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리틀 텔레비전'으로 2015년을 빛낸 박진경 피디가 16일 서울 상암동 <문화방송> 사옥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입사 면접 당시 “이 사람들이 미치지 않고야 나를 뽑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는데 첫 도전에 합격했고 첫 메인 연출 입봉작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감추고 부풀리는 건 통하지 않았다. 2015년 티브이(TV)는 시청자와 ‘까놓고 소통’했다. 연예인들이 1인 방송으로 숨겨뒀던 장기를 보여주고(<마이 리틀 텔레비전>), 차승원의 아줌마 같은 실제 성격이 상반기를 휩쓸었다. 실수도 하고, 설탕도 좋아하는 인간미 넘치는 셰프들의 인기가 대단했고, 내 이웃 같은 조연들, 지질한 내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B급 콘텐츠도 화제를 모았다. 화려한 연예인은 가라. 땅에 발을 디딘 2015년 티브이를 돌아봤다.
“엄마가 게임만 하더니 성공했대요”
대상 입봉작서 대박 친 박진경 피디
뭐랄까, 좀 더 들떠 있을 줄 알았다. “피디로서 뭔가 해낸 것 같아요” “성공해서 기뻐요” 정도의 말은 해도 되지 않나.
“그런 감흥을 느낄 시간이 없어요. 매일 할 일이 쌓여 있어서. 일이 너무 힘들거든요. 성격이 원래 무디기도 하고.” 그래도, 그래도라며 묻고 또 물어 쥐어짜 받은 소감은 이 정도다. “맞아요. 상을 받은 것은 기뻐요. 올해 정말 많은 상을 받았어요. 특히 ‘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상’(티브이예능부문 최우수상)과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국무총리 표창)은 포맷의 힘을 인정해준 것 같아 기분 좋았어요.” 일희일비하지 않는 무던함이 성공의 비결이었을까. 2015년 지상파 예능계를 뒤집어놓은 <마이 리틀 텔레비전>(<마리텔>)을 만든 박진경(33) 피디를 16일 서울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인터넷을 공중파에 끌고온 이단아
‘마리텔 호평’ 소감 재차 물어봐도
“제 성격이 무뎌서 잘 모르겠어요”
대학시절 미쳐있던 게임·메탈 요소
자막·효과음·음악 등으로 적극사용
“내년요? 마리텔 변화 고민이에요”
어제 샀다는 털이 복슬복슬한 그의 모자처럼, 2015년 예능계는 풍성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삼시세끼>시리즈와 19금, 육아 예능의 여전한 인기에 쿡방이 가세했다. <일밤-복면가왕>으로 노래에 장치를 심은 추리 음악 예능도 다시 한번 휘몰아쳤다. 그 대부분이 기존 포맷에 살을 붙인 것과 달리, <마이 리틀 텔레비전>은 전혀 새로운 포맷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2015년 방송계 왕좌에 오를 만하다. 올드미디어로 취급되던 티브이가 인터넷, 1인 방송 등 뉴미디어를 포용하며, 변화된 미디어 환경을 영리하게 활용했다. 유행을 선도하는 케이블 방송을 따라다니기 바빴던 지상파 예능의 자존심을 살렸고, 2014년 1월 <일밤-아빠 어디가 시즌1>이후 죽만 쑤던 문화방송 예능을 회복세로 돌렸다. “그냥 남들이 했던 포맷을 따라 만드는 걸 너무 싫어해요. 안 해본 포맷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인터넷 문화를 공중파로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인터넷을 사용하는 젊은 세대들만 잡자”고 생각했다는데, 신구의 융합까지 이뤄졌다. 이말년 등 인터넷 스타도 나오지만, 헤어디자이너 같은 평범한 직업군이나, 이혜정 요리연구가 등 다양한 세대들이 좋아하는 출연자들이 등장한다. 인터넷 채팅이 익숙지 않은 이혜정이 돋보기를 쓰고 빠르게 넘어가는 작은 글자를 읽으며 누리꾼과 소통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우리 프로그램의 키워드는 소통이에요.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에 익숙한 시청자들을 다 잡으려는 욕심은 있어요.” 딱딱한 인터넷이 모태이지만, 김영만 종이접기 아저씨가 잊고 지내던 순수했던 동심을 건드리는 등, 출연자에 따라 다양한 감정과 마주하게 한다.
지상파 예능을 두고 문화적, 미디어적 분석이 쏟아진 게 얼마 만인가. 메인 연출 입봉작에서 대박이 터지기는 쉽지 않다. 김구라는 “(박진경) 피디여서 이 프로가 나왔다”고 말했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는 2008년 피디가 되기 전에 게임, 컴퓨터, 음악으로 점철된 ‘박진경의 인생’이 녹아 있다. 스스로 “중독자였다”고 말할 정도로 게임을 좋아한다. “엄마가 그래요. ‘맨날 게임만 하더니 게임 같은 거 만들어 성공했구나’라고.” 음악에도 미쳤다. “대학 때 밴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쳤고, 외국 공연 실황 비디오를 사 모으기도 했고. 특히 메탈을 좋아해요.” “피디가 자막을 쓰는지도 몰랐을 정도”로 관심 없던 그가 문화방송에 지원한 것도 “2007년 문화방송에서 메탈리카 공연 실황을 보다가 자막으로 나온 공고 때문”이다. “운이 좋았던 게 필기 시험 주제가 뮤직비디오 콘티 짜기였어요.”
범상치 않은 ‘움짤’ 등 편집 센스가 만점이라는 점에서 그는 김태호 피디를 연상케도 한다. “입사 뒤 <무한도전>조연출을 3년 가까이 하면서 김태호 피디한테 예능을 배웠어요.” “번득이는 아이디어보다도 피디한테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실함과 책임감”이라며 피디는 직장인임을 강조하는 부분은 나영석 피디와도 닮았다. 적당히 튀고, 적당히 평범하고. 그래서일까. 박진경 피디한테 두 피디의 현재 모습을 기대하기도 한다.
2016년에는 무엇을 기대할까. “마리텔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고민해요. 세트를 벗어나고도 싶고, 음악 등 티브이에서 소외된 장르도 활용하고 싶고.” 일이 너무 힘들다면서도 시작부터 끝까지 프로그램 생각이다. 본인이 출연자가 되면 어떤 콘텐츠를 기획하겠냐고 물으니 “음악을 선곡해 들려주는 것?”이라고 답했다. 누군가 그 콘텐츠를 가져오면 통과될 수 있을까? 돌아오는 대답이 그답다. “아니요. 너무 평범해요.”
뭐든 다 잘했다상 ‘차줌마’ 열풍 차승원
“와이프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네~”가 신년 유행가처럼 울려 퍼졌다. ‘차줌마’ 태풍이 거셌다. <삼시세끼-어촌편>에서 188㎝의 큰 키에 근육질의 차승원이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쪼그려 앉아 김치를 담그고, 설거지하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말 없는 상남자인 줄 알았더니, 잔소리는 어찌나 심한지 우리 엄마, 옆집 아줌마를 연상케 해 별명이 차줌마(차승원+아줌마)다. 내놓는 것들도 스테이크 같은 ‘고급’ 요리가 아니라 겉절이, 콩자반, 국 등 친근한 ‘생활요리’였다. “집에서도 가끔 요리한다”는 그의 칼질은 전문가 뺨쳤다. “요리의 완성은 뒷정리”라며 행주까지 탈탈 털어 싱크대에 말리고야 손을 놓았다. ‘배우 차승원’에서 ‘사람 차승원’으로 친숙하게 다가왔다. 그의 활약에 요리학원 남자 수강생이 늘었고, 주방용품이 불티나게 팔렸단다. 차승원쪽은 “2015년은 많은 사랑을 받았던 한해였다”며 “특히 <삼시세끼>로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감추고 멋진 척하는 이들보다 실수도 단점도 드러내는 친근한 연예인이 올해 특히 사랑받으면서 <꽃보다 할배>에 출연한 최지우에, 최근 일상을 담은 관찰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고현정까지 시청자에게 꾸밈없이 다가가려는 배우들의 시도가 늘었다.
내가 주연이다상 연기력 순서면 이들이 주연 박혁권
지난해 종편드라마 <밀회>에서 박혁권을 주조연급으로 캐스팅한 안판석 피디는 “연기가 너무 자연스러워 어떤 배역도 소화해낸다”고 말했다. 연기 잘하는 배우가 잘돼야 한다는 평소 생각처럼 박혁권을 2007년 <하얀거탑>부터 꾸준히 섭외했다. <밀회>로 날개를 단 박혁권은 올해 2월 끝난 <펀치>에서 굵직한 조연으로 자리매김하더니 방영중인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보랏빛 눈화장을 한 길태미로 등장해 주연 이상의 존재감을 발휘했다. 박혁권 외에도 주연보다 더 주연 같은 활약을 펼친 조연들이 올해 드라마를 빛냈다. <마을 아치아라의 비밀>의 김민재, <오 나의 귀신님>의 이정은, <용팔이>에 이어 <그녀는 예뻤다>로 2연타를 친 안세하도 있다. <풍문으로 들었소>에는 길해연, 윤복인, 장소연, 백지원 등 연기 잘하는 조연들이 대거 출연해 드라마를 탄탄하게 빚었다. 모두 연극판에서 오랫동안 갈고닦은 기본기가 탄탄하다. 호흡부터 발성까지 길게는 10년 넘게 쌓은 실력이 어떤 역을 맡겨도 소화해내는 믿음을 준다. 2016년은 연기 잘하는 이들의 출연료가 발연기 주연보다 많아지는 해가 되기를.
예능신인류상 백주부, 허세셰프…셰프테이너 활약
틀면 먹고, 틀면 찾아가고, 틀면 만들었다. 한해 요리프로그램만 20개가 훌쩍 넘었다. 쿡방 열풍과 함께 요리사들도 스타가 됐다. 백종원, 최현석, 오세득, 이현복 등 수십명이 티브이에 출연했다. 요리 프로그램은 예전에도 있었지만, 이들은 가르치려 들지 않는 소통하는 요리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몇그램, 몇개 딱딱 맞춰 넣어야 한다고, 내가 정답이라며 자신의 레피시를 주장하던 이전 요리사들과 달리, 시청자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그들한테 배우기도 한다. 간장 말고 된장을 넣어도 된다는 식이다. ‘아 그런 방법도 있었군요’라고 시청자의 의견을 흡수한다. 거창한 요리가 아니라 집에 있는 재료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요리를 만들어주니 1인 가구가 늘어난 요즘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특히 환호받았다. 그러나 인기를 발판으로 홈쇼핑에 출연하는 등 일터를 떠난 요리사들의 잦은 출연에 서서히 피로도가 쌓이고 있다.
통쾌했다상 ‘B급’의 역습 유병재
유병재, 강균성 등 이른바 ‘비(B)급 코드’로 묶이는 연예인들이 예능 대세로 떠올랐다. 유병재는 2013년 <에스엔엘 코리아>의 한 꼭지였던 ‘극한 체험’에서 연예인 갑질에 눈물을 삼키던 주눅맨으로 나와 눈도장을 찍은 뒤 올해 훨훨 날았다. 2002년 데뷔한 강균성은 ‘다중인격’ 같은 성격으로 데뷔 13년 만에 인기를 얻었다. 유병재가 직접 대본을 쓰고 출연한 드라마 <초인시대>등 B급 내음이 물씬 풍기는 프로그램도 쏟아졌다. 남자 연예인들이 모니터 속 여자 연예인과 화면으로 데이트를 하는 일본 오타쿠 문화가 연상되는 <나홀로 연애중>도 있었다. B급 정서 뒤에는 팍팍한 삶 때문에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삼포 세대의 고민이 깔려 있다. 유병재를 보며 나를 투영하는 것이다. 유병재가 지난 6월 거대 기획사 와이지(YG)와 전속계약을 맺자 내 일처럼 기뻐하는 이들도 있었다. “<초인시대>를 통해 청춘들한테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는 유병재의 말처럼, 2016년에는 세상에 통쾌한 한방을 날릴 수 있기를.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