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미 그린 달빛>으로 우뚝 선 박보검은 “내 한마디, 행동 하나가 많은 사람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에, 선한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블러썸엔터테인먼트 제공
송중기 시대를 지나 박보검 시대다. 18일 종영한 <구르미 그린 달빛>(한국방송2·이하 <구르미>)에서 조선 순조의 맏아들 효명세자에서 모티브를 딴 왕세자 이영을 연기하며 민심을 사로잡았다. 사랑에 솔직하고, 근엄하면서도 귀여운 복합적인 매력을 뽐냈다. 8.3%로 시작한 시청률이 마지막회 22.9%(닐슨코리아 집계)까지 올랐다. 시대의 아이콘은 늘 바뀌지만, 이 남자는 좀 특이하다. 연기력뿐만 아니라, 착하다는 자동완성어가 늘 따라다닌다. <구르미> 때는 촬영 없는 날에도 현장에 나와 분장 담당자를 도와주곤 했단다. 착함과 성실함. 주변인들이 말하는 박보검의 성공 키워드는 두가지로 요약된다. 진짜일까? 26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검증에 나섰다.
■ 한명 한명 눈 맞추며 90도 인사 저러다 허리가 꺾이지 싶다. 인터뷰실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안녕하세요” 90도 인사를 반복한다. 기자 십여명의 눈을 한명 한명 맞춘다. 눈을 맞추지 않고 입만 벙긋한 기자한테는 다시 “안녕하세요” 독대하며 기어이 눈을 마주한다. 그 눈맞춤은 상대의 마음을 열게 한다. 짧은 시간, 많은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고려해 말을 빠르게 하는 숨은 배려도 있었다.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려는 계산된 행동은 아닐까? “착하게 행동해야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쏙 들게 행동해야지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지 프레임에 갇혀서 생각하는 거잖아요. 그런 생각으로 행동하는 건 나쁜 것 같아요.” 이해를 못한 질문에 “죄송하다” 재차 물으며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혼자 미안해하는 걸 보면, 순수한 행동이 맞다에 일단 한 표.
배우로서 착하다는 이미지가 고착화되는 게 우려되진 않을까. 늘 웃던 사람이 한번이라도 찡그리면 비난은 두세배로 거세다. “항상 아빠가 10 빼기 1은 0이라고 하셨어요. 열번 잘하다가 한번 잘못하면 ‘말짱 꽝’이 된다고 하시는데, 24년간 평범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부담감은 없어요.” 지금까지 했던 일탈을 물으니 “(드라마 포상 휴가로) 필리핀에서 다들 한식 먹으러 갈 때 병연과 둘이 몰래 빠져나와 현지 식당에 갔다”는 답이 돌아온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친구들을 만나면 주로 영화 보고 노래방 가고 논단다. “재미없는 타입”이라고 받아치니 “나 재미있게 살고 있다”며 우물쭈물 웃었다.
■ 수능공부 하듯 대본을 파고들다 저 순수한 남자한테서 카리스마가 나올까. <구르미>는 우려를 깨고 배우로서 박보검의 진가를 제대로 빛나게 한 작품이다. 이영은 만만한 역은 아니다. 꿈과 야망을 숨기고 초반에는 ‘날라리 왕세자’로 등장한 뒤 차차 군주의 면모를 갖추면서도, 홍라온(김유정)과 있을 때는 달달한 로맨스도 뿜어내야 한다. 풋사랑에 설레는 19살 소년의 순수함과, 권모술수에 맞서는 카리스마의 전혀 다른 두 모습을 눈빛과 목소리 톤 등의 변화로 소화해냈다.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자객이 자신이 믿는 병연인지 아닌지 의심하는 복잡한 마음을 담아 “병연이냐”고 내뱉는 장면에서 연기력이 절정에 달했다. 한 드라마 피디는 “발음과 눈빛이 좋아 어떤 역할을 맡아도 내면을 드러낼 줄 안다”고 했다.
비결을 물으니 그는 “대본 속에 답이 있다”고 했다. 수험생처럼 교과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처음에는 자신감이 없고 자꾸 흔들렸어요. 피디님과 작가님을 자주 만나서 대화하고 공부했어요.” “시놉시스를 보며 인물을 탐구했고, 같은 대사를 여러 톤으로 해보고, 입에 붙지 않는 대사는 녹음해서 돌려 들으며 작가와 피디한테 들려주는 과정 끝에 제 것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화제가 된 “불허한다. 내 사람이다” “반갑다 멍멍아” 등의 대사가 그런 과정 끝에 탄생했다.
감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촬영했던 초반 장면들은 재촬영을 직접 부탁했다. “제가 봐도 만족스럽지 않아서 감독님께 말씀드렸어요. 삼놈(김유정)과 국밥집에 가는 장면이 그랬고, 구덩이에 갇힌 장면을 재촬영하면서 감을 잡았던 것 같아요.” 노력 끝에 내 것으로 만든 것을 놓아야 하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던 모양이다. “마지막회 붉은 용포를 입고 왕이 된 뒤 ‘주상전하 납시오’라는 말이 나올 때는 진짜 눈물 날 것 같았어요.”
■ 스타보다는 배우 향해 차근차근 한 지상파 피디는 “필모그래피를 보면, 탄탄한 기본기를 쌓으려는 노력이 보인다”고 했다. <응답하라 1988>(응팔)을 넘어 <구르미>로 단숨에 스타가 된 것 같지만, 차근차근 밟아온 5년의 무명 시절이 있었다. 2011년 영화 <블라인드>에서 김하늘의 동생으로 데뷔한 뒤 <각시탈>에서 학도병, <원더풀 마마>에서 애교 넘치는 막내, <너를 기억해>에서 사이코패스 등을 연기했다. “배우는 늘 배워야 하는 직업같다”는 그는 “더디더라도 작품마다 하나라도 배울 수 있는 역할을 선택해왔다”고 했다. <내일도 칸타빌레>에서는 첼로, <참 좋은 시절>에서는 사투리, <응팔>에서 바둑, <구르미>에서는 승마와 거문고, 액션 연기를 배웠다고 한다. 이 모든 게 결국 연기 잘하는 배우 박보검의 피와 살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특히 “<구르미>에서는 선배님들한테 말투나 자세, 편전에 있을 때 세자의 행동 등을 많이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며 “선배님들 덕분에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사극에 출연을 많이 한 한 중견 배우는 “젊은 배우들은 선배들이 많이 나오는 드라마를 꺼리고 선배들의 참견을 싫어한다”며 박보검의 이런 점을 높이 샀다.
■ 20대 청춘의 깊은 감성 인터뷰 내내 박보검은 “설렜다”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구르미>를 선택한 이유 중에 하나도 소설을 읽으면서 설레는 포인트가 많아서였다고 했다. “여름과 가을, 청량함과 싱그러움을 담을 수 있는 계절에 딱 맞는 작품이잖아요.” 한복을 입을 수 있어서도 좋았다고 한다. “그 예쁜 한복을 언제 입어 보겠어요. 모든 한복이 다 예뻐서 하나를 고를 수도 없어요. 아, 어디 한복홍보대사 같은 건 없나요?” “반갑다 멍멍아” 등의 대사도 “너무 설레지 않았냐”며 아이처럼 되묻는다.
박보검의 원래 꿈은 ‘뮤지션’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피아노 치며 노래하는 영상을 기획사에 보냈고, 가수보다는 배우에 더 잘 어울리는 얼굴이라는 소속사의 권유로 이듬해 데뷔했다. 지금도 가수의 꿈은 놓지 않았다. <구르미> 배경음악인 ‘내 사람’을 불러 각종 음원사이트 1위에 올랐다. “내 이름이 뜰 때마다 신기하고 설레요. 기회가 되면 제 이름으로 된 음반을 낼 수 있지 않을까요?” “하늘의 달만 봐도 <구르미>가 떠올랐으면 좋겠다”는 그는 이제 도포를 벗고 평범한 박보검으로 돌아간다. “다시 학교에 갈 것 같아요. 아 너무 설레요.” 차기작을 물으니 “교복을 입고, 영화 <나의 소녀시대>처럼 풋풋하고 설레는 감성을 만나고 싶다”고 한다. 교복을 입은 작품에서는 뭘 배울 수 있을까? “이차방정식처럼 학업을 공부하겠죠?”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