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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언니들의 캐리어엔 아린 삶이 실려 있다

등록 2016-10-13 19:48수정 2016-10-13 21:04

일 잘하는 주인공 최지우·김하늘
‘캐리어를 끄는 여자' '공항 가는 길'에서
‘변호사 못 된’ 법률회사 사무장
일·가정 병행 벅찬 스튜어디스로
캐리어에 저마다의 속사정 실어

과거 민폐·의존형 캐릭터와 달리
연대하며 자신의 분야 능력 발휘
최수아(김하늘)과 차금주(최지우·오른쪽)는 캐리어에 세상 짐을 싣고 고군분투한다. 스튜디오 드래곤 제공
최수아(김하늘)과 차금주(최지우·오른쪽)는 캐리어에 세상 짐을 싣고 고군분투한다. 스튜디오 드래곤 제공
언니들이 귀환했다. 한없이 가녀리고 예뻤던 20대의 그들. 어느덧 30대 후반, 40대가 되어 세상의 무게에 힘겨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드라마 <캐리어를 끄는 여자>(문화방송 월·화 밤 10시)의 차금주(최지우)와 <공항 가는 길>(한국방송2, 수·목 밤 10시)의 최수아(김하늘)가 그들이다.

둘 다 ‘세상의 짐’을 캐리어에 싣고 고군분투한다. 법률회사 사무장인 차금주는 소송 사건 자료를 캐리어에 싣고 다니고, 스튜어디스 최수아는 캐리어를 끌고 직장에 출근한다. 이혼녀인 차금주는 속시원하게 일하지만 억울한 게 많고, 아이 하나 둔 유부녀 최수아는 회사 일과 집안 일의 양립을 모색하다 불륜에 빠졌다.

뻔해 보이는 이야기지만, 이야기는 결코 뻔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불륜 드라마인 줄 알고 보기 시작했는데 망봐주고 싶다”(<공항 가는 길>), “자격만 따지는 사회를 반추하는 드라마”(<캐리어를 끄는 여자>) 등의 반응이 나온다. 드라마의 설득력을 더하는 건 짙은 색조화장 따위 벗어던진 두 배우다. 최지우와 김하늘 다 1996년 데뷔해 올해 연기 20년째가 됐다. 두 배우가 보여주는 리얼한 여성의 삶이 시청자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핵심 요인이다. 드라마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두 언니들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 언니들의 ‘인생의 법’ 차금주는 명함을 나눠주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인생의 법”이라고 말한다. 여자들에게는 ‘인생의 법’이 더 가혹하다. 차금주는 “변호사도 아닌 게…”라는 말을 감내해야 한다. 시험공포증으로 다섯번째 본 사법시험 때 시험장을 뛰쳐나온 그다. “일 잘하니까 비싸”다지만, 변호사처럼 사건을 수임하고 해결하고 다니다 결국 변호사법 위반으로 1년 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기까지 한다. 그사이 남편은 젊은 여자와 사랑에 빠져 이혼을 요구한다.

차금주의 법률회사 ‘골든트리’의 여성들 역시 다사다난하다. 구지현(진경) 변호사는 한 성깔 한다. 차금주에게 독설을 날리던 구지현은, 이혼 전문 변호사이면서 “남의 가정 깨뜨리고 반성은 못할망정 어디서 본처를 디스하냐”고 불륜녀의 머리채를 잡다가 해고된 뒤 ‘골든트리’에 합류한다. 반대 쪽 ‘악역’ 역시 여성이다. 차금주의 이복동생 박혜주(전혜빈)는 연수원 시절 ‘스캔들’에 휘말린 ‘소문의 여자’로 여성의 또 다른 사회적 위치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승률을 챙겨라, 너는 하자 있는 여자니까”라는 차금주의 말에 “언니 이름으로 승소하는 것도 아니지 않냐”고 지지 않고 대응한다. 이렇게 법정은 ‘여성 대 여성’의 대결을 곧잘 보여준다. 여성들의 현실적 ‘쟁투’를 실감나게 묘사함으로써 드라마는 코믹한 흐름 속에서도 사실성을 획득하며, 공감의 기운을 창출한다.

■ ‘자아실현’ 위해 일하는 여자? 최수아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일과 양육,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 “(진급은 늦지만) 직장에서 인정받았”으나 동료들은 “모두 다음(퇴직)은 그”일 것이라는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응원군이 없지 않다. “동기라고는 너 하난데 절대로 그만두지 말라”는 친구 미진(최여진)과 애 셋을 데리고 고군분투하다 스튜어디스를 그만둔 ‘단것 같이 먹는 선배’ 현주(하재숙)가 있다. 현주는 “(나는 그렇게 정신없이 일하는데 주변에선) 하고 싶어서 하는 거래”라며, 여성의 직업을 ‘자아실현’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일갈을 던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응원군들도 있다.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비행 스케줄을 바꾸러 갔을 때다. 선배는 “다 잘할 수 없으니 나 몰라라 해야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며 충고를 건넨다. 이렇게 드라마는 경쟁 속 힘이 되는 ‘연대’의 순간들을 절묘하게 포착해낸다. 로맨스 못지않게 시청자들의 몰입을 이끄는 요인이다.

타성에서 벗어난 캐릭터 묘사 또한 눈에 띈다. 염치없는 시어머니(이영란)는 아이를 보는 할머니들을 보면서 “저렇게 살지는 않겠다”는 속내를 드러내며 ‘무욕의 노인’ 상을 뒤집는다.

■ 여자들의 응원 10일 방영된 <캐리어를 끄는 여자> 6화에서 차금주는 “꼭 뭐여야 하냐. 왜 변호사, 검사, 의사 등이어야 하냐”고 절절한 토로를 한다. 차금주의 ‘사무장’ 위치는 절묘하다. 변호사인 줄 알지만 다들 명함을 받고는 “사무장이었어요?”라고 무시한다. 일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지만 ‘사무장’이라는 지위 때문에 폄하된다. 세상 여성의 지위에 대한 은유로 받아들여진다.

<공항 가는 길>은 불륜의 이유로 ‘운명’이라는 여러 장치를 넣었지만, 최수아의 상황이야말로 핵심 이유가 되어준다. 최수아는 거짓말 못하고 항상 당하는 여성이지만 소심한 반항을 이어간다. 아이의 말에 화가 나 가출을 하고 시어머니가 “너 매일 맥주 마시냐”는 말에 정직하게 “네”라고 답한다. 감정이 이끄는 대로 관계를 정의하는 것도 최수아다. “보고 싶어하지도 만지지도 헤어지지도 않는 사이”라는 ‘3무 사이’ 등의 죄책감을 상쇄하는 관계를 구상한다. 상황에 흔들리면서도, 조심스럽게 주체적 선택지를 찾아가는 모습이 드라마 보기의 흥미를 돋운다.

■ 지상파가 그린 ‘일잘 여성’ 그동안 많은 드라마가 여성을 ‘민폐형’ ‘의존형’으로 그리던 것과 달리 두 드라마 모두 ‘일 잘하는’(일잘) 여성으로 주연 캐릭터를 묘사한다. 남성 중심 영화판에서 티브이로 영역을 옮기는 30대 후반, 40대 여성 톱 배우들의 분투와 궤를 같이한다. ‘여성 일잘’ 드라마는 일본 드라마 리메이크인 김혜수의 <직장의 신>(2013년), 최지우의 <수상한 가정부>(2013년) 등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만 해도 일은 잘하지만 ‘외로운’ 여성이었던 데서 두 드라마는 한발 더 나아갔다.

여성 톱 배우를 기용해 ‘여성 일잘’ 드라마를 만든 것은 사실 케이블이 먼저다. <캐리어를 끄는 여자> <공항 가는 길>은 지상파의 반격이라 부를 수 있겠다. 최지우는 티브이엔의 드라마 <두번째 스무살>을 통해 순수하면서 악착같은 연기로 차금주 역의 단초를 열기도 했다. 진화한 ‘여자 주인공’ 캐릭터의 지상파 진출은 더 이어질 전망이다. 24일 첫방송 될 월화드라마 <우리집에 사는 남자>(한국방송2)의 수애도 발랄한 스튜어디스로 연기 변신을 한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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