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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KBS 대하사극이 어찌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이더냐

등록 2016-09-09 09:00수정 2016-09-10 11:12

<정약용> 제작 무산…정통사극의 위기

<용의 눈물> <태조 왕건> <대조영> 등
대하사극 명맥 이어온 한국방송
“제작비 대비 수익 적어” 편성 취소
제작환경 변화에 정통사극 ‘쇠락의 길’
편수 축소, 돈 드는 전투신도 줄여
“공영방송사로서의 가치 보여줘야”
일 NHK는 대하사극 50년간 방송중
‘지난 31일 제작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 편성 취소 최종 결정이 났습니다. 먼저 알려드리는 것이 도리인 것 같아 우선 이렇게 문자로 소식을 전합니다.’

내년 1월 방영 예정이던 <한국방송1>(KBS1) 대하사극 <정약용>의 연출을 맡았던 한준서 피디는 지난 1일 출연자들한테 단체 문자를 보냈다. 이달 중순 첫 촬영을 목표로 대본이 12부까지 나왔고, 4일 대본 리딩까지 잡혀 있던 상황에서 갑자기 제작이 무산된 것이다. 29일 한국방송 제작투자회의에서 최종 결정했다고 알려진다. 이유를 요약하면 이렇다. “돈 들어갈 곳은 많은데, 경영이 악화되어 돈은 없고, 그러면서 제작비 대비 수익이 없는 대하사극을 보류시키기로 했다.”(한국방송 고위 관계자) 방송사는 보류라고 하지만, 사실상 폐지로 보는 시각이 많다. 대하사극의 명맥이 끊기는 게 아니냐는 위기론이 다시 커지고 있다.

■ 미디어 환경 변화로 2008년부터 쇠락 한국방송 대하사극은 1981년 봉림대군 효종과 김상현 장군의 이야기인 <대명>을 시작으로 35년간 40편을 선보였다. <문화방송>(MBC)이 <조선왕조 500년> 등을 내보내다가 정통 사극을 없앤 것과 달리 공영방송사로서 명맥을 유지해왔다. 1996년 <용의 눈물>이 평균 시청률 20%대를 기록하면서 본격적 대하사극 시대를 열었다. <태조 왕건>(2000~2002년) 39.7%, <대조영>(2006~2007년) 26.8%까지 10년 가까이 레드카펫을 밟았다. 2000년 <태조 왕건>은 최고 시청률이 60.2%를 찍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대왕 세종>(15.3%)을 시작으로 쇠락길에 접어들었다. 가장 최근 방송한 <장영실>은 11.5%에 그쳤다.

대하사극의 하락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맞물린다. 2008년께 퓨전 사극이 대두하면서 재미를 추구하는 경향이 짙어졌고, 2010년 들어서는 유튜브 등의 영향으로 스낵컬처(짧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호흡이 긴 사극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소재의 한계도 왔다. 2010년 <명가> 등 대하사극에 정치색을 입힌다는 의혹도 일면서 예전 같은 묵직함에 금이 가기도 했다.

달라진 제작 환경도 위기론을 불러왔다. 2008년 이후 한류 열풍으로 배우들의 출연료가 폭등했고, 해외 수출에 용이한 소재를 담은 드라마가 쏟아졌다. 한국방송의 한 드라마 피디는 “금융위기로 경기가 어려워지고, 케이블 등의 약진으로 광고 나눠먹기로 수익이 떨어지면서 지상파도 경영의 어려움을 겪게 됐다”고 했다. 한국방송은 올해 1~4월 누적광고 매출에서 문화방송은 물론 케이블 채널 <티브이엔> 등을 포함한 씨제이이앤엠에도 밀려 3위를 차지했다. 사극을 연출했던 문화방송 한 고위 간부는 “정통 사극을 잘 쓰는 작가도 없고, 한류 열풍을 타면서 젊은 배우들도 호흡이 긴 정통 사극에 출연을 꺼린다”고 했다.

■ 방송사 적자에 편수, 제작비 축소화 방송사가 어려워지니 대하사극은 단숨에 애물단지가 됐다. 대하사극은 광고가 없는 한국방송 1채널에서 방영되어 광고 수익은 없다. 해외판매 등 부가수익이 있기는 하지만, 인기 드라마에 견줄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수익보다는 공영채널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내보내는 것이다. 수익에 견줘 총제작비는 많다. 회당 제작비는 미술비 포함 3억~4억원으로 보통 미니시리즈 사극보다 적지만, 편수가 길어 전체 제작비는 대개 100억원 이상 들어간다. 그나마도 최근에는 2억원 남짓으로 줄었다. <불멸의 이순신> <대조영>이 약 350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전투 장면이 별로 없었던 <정도전>도 약 110억원이었다. <정약용>은 70억 정도가 책정됐던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방송의 또 다른 드라마 피디는 “대하사극을 한 편 만들지 않으면 적어도 100억원이 남으니, 경영진 입장에서는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라면 당연히 고민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달만 내보내지 않아도 8~16억원이 절감되는 셈이다. 이런 연유로 2008년 이후 대하사극은 꾸준히 축소되어 왔다. 200부에서 100부, 50부로 줄더니 최근에는 24부까지 줄었다. 2014년 방송사 전체 예산을 대폭 줄이면서는 대하사극을 1년에 한 편으로 줄였다. <대왕의 꿈>이 끝나고 7개월 쉰 뒤 <정도전>을 내보냈다. 내년 1월 방영 예정이던 <정약용>도 지난 3월 <장영실>이 끝난 이후 6개월 만이었다.

■ 전투신 줄이고…제작진도 명맥 유지 안간힘 대하사극 제작진도 고심해왔다. 돈이 가장 많이 투입되는 대규모 전투 신(장면)을 줄이기도 했다. <정도전>도 이야기를 벌이지 않고 황산벌 전투와 위화도 회군 두개만 집중했다. 심각하지 않고 전개 빠른 드라마를 좋아하는 시청자들의 입맛에 맞추려고 미니시리즈 스타일로의 변화도 시도했다. <정도전>은 3회 만에 공민왕이 죽는 등 미니시리즈처럼 빠른 전개로 화제를 모았다.

2008년 대하사극이 어려워지기 시작하면서는 <대왕 세종> 방영 도중 한국방송1에서 한국방송2로 채널을 옮겨 내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정통 사극이 수익성을 생각할수록 작품의 질은 반비례했다는 뼈아픈 지적도 나온다. 사극을 연출한 적 있는 한 프리랜서 피디는 “해외에서 먹히는 한류 스타를 섭외하고, 극적인 내용을 삽입해야 하는데, 그러면 퓨전 사극이 되지 않겠느냐”며 “정통 사극에서 수익성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 한국방송 수신료의 가치 한국방송 고위 관계자는 “오죽 어려우면 그러겠느냐”고 하소연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대하사극을 포기하는 것은 한국방송이 공영방송사로서의 의무를 내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대하사극은 한국방송의 공영방송사로서의 가치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했다. 일본 공영방송사 <엔에이치케이>도 1960년대부터 50년간 대하사극을 방송하고 있다. “퓨전사극이 난무하는 시대에 대하사극만이 줄 수 있는 교육적인 가치”도 강조한다.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서는 임진왜란 당시의 역사를 훑고, <징비록>을 보면서는 임진왜란이 왜 일어났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김상휘 피디는 <징비록> 제작발표회에서 “대하드라마는 교육적 기능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했다. 배우들도 대하사극의 가치를 강조한다. <정도전>에 나왔던 배우 조재현도 제작발표회에서 “역사 왜곡이 난무한다. 그럴수록 정통 사극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대현 전 한국방송 사장은 지난해 2월 <징비록> 제작발표회에서 “금년부터는 대하드라마가 끊이는 일이 없게 하겠다”고 했다. 경영진이 바뀌자 또다시 대하사극의 위기론이 반복되고 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사진 한국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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