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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눈물나게 웃기고 싶다, 무대에서

등록 2016-05-15 18:55

배트맨보다 되기 어려운 ‘개그맨’…그 눈물겨운 합격기

횟집서 알바하고…회사 그만두고
네다섯번 공채 떨어지는 건 기본
10년만에 방송사에 입성하기도
“포기해야하나 할때 무대 떠올려”

성대모사보다 코너 아이디어·연기력
올해 공채는 SBS뿐…“좁디좁은 문”
61대1 뚫은 13명 밤까지 연습 삼매경
“초심 잃지않고 개그맨 위상 높일것”
개그맨.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엄마, 나 붙었대…”라고 말하는데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2006년부터 10년째. 강산이 변하는 세월 동안 간절히 하고 싶던 한마디였다. 이 말이 대체 뭐라고 나의 20대를 온전히 내던졌던 걸까. 주마등처럼 세월이 스쳐 지나갔다. “대한민국을 웃기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2007년 대학로 극단(갈갈이 패밀리)에 들어갔다. 아이디어를 짜며 숱하게 지샌 밤들의 고통이 하나둘 살아났다. 호나우디뉴 흉내를 낼 때마다 사람들은 나를 보며 웃었지만, 꿈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어느덧 우리 나이로 서른. “포기해야 하나” 내려놓으려던 찰나 문이 열렸다. 10년간 12번의 두드림 끝에 지난 4월, 김지영은 꿈에 그리던 개그맨이 됐다. <에스비에스>(SBS) 공채에 합격한 것이다.

“안녕하세요 에스비에스 16기입니다.” 지난 10일 찾은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하 <웃찾사>) 대학로 극장에는 13명의 ‘김지영’이 있었다. 에스비에스가 지난달 뽑은 신인 개그맨들이다. 모두 방송사를 오가며 여러번의 도전 끝에 어렵게 꿈을 이뤘다. 김지영이 12번으로 가장 많고, 박종욱이 10번이다. 한송희가 4번 만에 붙은 것이 가장 짧다. 지상파와 케이블을 통틀어 공채 개그맨을 뽑는 곳은 <한국방송>(KBS2)과 에스비에스 두 곳뿐이다. <티브이엔>(tvN)은 가끔 특채로 선발한다. <문화방송>은 없어진 지 몇년 됐다. 그나마도 한국방송이 올해 공채 개그맨을 뽑지 않을 전망이라 에스비에스는 유일한 길이었다. <웃찾사> 안철호 피디는 “공채 개그맨 선발도 줄어드는 등 갈수록 개그맨이 되는 길이 좁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숱한 도전 끝에 꿈을 이룬 에스비에스 16기 공채 개그맨들. 왼쪽부터 앞줄 김선정, 김지영, 김진주, 한송희, 둘째 줄 박지성, 고권오, 김종원, 조훈, 셋째 줄 박종욱, 주희중, 이용주, 김민수, 이선민. 위 사진은 지난달 열린 공채 선발 경연 장면.
숱한 도전 끝에 꿈을 이룬 에스비에스 16기 공채 개그맨들. 왼쪽부터 앞줄 김선정, 김지영, 김진주, 한송희, 둘째 줄 박지성, 고권오, 김종원, 조훈, 셋째 줄 박종욱, 주희중, 이용주, 김민수, 이선민. 위 사진은 지난달 열린 공채 선발 경연 장면.
총 지원자 800명. 61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꿈을 이룬 지 3주째. 이들은 매일 대학로 극장에 출근한다. 연기 연습부터 코너 짜기 등 다양한 교육을 받고 있다. 개그프로그램에 기승전결을 갖춘 이야기가 있는 꼭지(코너)가 많아지면서, 개그맨한테 웃기는 능력 외에 연기력도 중요해졌다. 극장을 찾은 지난 10일도 선배 권성호 앞에서 직접 짠 대본으로 연극을 선보이고 있었다. 권성호는 “몇년 전부터는 정극 연기 훈련을 많이 시킨다”고 말했다. 덩달아 공채 시험 수준도 높아지고 있다. 성대모사 등 특기가 많고 얼굴만 웃긴다고 합격하는 건 옛말. 프로 못지않은 완성된 꼭지를 갖고 나와야 한다. <웃찾사> 공훈철 피디는 “수년 전부터 완성된 꼭지로 심사를 맡고, 성대모사 등 장기는 부수적으로 보여주는 식으로 바뀌었다”며 “꼭지 짜는 능력부터, 개그감, 연기력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 13명도 지난달 있은 선발에서 ‘꼭지+장기’로 구성했다. 박종욱은 인질극이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에서 형사와 납치범의 황당한 대화가 재미를 주는 꼭지를 한 뒤, 김구라, 이서준(개그맨 이휘재 아들)을 닮은 외모를 활용한 장기를 선보였다. 김진주는 혼자 나와서 ‘웃음전도사’가 된 1인극을 하고, 내레이터 모델을 흉내 냈다. 박종욱은 “주어진 3분의 연기를 위해 1년 동안 연습했다”고 했다. 극에 필요한 다른 역할은 친구들이 돕고, 효과음, 소품도 알아서 준비해 오는 등 <웃찾사> 꼭지 검사를 하는 것과 다름없다.

‘합격’이라는 두 글자를 들으려고 흘린 땀만 폭포수다. 개그맨이 되려고 모두 대학에서 개그를 전공하거나 대학로 극단에서 오랜 세월 활동하며 고생했다. 물리학과를 나온 고권오는 2007년부터 허둥홀과 빛누리 등 다양한 극단에서 개그감을 익혔다. 충남 금산이 고향인 그는 “개그를 하고 싶어서 대학 졸업 뒤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대학로 극단에 들어갔다”고 한다. 24살로 가장 어린 한송희는 21살 때부터 극단에서 생활했다. “어린 나이여서 상처도 많이 받고 힘들기도 했다.” 이번 공채에서 고배를 맛봤지만 대학로 소극장에서 밤 9시까지 공연한 뒤, 웃찾사 공연장 인근의 패스트푸드점에서 새벽 아르바이트를 하며 웃찾사 무대에 서는 날을 동경한 지원자도 있다. 방송예술학과를 나와 극단 함바꿈 등에 들어간 김진주는 “아버지가 개그맨이 되려고 방송연예과에 가는 걸 반대해서 학자금 대출을 받고 학교에 다녔다”며 “개그맨이 되려고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다”고 했다. 김선정은 개그맨이 되려고 다니던 회사도 그만뒀다.

부모의 반대가, 현실의 고난이 개그의 열정을 앞설 수는 없다. 이들은 “개그 무대에 서는 날을 동경하며 힘든 순간을 버텨왔다”고 한다. 정작 이들이 포기하고 싶게 만든 건 정처 없이 흐르는 세월이다. 이번에 합격한 13명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김지영은 “28살쯤 되니까, 자신감이 떨어지더라. 다른 일을 함께 하면서 개그를 하다가 올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시험을 봤다”고 말했다. 5번 만에 붙은 주희중은 “매년 떨어지니까 세월은 흐르는데 앞은 막막하고. 1~2년 더 해보고 안 되면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종원과 박종욱은 다른 일을 하기도 했다. 박종욱은 “돈을 벌어야 해서 개그를 포기하고 횟집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했다. 다시 돌아온 이유는 단 하나다. “남들 앞에서 웃기고 싶다”(이용주)는 생각. “개그맨으로 유명해져서 돈도 벌고 싶다”(박종욱)는 현실적인 바람도 있다.

어렵게 개그맨이 됐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개그콘서트>의 명성이 예전만 못하고, <웃찾사>도 시청률이 낮은 등 개그프로그램이 전반적인 침체기를 겪고 있다. 개그맨의 위상은 예나 지금이나 높지 않다. 버라이어티에서 활약하지 않는 이상, 개그프로그램에만 출연해 부와 명성을 얻기란 쉽지 않다. 수년간 오뚝이처럼 한길만 바라보며 넘어져도 일어섰던 이들은 누구보다 잘 안다. 이선민은 “개그보다 더 웃기고 자극적인 1분 남짓의 짧은 영상을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여서, 4~5분 하는 개그프로그램을 집중해서 보려는 이들은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그는 “다소 엉뚱할지라도, 10초 정도 나오더라도 사람들 뇌리에 기억되는, 기존에 없던 다양한 시도를 하겠다”고 말했다. 조훈도 “인터넷에서 소비되는 콘텐츠와 달리, 지상파 프로그램은 작품성이 있어야 한다”며 개그프로그램의 수준을 지키면서 재미를 주는 방식을 고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박지성은 “스타가 없어서 침체기가 온 것도 있다. 반드시 스타가 되겠다”고 자신했다.

“너 정말 웃긴다. 개그맨 해라”는 이야기를 밥 먹듯 듣고 자란 이들이 드디어 ‘개그맨’의 타이틀을 쥐었다. 매일 오후 6시에 정식 연습이 끝나면, 누구랄 것도 없이 지하철 막차 시간까지 남아 아이디어를 짠다. “13명 모두 잘돼서 개그맨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또 다른 바람은 이뤄질 수 있을까. 이제 시작이다. 13명 중 누군가는 무대에 남고, 누군가는 사라질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단 하나,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라는 김종원의 고향 제천 봉양읍 팔송리에는 이런 현수막이 걸렸다. ‘김동주, 엄순자의 아들 김종원 에스비에스 공채 16기 개그맨 선발대회 합격.’

글·사진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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