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도>라는 4부작 단편드라마(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가 있다. 미국 드라마 덕후들도 고개를 갸웃거릴 이 작품은 미국 코미디 프로그램 <매드 티브이>가 한국 드라마를 패러디한 영상물이다. ‘얼굴도 모르던 남남이 사소한 인연으로 단번에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그 사람이 갑자기 병에 걸리고, 삼각관계가 나오고, 알고 보니 재벌이고….’ 한국 드라마에서 공식처럼 등장하는 설정들을 모아 패러디물을 만들었다. 웃자고 만들었지만, 보다 보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미국이 심하다고? 2007년 일본 드라마 <친애하는 아버님>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뭐야 한국 드라마잖아!”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내 친아버지 같다는 주인공의 얘기에 지인이 내뱉은 말이다.
출생의 비밀, 재벌, 우연의 반복 등은 한국을 넘어 세계시장이 ‘알아주는’ 글로벌 공식이 됐다. 로맨틱 코미디, 스릴러 등 뻔한 공식은 장르를 넘나든다. 방영 중인 주말드라마 <가화만사성>(문화방송)에서 이필모가 시한부 판정을 받자 한국 드라마의 이런 뻔한 설정들이 또다시 입에 오르내린다. 이런 식상한 공식들은 21세기 드라마에서도 왜 끝없이 반복되는 걸까.
■ 로맨스? 한 공간에 몰아넣어! 가수 유희열이 오래전 라디오에서 한 말이 유행어였다. “(애인?) 생길 것 같지? 안 생긴다!” 현실의 솔로들은 그렇게 외로운데, 한국 드라마에서는 연애가 참 쉽다. 공식이 있다. 생판 남남이던 이들은 꼭 안 좋은 첫만남을 가진 뒤 얽히고설키며 사랑에 빠진다. <운빨 로맨스>(문화방송)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가던 류준열과 술에 취한 황정음이 부딪혀 넘어진다. 이런 이들이 두 번 만날 확률은 ‘기적’이라는데, 한국 드라마는 다 방법이 있다. 한 공간에 몰아넣어! 남녀 주인공들은 꼭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거나, 거래처이거나, 옆집에 산다. <운빨 로맨스>는 이상한 첫 만남 이후 류준열 회사에 황정음이 계약직으로 들어오고, <또 오해영>(티브이엔)은 문만 열면 연결되는 곳에서 동거 아닌 동거를 한다. <아이가 다섯>(한국방송2)도 안재욱과 소유진이 한 회사에서 과장과 대리로 만났다. <가화만사성>에서는 김소연과 이상우가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고, 편의점에서 만나기를 반복하더니, 요리교실 선생과 제자로 만난다. 황정음을 “이상한 여자”라고 하던 류준열은 반복된 만남 속에 사랑이 싹튼다. 한 드라마 작가는 <한겨레>에 “외국처럼 등장인물이 많지 않은데 시간은 긴 한국 드라마 특성상,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려면 주인공들이 한 공간에 있는 게 기본이다”라고 했다.
■ 남자는 틱틱, 여자는 씩씩 한국 드라마에서 남녀의 성격은 딱 두 가지다. 남자는 틱틱대면서 잘해주는 ‘츤데레’고, 여자는 씩씩하면서 착하다. 남자들은 <돌아와요 아저씨>(에스비에스)처럼 재벌 2세가 기본이다. 최근 들어 전문직으로 내려온 게 다행일까. 모두 한 가지 아픔을 갖고 산다. 여자와 관련된 게 많다. <아이가 다섯> 안재욱은 아내와 사별했고, <또 오해영> 에릭은 첫사랑이 결혼 전날 떠났다. <그녀는 예뻤다>의 박서준처럼 부모가 비 오는 날 교통사고를 당해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아픈 남자’도 단골이다. 그래서일까, 한국 드라마 속 남자들은 대개 속마음을 감추고 겉으로 틱틱댄다. 그러나 활기찬 여자 주인공을 만나 아픔을 치유하고 새 인생을 다짐한다. 한 드라마 작가는 “드라마 주요 시청자가 여자이기 때문에 등장하는 설정”이라며 “아픈 남자는 내가 보듬어 바꿔주고 싶은 보호본능을 자극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은 왜 꼭 친구가 한 명뿐일까.
■ 결혼? 반대해야 제맛! 티격태격하다가 사랑에 빠지면 끝? 한국 드라마는 ‘우리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남녀 주인공을 좋아하는 삼각, 사각 관계들이 반드시 존재해 그들을 괴롭히거나 오해하게 만든다. 주인공의 엄마들은 반드시 결혼을 반대한다. ‘누구라도 데려오라’며 쉽게 허락하면 한국 드라마가 아니다. 최근 한 뉴스에서는, 미국 프린스턴대학의 우베 라인하르트 경제학 교수가 한국 드라마의 다양한 특징을 분석한 ‘한국 드라마 개론’에서 “결혼에 대한 부모의 입장과 현대적인 신세대의 입장 갈등이 주는 긴장이 흥미롭다”고 했다고 전했다. 엄마들이 반대하는 이유도 똑같다. 재산 차이. <아이가 다섯>에서도 엄마 송옥숙은 평범한 학교 선생님과 결혼하겠다는 딸을 반대했고, 박혜숙은 안재욱과 심형탁 두 아들의 결혼을 죄다 반대했다. 그런데도 만남이 이어지면, 엄마들은 행동한다. 아들과 헤어지는 조건으로 돈을 건네거나 쌍심지를 켠다. “어머니라고 부르지도 마!”(<아이가 다섯>) 그래도 결론은 늘 해피엔딩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잖아.”(<아이가 다섯>)
■ 사건 해결? 시한부면 만사 오케이! 남녀 주인공의 만남은 결혼 반대, 주변의 이간질 등 고비의 연속이다. 어떤 사건으로 둘 사이가 어긋나기도 한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다. 한국 드라마에서 모든 사건은 이 한마디로 해결된다. ‘시한부입니다.’ 한국 드라마에서 시한부 생명 선고는 사건 해결의 열쇠로 활용된다. <가화만사성> 이필모는 악성 신경교종으로 6개월 밖에 못 산다는 선고를 받은 뒤 달라졌다. 차갑게 대했던 전 아내 봉해령(김소연)의 소중함을 뒤늦게 알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부탁해요 엄마>(한국방송2)도 엄마 고두심이 시한부 판정을 받은 뒤 가족의 모든 갈등이 봉합되고 훈훈하게 마무리됐다.
시한부는 곳곳에 요긴하다. 지난 4월 끝난 <결혼계약>(문화방송)은 유이의 시한부 판정이 이서진과 ‘계약 결혼’하는 계기가 됐다. 한 드라마 피디는 <한겨레>에 “아프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 안타까움 등으로 시청자들의 몰입도를 높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굿바이 미스터 블랙>(문화방송)에서 이진욱이 시한부 판정을 받은 날 시청률이 올랐다. 그래도 이건 좀 너무했다. 올해 방영한 드라마 42개 중에서 시한부 생명 설정이 등장하는 드라마는 15개다. 문화방송 아침드라마 <내일도 승리> <좋은 사람>에는 연이어 시한부 설정이 등장했다. 그런데 드라마 속 시한부 판정은 왜 죄다 3개월이거나 6개월일까. <천상의 약속> 이유리도 시한부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 피디는 “방영 기간과 연관되는 것 같다. 보통 미니시리즈에서는 시한부 3개월, 다른 드라마들은 6개월일 때가 많다”고 말했다. “안타까움을 더하려면 3~6개월이 적당한 것 같다”는 의견도 있다.
■ 신종 법칙은 죄다 초능력자? 남자 주인공은 꼭 샤워를 하며 생각에 빠지고, 운전하다가 뭔가 결심한 듯 유턴을 하고, 현실에서는 그렇게 잡기 힘든 택시가 손만 뻗으면 오고, 비밀은 꼭 엿듣기로 알려지는 등 말하면 입아픈 공식들은 즐비해 있다. 최근에는 신종 법칙도 등장했다. 바로 특별한 능력. <또 오해영> 에릭은 서현진과 관련된 미래를 내다보고, <미녀 공심이>(에스비에스) 남궁민은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를 식별해내는 동체 시력을 갖고 있다. 판타지 드라마에서나 나오던 것이 <별에서 온 그대>(에스비에스) 이후 일상화됐다. 결국 드라마 속 뻔한 설정도 인기 끈 드라마를 좇아가는 현상일까?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기존 공식을 따르더라도 작품의 완성도가 높고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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