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당시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10여년을 떨어져 지낸 두 사람이 있다. 둘은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 마음을 확인한다. 드라마 남녀 주인공의 뻔한 법칙을 고스란히 따르는 설정이다. 그런데, 여자 주인공이 탈북자라면? 이야기는 이제 좀 다르게 흘러가지 않을까?
미풍은 어린 시절 마카오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다가 북한에 돌아갔고, 세월이 흐른 뒤 남한으로 탈북했다. 문화방송 주말드라마 <불어라 미풍아>(토·일 저녁 8시45분) 이야기다. 주말극에서 여주인공이 탈북자라니?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선 호기심 가득한 반응이 나온다. “살다 살다 남북 학생이 한 학교에 다니는 드라마를 보게 될 줄이야!”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북한’은 대중문화의 주요 소재였다. 1950~70년대에 양산된 ‘반공영화’를 시작으로 티브이, 연극, 뮤지컬 등 장소를 넓혀가며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다양한 이야기로 변주되어 왔다. 9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은 적대적인 존재였던 것에서, 남북 첫 정상회담이 열린 2000년대를 기점으로 인간미에 방점을 찍는 작품이 많아졌다. 탈북자 1만명 돌파를 앞둔 2006년께부터는 <국경의 남쪽> <크로싱> 등 탈북자들의 현실을 조명한 영화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영화 등에 견줘 다루는 방식에 제약이 많았던 드라마에서는 전쟁이나 간첩물이 대부분이었지만, 최근 들어선 탈북자의 삶에 본격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다.
주말드라마 <불어라 미풍아>는 탈북 모녀의 남한 적응기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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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인에서 중심인으로! <불어라 미풍아>는 온 가족이 보는 주말드라마에서 탈북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주인공 미풍(임지연)은 북한 고위 지도층 집안으로, 탈북 과정에서 재산을 집안일을 봐주며 함께 살던 또 다른 탈북자 박신애(임수향)한테 빼앗기고 빈털터리로 남한에 오게 된다. 드라마는 미풍이 남한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성장담이다. 인간 사회의 경쟁과 욕망 등을 고스란히 대입하는 동시에, 남과 북의 문화적 차이가 야기하는 갈등과 충돌 또한 주요하게 담는다. 알고 보니 미풍은 천억원대 자산가로 성공한 탈북자 김덕천(변희봉)의 손녀였고, 북한 혈육과 남한 혈육 사이 유산을 놓고 벌이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윤재문 피디는 “탈북녀 미풍과 변호사 장고(손호준)의 사랑, 꽃제비 출신의 신애와 희동의 남남북녀 사랑 이야기, 유산 상속에 얽힌 욕망의 충돌 등이 다뤄진다”고 했다. 시청률은 16회까지 평균 12%다.
탈북자들이 주변인으로 출연했던 <힘내요 미스터 김>.
탈북자들이 주변인으로 출연했던 <내 사랑 나비부인>.
탈북자 3만명 시대, 드라마에서 탈북자의 등장 자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2005년 <사랑은 기적이 필요해>에서 실제 탈북 배우가 등장한 것을 시작으로 2012년 <내 사랑 나비부인>, 2012년 <힘내요 미스터 김> 같은 드라마에서 간간이 조연으로 등장했다.
전쟁·간첩물 그렸던 예전 비해
‘불어라 미풍아’‘한식대첩’ 등
탈북자들 방송 중심으로 다뤄
“남한 정착 과정·사투리 등이
극적이라 방송에 매력적 소재”
일부 방송선 남북공감대보다
젊은 여성 내세워 가십으로 소비
그러나 주로 감초 캐릭터로 등장했던 것에서 최근에는 그들의 이야기가 극의 중심으로 우뚝 선 게 다르다. 2013년 에스비에스 단막극 <낯선 사람>은 탈북자이면서 북한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고위층 자제의 이야기였고, 지난해 한국방송 단막극 <이중주>는 남쪽의 대표적인 보수 논객의 집에 탈북자 출신 며느리가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2014년 <닥터 이방인>에서는 잘생기고 능력 좋은 천재 의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은퇴한 한 원로 피디는 “<닥터 이방인>을 보면, 과거 탈북자를 이방인처럼 다뤘던 것에 견줘 그들의 능력을 강조하는 식의 변화가 눈에 띈다”고 했다.
탈북자를 천재 의사로 출연시켜 화제를 모은 2014년 드라마 <닥터 이방인>.
방영 중인 요리 대결 프로그램 <한식대첩>에도 탈북자팀이 출연한다.
일상에 녹아든 흐름은 예능에서도 마찬가지다. 탈북자들을 데리고 스튜디오에서 그들의 사연을 듣던 형식에서 나아가 <잘살아 보세>(채널에이)처럼 탈북자들과 한국 연예인이 농촌에 가서 북한의 생활 방식을 배우는 리얼 버라이어티까지 나왔다. <남남북녀>(티브이조선)처럼 가상의 결혼생활도 한다. <한식대첩>(티브이엔)에서는 북한 고위층 전담 조리사 출신인 북한팀이 청와대 요리사 출신의 서울팀과 요리 대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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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스며든 현실 반영 티브이 바깥에서도 ‘탈북’은 인기 소재다. 탈북 비제이 이평은 1인 미디어로 탈북 과정을 소개하며 인터넷 방송 3개월 만에 누적 시청자 수가 28만명을 넘는 등 인기를 얻고 있다. 그는 “친근하게 다가가고 북한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어 방송을 시작했다”고 했다. 탈북 7년차 최성국은 네이버 웹툰 도전만화 코너에 <탈북남의 열혈 남한 정착기-로동심문>이라는 웹툰을 연재했는데, 조회수가 높아 베스트 코너에 등극했다. 탈북자의 구성 변화도 반영되고 있다. <불어라 미풍아>의 미풍 가족은 북한 고위급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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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좋아할까? 한 지상파 피디는 “탈북자는 드라마가 좋아하는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는 매력적인 소재”라고 했다. 목숨을 걸고 한국으로 건너오는 과정이나, 전혀 다른 곳에서 이방인처럼 지내면서 일어나는 고충은 드라마의 주요한 소재로 활용될 수 있다. <불어라 미풍아> 속 미풍은 탈북 과정에서 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된다. 또 같은 처지의 탈북자한테 전세금을 사기당하기도 한다. 미풍은 각박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함과 발랄함을 유지하는 캔디형 주인공으로 묘사된다. 이 피디는 “그냥 보면 뻔한 스토리인데 탈북민의 이야기라고 하니, 다르게 보게 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탈북자를 바라보는 남한 사람들의 미묘한 시선, 문화적 차이에 따른 남녀 간의 오해 등 탈북자가 주인공인 드라마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세세한 묘사들도 눈길을 끈다. 드라마는 탈북자의 오늘을 장밋빛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미풍은 어렵게 부푼 희망을 안고 디자인회사에 들어간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처음 그의 말투에 “강원도에서 왔냐”던 동료 여직원들은 탈북자임을 알게 되자 화장실에서 비웃음을 담아 수군거린다. 문간방에 탈북자가 들어온 걸 안 장고의 할머니는 “찝찝하게 북한 사람을 집에 들이냐. 북한에서 뭔 짓 하고 내려온지도 모르는데”라며 마음을 활짝 열지 못하는 우리의 민낯을 비춘다.
남한에 온 탈북자들의 심정을 제법 사실적으로 담아낸 변화도 눈에 띈다. 북한에서 부유하게 살았던 미풍의 엄마(이일화)는 남한에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삶에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며 울부짖는다. 미풍은 “나도 오기 싫었어. 그러나 아빠가 가자고 할 땐 다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따라온 것”이라고 말한다. 시청자게시판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탈북자를 둘러싼 시선이 가슴 뭉클하다”는 반응이 올라 있다. 한 탈북자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과거에는 우리가 봐도 저건 아니다 싶을 정도로 북한을 희화화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탈북민을 주제로 과거와는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 변화가 보인다”고 했다.
북한 말투는 미풍의 캐릭터를 풍부하게 드러내는 장치로 활용된다. <응답하라 1997>이나 <신의 선물-14일> 등에서 경상도, 전라도 사투리가 극적 재미를 더하는 요소로 활용된 것과 궤를 같이한다. “어머나, 이 동무래 박력이 넘친다야~” “내래 아무래도 장고 오빠랑 결혼해야겠습네다”처럼 당돌한 말투에서 꿋꿋하고 당당한 미풍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누리꾼들도 “북한말 귀엽다” 등의 시청평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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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요깃거리 넘어서야 탈북자의 삶을 눈요깃거리, 가십의 대상으로 다루는 모습 또한 눈에 띈다. 특히 <이제 만나러 갑니다>(채널에이) 등 케이블 종합편성채널에서 ‘북한 미녀’라는 이름으로 젊은 탈북 여성들이 출연해 경험담을 들려주는 프로그램들이 그렇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들이 난무하지만, 젊고 예쁜 여성들을 출연시킨 덕분에 시청률은 2~3%대로 높다.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이 “탈북 여성들이 한국 텔레비전의 새로운 스타로 부상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북 간 공감대를 넓히고 화해와 협력의 가능성을 높이기보다는 북한의 열악한 상황을 단지 가십처럼 소비함으로써 남북 간의 간극을 한층 더 크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탈북자는 자신의 블로그에 “침묵하는 한국 사회에 북한과 고통받는 북한 동포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는 건 고맙지만, 정작 우리들은 상처가 다시 드러나고 남아 있는 가족들이 생각나서 고통스럽기도 하다”고 썼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탈북자가 등장하는 종편 프로그램은 북한 실상을 선정적이고 자극적으로 다루면서 통일 담론을 훼손하고 있다”며 “분단을 바라보는 시선과 프레임의 건강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사진 각 방송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