때는 ‘잘했다’고 한다고. 전 그게 절실함이라고 생각해요. ‘이거 아니면 안 된다. 이게 나의 전부다’라는 마음으로 하다 보면 최수종화된다고 할까요.”
-한편으로는 모든 연기가 다 비슷하다는 비판도 있어요.
“어떤 배우든 얼굴 모양의 형태와 목소리 톤은 안 변해요. 어떤 분장을 하고 아무리 변신해도 그 모습과 목소리는 같아요. 그렇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리더 말고 다른 역할에 대한 갈증도 있을 것 같아요.
“악역을 한번도 안 해봤어요. 그냥 선과 악이 아닌,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가 표현된 악역을 하고 싶어요.”
티브이에서 영웅 리더십으로 시청자를 보듬었던 그는 지난 6일부터는 <매일 그대와 최수종입니다>에서 똑 부러진 발음과 연륜을 품은 목소리로 청취자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다. 목소리의 힘을 새삼 깨닫게 한다. 최수종은 “한 집안의 가장이고 아빠가 되다 보니 사연을 소개할 때는 이해가 되고 공감하는 대목이 많아 울컥할 때도 꽤 있다”고 했다.
-여러 배역을 했지만, 청춘의 얼굴이었어요. 나이듦이 두렵진 않으세요?
“아니요. 세월의 흐름대로 사는 거죠. 그렇다고 얼굴을 찢고 당기고 그럴 순 없잖아요.”
-배우로서 중심에서 비켜나는 순간이 오잖아요.
“누구의 아버지, 삼촌은 늘 준비하고 있어요. 나는 끝까지 주인공만 할 거야, 그런 생각은 없어요. 누군가 매일 주인공만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누구의 아버지 역할을 맡고는 눈물이 핑 돌더라는 얘기를 했어요. 그럴 수 있겠구나 싶어 마음의 준비를 늘 하고 있어요. 아버지 역할이 대체 왜 필요했을까, 왜 최수종이란 배우를 택했을까라는 데 대한 당위성만 주어진다면 괜찮아요.”
-얼굴은 여전히 청춘이세요. 뱀파이어설이 있어요.
“하하. 라디오를 하면서 마음이 더 편해진 것은 있어요. 예능은 무조건 경쟁하고 이겨야 하잖아요. 라디오는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죠. 사연 읽으면서 나도 감동받고 위로받고. 그러는 게 너무 좋아요. 하희라씨도 그래요. 라디오 하고 오면 얼굴이 편해 보인다고.”
-아내한테 ‘씨’를 붙이는 게 인상적입니다.
“아이들한테도 존대를 해요. (그는 아들을 ‘최민서씨’라고 불렀다.) 아이들은 밖에 나가면 다 반말을 듣잖아요. 집에 오면 인격체로 존중받는다는 걸 아니까 훨씬 좋아해요. 오히려 거리감이 없고 훨씬 더 이야기를 잘해요. 우리나라 교육도 아이들한테 자존감을 살려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