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규 선임기자 bong92hani.co.kr
뮤지컬에 빠진 자, 공통적으로 놀라는 게 있다. 정성화의 위상이다. 뮤지컬을 모르는 이들은 ‘비급 개그맨’ 정도로 인식하는 정성화는 무대에선 톱스타다. 조승우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대형 뮤지컬 주연을 도맡는다. 2010년 ‘더 뮤지컬 어워즈’부터 받은 남우주연상만 6번. 지난 1월엔 2017년 ‘한국뮤지컬 어워즈’에서 조승우, 김준수와 경쟁해 <킹키부츠>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의 공연은 연일 매진이고, 정성화가 나오면 믿고 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실력도 수준급이다. 1월18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작한 <영웅>에서도 주인공 안중근으로 출연하고 있다.
2005년 <아이 러브 유>로 시작해 뮤지컬 경력만 12년째. 2007년 <맨 오브 라만차>로 대형 뮤지컬 첫 주연을 맡으며 두각을 나타냈고, 2012년부터 전성기가 시작됐다. 그의 성공은 오롯이 노력의 결실이라는 점에서 요즘 시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금수저, 흙수저 등 ‘수저계급론’이 심화된 대한민국은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다는 좌절감이 팽배하다.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단번에 큰 무대에 오른 게 아니라, 바닥부터 시작해 기본기부터 다졌고, 남들 두배 노력으로 실력을 채워갔다. 운도 아니고 백도 아니고 노력으로 최고가 된 정성화를 ‘2017년 희망의 아이콘’으로 지난달 24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났다.
-2017년 정성화처럼만 살자 싶어요.
“하하. 저를 보면 희망을 갖는다는 말을 요즘 부쩍 들어요. 후배들도 그렇고 대학 특강을 하면 ‘저도 열심히 노력하면 선배처럼 될 수 있냐’고 해요. ‘엄청난 희망을 봤다’고도 하고. 듣다 보면 (내가 그렇게 평범하가 싶어) 웃퍼요. 하하.”
-그럴 만한 게 남우주연상만 6번째예요.
“처음 남우주연상을 받은 게 2010년이었어요. 학교 다닐 때 개근상 받은 것 빼면 인생 통틀어 상은 처음이었어요. 상은 동기 부여가 돼요. ‘나 잘나간다’가 아니라, 업계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됐다는 생각에 책임감이 커져요.”
-사실, 뮤지컬에 관심 없는 이들은 정성화가 이 정도일 거라곤 생각 못 해요. 미디어를 통해 ‘뮤지컬 배우로 성공했다더라’는 건 알지만, ‘그래 봤자’라는 인식이 있어요.
“요즘도 지방 가면 ‘요즘 뭐 하고 사냐’며 안타까워하시는 분들이 계세요.(웃음) ‘뮤지컬 합니다’라고 말하면 ‘돈이나 제대로 받겠나’라고 하세요. 방송국 아는 사람 소개해주겠다고. 그럼 그냥 ‘네 감사합니다’ 그래요. 내가 얼마나 잘나가는지 알아주는 건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요. 내가 지금의 자리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거 아닐까요.”
-남들은 모르는 숱한 좌절과 고뇌가 있었겠죠?
“다들 노력하지만 전 두배로 했어요. 개그맨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내가 무대에 섰을 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놀라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출퇴근 시간을 줄이려고 연습실 옆에 집을 얻었고, 오전 10시에 오라면 8시30분에 가서 연습했어요. 4평짜리 연습실을 얻어서 녹음 시설 갖춰놓고 공연 전에 대사나 노래 등을 미리 녹음해서 틀어놓고 시뮬레이션도 부지런히 했어요. 그게 도움이 됐어요.”
-발성도 기본기부터 다시 배웠다고요.
“성가대도 했고 음주가무도 좋아해서 노래는 잘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비슷하게 흉내냈는데, 잘못된 발성이 몸에 익으면 바꾸기 힘들다는 생각에 <라카지> 직전인 2011년 영국에서 한달간 발성 공부를 하고 왔어요. 문제점을 파악하고 왔죠. 이 소리가 어디에서 어떤 메커니즘으로 나오게 되는지도 공부했어요. 그걸 알아야 소리를 컨트롤할 수 있어요. 레슨은 지금도 받고 있어요. 이 직업을 하는 한 발성은 중요해요. 후배들한테도 말해요. 레슨을 받는 친구와 받지 않는 친구의 미래는 다르다고.” 그는 작품마다 그것에 적절한 발성을 바꾸는 것으로 유명하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2hani.co.kr
그는 “개그맨이라 받는 편견은 없었다”고 했다. 무대를 위한 철저한 준비는 개그맨, 배우로서 실패한 경험이 약이 됐다. 정성화는 대학교 1학년 때인 1994년 개그맨으로 데뷔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수업시간에 분위기 다운되면 옆 반 선생님이 나를 불렀을 정도”로 ‘웃기는 놈’으로 유명했다. 데뷔하자마자 당시 인기를 얻었던 개그맨으로 구성된 가수 그룹 ‘틴틴파이브’에 중간 투입되는 등 장래가 촉망됐지만,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고 1년반 만에 그만둔 뒤 바로 군대에 갔다. 제대 뒤 드라마 <카이스트>(1999년)로 연기 잘하는 배우로도 주목받았다. <행진> 등 여러 시트콤에 투입되며 배우로 전성기를 맞는가 싶더니 다시 무대를 택했다. 그는 뮤지컬 이전의 연예계 인생을 “준비 없는 등단은 재앙일 수 있다”고 정리했다.
-뮤지컬의 열정에 견주면, 개그맨과 배우로 일찍 좌절했다는 느낌이 있어요.
“저 굉장한 기대주였어요. 하하. 근데 틴틴파이브에서 잘리면서 실망이 컸나봐요. 빨리 군대나 갔다 오자 싶었던 것 같아요. 지오피에 있었는데 7시간 동안 근무 서면서 내 패착에 대해 생각하곤 했죠.”
-그래서 찾은 실패의 원인은 무엇이었나요?
“준비 없이 하다 보니 직업에 대해 아무런 철학이 없었어요. 개그라는 장르에 대한 연구가 없었어요. 제대하고 운 좋게 <카이스트>를 하면서 알려지게 됐지만, 역시나 준비 없이 찾아온 기회는 이내 떠나가 버렸어요. 몇년 지나니 인기도 물거품처럼 사라지더라고요. 준비를 제대로 하고 나온 작품이 사람들에게 남는구나, 그걸 일깨워준 장르가 뮤지컬이었어요. 개그맨으로서 실패의 경험, 어설픈 탤런트로서의 실패 경험을 통해 직업의 철학에 대해 깨닫고 정신차려서 공연 업계에 발을 디뎠어요.”
-그래서 찾은 게 2002년 연극 <아일랜드>였어요.
“연기력을 쌓자는 생각에 연극을 했어요. 2인극이었는데 그걸 본 뮤지컬 제작사 대표의 제안으로 2005년 뮤지컬 <아이 러브 유>에 서게 됐어요. 그걸 하면서 공연이 나랑 잘 맞는구나, 즐겁게 뭔가 해볼 수 있겠구나 자신감이 생겼어요. 2007년 <맨 오브 라만차>를 하면서 뮤지컬 배우로 뼈를 묻어야겠다고 생각했고, 2009년 <영웅>을 하면서 운영의 묘가 생겼어요. 개그맨이 드라마에서 쓰이는 역할은 한정적이에요. 주인공 회사 친구, 웃긴 사람. 소모되는 느낌이 컸어요. 그런데 티브이에서는 정성화에게 맡기지 않을 그런 배역들이 뮤지컬에선 주어졌어요. 그것도 신났어요.”
뮤지컬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티브이에서 보여준 정성화와 무대의 정성화는 디엔에이도 다르게 느껴졌다. “웬만하면 그냥 져준다”는 그가 뮤지컬에서만큼은 승부욕을 발동했다. 그가 처음으로 대극장 주연을 맡은 <맨 오브 라만차>가 좋은 예다. 애초 조연인 산초 역을 제안받았는데 돈키호테를 해보겠다고 욕심냈고, 오디션 끝에 당당히 꿰찼다. 그는 “내 인생의 첫번째 승부수였다”고 했다. “산초를 하면 (개그맨으로서) 비슷한 이미지가 소모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돈키호테를 해야 발전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조승우와 더블 캐스팅. “당연히” 좌석이 차지 않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고, 실력으로 보여주면 된다”고 믿었다. 첫 무대에서 기립박수가 쏟아졌고 이후 입소문을 탔고 지금의 매진 행렬을 이어가는 정성화로 우뚝 섰다.
-공연 목록을 들여다보면 재공연이 많아요.
“이 작품은 정성화 것이라는 말을 듣는 게 가장 좋아요. <영웅> <킹키부츠> 하면 정성화가 생각나게 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그 작품에 자주 참여해야 해요. 작품 선택 기준이 의리이기도 해요. <영웅>과 새로운 작품이 있으면, 꼭 해야 할 이유가 있지 않는 한 <영웅>을 택해요. 결국 남는 건 인간이더라고요. 작품을 선택하는 것이 일종의 전략이라면 거기에 인간이 들어 있어요. 전.”
-뮤지컬 데뷔 12년이에요. 연출을 하고 싶진 않나요?
“한때 대극장용 코미디를 써보고 싶어서 후배와 대학로에 작은 사무실을 얻어서 대본을 쓰기도 했어요. <맨 오브 라만차> 직전에 너무 어려운 일이란 걸 알게 돼서 접었지만. 지금도 그 꿈은 있어요. 언젠가 대본을 직접 쓰지 않더라도 연출을 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한국에서는 아직 대극장에서 코미디를 한다는 것이 유연하지가 않아요. 그러나 코미디만큼 위대한 건 없다고 생각해요. 언젠가는 만들고 싶어요. 아 참, 그 후배가 정상훈이었어요. 하하.”
-뮤지컬이 대중화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보는 관객만 보고 저변이 크게 넓어지진 않았어요.
“8만원짜리를 5만원으로 내린다고 보지는 않을 것 같아요. 대중화 지름길은 지방 공연 활성화라고 생각해요. 지방에서 태동된 공연이 메인으로 올라올 수 있을 정도로 실력적인 향상, 나라 전체에 뮤지컬을 보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게 중요하죠. 창작 뮤지컬도 많아져야 해요. 창작물이 잘되려면 배우들이 나서야 해요. 창작물 태동 단계에서 리딩 공연(뮤지컬·연극 제작 전 대사 낭독) 해주고. 이른바 메이저라고 생각하는 배우가 나서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저도 참여할 테니 언제든지 연락달라고 하지만, 연락이 안 와요. 하하.”
-출연료가 비싸서 그런 거 아닐까요?
“좋은 공연이라면 안 받고도 할 수 있어요.”
인터뷰 며칠 전 사진 촬영을 위해 <한겨레>를 찾은 정성화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손을 꼭 잡고 어깨를 숙이고 고개를 몇번이나 끄덕이는 모습이 금세 벽을 허물었다. 눈을 따뜻하게 맞추며 웃는 인상이 선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대선 후보들이 그의 평소 말투, 표정, 행동을 눈여겨보면 어떨까 싶었다.
-1999년 투표 참여를 요청하는 광고에도 출연했던데요.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은 있어요. 뉴스도 보고 신문도 보고. 그러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내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객석에 앉아서 파를 갈라 보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서예요. 좌든 우든 중간이든 공연을 즐기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지금 출연하는 <영웅>을 하면서는 어떤 생각이 드나요?
“어떤 팬이 기다리면서 기분이 묘했다고 했어요. 자동차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서는 현실과의 투쟁을 하고, 한쪽에서는 역사적인 투쟁을 하고 있다고. 둘 다 똑같은 역사의 투쟁이지만 과거와 현재가 맞물리며 묘한 느낌을 줬다고. 그렇게 해서 얻어낸, 다시 되찾은 나라가 이런 난관에 봉착된 사실에 대해 화가 나고, 한국 국민들이 대단하다는 걸 느끼게 됐다고. 공감됐어요. 공연을 보고 나서는 길에 세월호 참사와 노란 리본, 많은 사람들의 탄핵 요구와 관련된 표현을 보면 ‘이게 어떻게 얻어낸 나라인데’라는 생각을 하게 될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마음가짐도 남다르고 책임감도 있어요.”
-다시 개그를 할 생각은 없나요?
“내가 개그맨을 하고 싶어한 것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개그콘서트>나 예능에 나가 사람들을 웃기는 것도 개그이지만, 뮤지컬을 하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도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개그를 중도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는 자신을 키운 8할은 열등감이라고 했다. 그걸 넘고 싶어서, 하고 싶어서 더 열심히 하게 된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엄지손가락을 세우는 지금도 그는 “나는 아직도 부족한 게 많다”고 채찍질했다. 나를 낮추고 더 나아가는 정성화의 미래는 또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