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에서 출생의 비밀만큼 식상한 것이 ‘남장여자’다. 남장여자가 주된 소재인 작품은, 2007년 <커피프린스 1호점>, 2009년 <미남이시네요>, 2010년 <성균관 스캔들> 등 10년간 대략 20편 가까이 쏟아졌다. 2002년 <대망>에 남장이 잠시 등장한 것을 포함하면 30편이 훌쩍 넘는다. 남장을 한 여자 주인공은 정체가 발각될까 노심초사하고, 남자 주인공은 남자한테 끌리는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오랜 기간 별다른 변주도 없는 해묵은 콘셉트인데도, ‘남장여자’ 드라마는 대부분 성공했다. <커피프린스 1호점>은 평균시청률 22.5%(닐슨코리아 집계)였고, <성균관 스캔들>은 시청률은 10%였지만, 온라인을 중심으로 열풍을 탔다. 방영 중인 효명세자(박보검)와 남장여자(김유정)의 사랑을 그린 <구르미 그린 달빛>(한국방송2)도 12회까지 평균시청률 17.4%로, 요즘 드라마에서는 드물게 20%를 오르내리고 있다. 미소년 같은 박보검과 김유정의 사랑 이야기가 순정만화를 보듯 시청자들을 미소짓게 한다. 김성윤 피디조차 “많이 봐왔던 소재라 지금의 유행과 맞을지 고민했다”는데,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남장여자 드라마의 인기에는 ‘사회의 담론’이 있다.
■ 사극 남장, 여성 차별 반기 들다 남장은 투쟁의 역사다. 러시아 최초의 여성 장교 나데즈다 안드레예브나 두로바(1783~1866)는 귀족의 딸로 태어나 당시 여성의 인권이 무시된 답답한 현실에 반기를 들고 남장을 한 채 나폴레옹 군대와의 주요 전투에 참여했다. 여성이 억압받던 시절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남장을 하는 이유는 대부분 이처럼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들이 갖는 한계를 극복해내기 위한 방편이다.
<바람의 화원>(2008년)에선 여성은 화공이 될 수 없던 조선시대 신윤복(문근영)이 화가가 되려고 남장을 했고, <성균관 스캔들>(2010년)의 김윤희(박민영)도 여자는 공부할 수 없던 시절 남장을 하고 성균관에 들어간다. 개화기 조선이 배경인 <제중원>(2010년)에서 석란(한혜진)은 여자는 의사 시험에 응할 수조차 없자 남장을 하고 시험을 본다. <구르미 그린 달빛>은 역적의 딸이라는 걸 감추려고 남장을 한다.
살아남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운명을 거스르는 캐릭터들은 가부장제 속 억압받던 여성들의 자화상이다. 한 드라마 작가는 “남성 커뮤니티에 잠입한 여성이 일과 사랑 모두를 쟁취한다는 설정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남성 중심 사회라는 점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시대에 반기를 드는 주체적인 여성은 그 자체로 드라마적 성공 요소다. 각종 장애와 고난을 예고하며 긴장감을 선사한다”고 말했다.
■ 현대의 남장, 여성 고용불안 비추다 여성의 인권이 높아진 오늘날에도 남장여자가 흥미로운 이유는 뭘까. 사극에서 신분과 유교 관습 등의 억압적 현실을 돌파하는 방법으로 남장을 선택했다면, 현대물에서는 경제적인 문제, 대부분 청년취업과 맞닿아 있다. <커피프린스 1호점>의 고은찬(윤은혜)은 가세가 기우는데다 생활력 없는 엄마와 여동생을 보살피려고 남자 직원만 모집하는 카페에 취직하기 위해 가슴에 붕대를 감는다. <설련화>(2015년)에서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버는 한연희(이지아)는 거액의 연봉에 혹해 머리를 자르고 남장을 하고 게임 회사에 입사한다.
드라마를 위한 허황된 설정이 아니다. 한 설문조사에서 한국 기업의 인사담당자 절반은 여성보다 남성을 선호한다고 했다. 김선영 대중문화평론가는 “현대물의 남장드라마는 오늘날 여성의 고용불안을 담고 있다”며 “아직도 남녀의 성역할에 대해 보수적인 시선은 여전하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그대에게>(2012년)나 <네일샵 파리스>(2013년)처럼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려고 남장을 하고 전학을 가고 취업하는 등 사랑에 적극적인 요즘 젊은 세대를 반영한 ‘남장여자’도 있었다.
■ 하렘물 남장, 동성애를 논하다 남장여자 드라마의 인기를 두고 “여성을 위한 하렘물(남자가 여러 미소녀와 나오는 작품)”(김선영 평론가)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남장여자 드라마가 흥미로운 점은 시대의 화두인 동성애 코드를 거부감 없이 멜로 요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남자 주인공은 약속이나 한 듯 남장을 한 여자 주인공한테 마음이 흔들린다. 남자인 걸 알면서도 가슴이 뛰는 걸 주체할 수 없어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과정을 어김없이 거친다. <커피프린스 1호점>의 최한결(공유)은 “네가 남자건 외계인이건 상관 안 해. 가보자. 갈 데까지”라며 대놓고 남자를 사랑하겠다고 공표하기도 했다. <구르미 그린 달빛>도 남자와 남자의 모습으로 키스를 한다. 남장여자 드라마의 묘미는 남자 주인공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복잡한 감정선이 여느 드라마보다 훨씬 잘 드러나면서 여성 시청자가 남자 주인공에 더 이입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김선영 평론가는 “남장여자 드라마는 남자 주인공의 고뇌에 재미가 있다”며 “그래서 남자 주인공이 매력적이어야 성공한다”고 했다.
■ 남장의 취지를 좀 더 살렸으면 남장이 남성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또 로맨스를 위한 장치의 일부로만 소비되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차별에 맞서기 위해 전략적으로 남장을 하지만, 이는 결국 로맨스로 이어지고, 결국 아리따운 여자로 돌아온다. <구르미 그린 달빛>도 남장은 거들 뿐, 그들의 로맨스에 치중한다. 연기에서도 내용에서도 모두 호평받은 대표적인 남장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은 원작 소설보다 김윤희의 삶에 더 깊이 파고든 게 주효했다. 남녀가 유별하다는 가르침에 “여자도 남자와 다르지 않다. 학문이란 질문하고 의문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냐. 여자도 인간이고 싶다”고 맞선 김윤희의 절규가 가슴을 때렸다. 한 지상파 드라마 피디는 “<구르미 그린 달빛>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조금 더 깊이 있게 드러나면 더 좋은 작품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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