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각 방송사 제공
시대별 ‘못생긴 언니’들의 계보
“내가 봐도 너무 못생겨서 시청자들이 채널을 돌릴까 걱정했다.” <그녀는 예뻤다>(문화방송)에서 ‘못생긴 김혜진’을 연기한 황정음의 소감이다. ‘기우’이거나 ‘거짓말’이었다.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시청률은 10월29일 방송이 18%(닐슨코리아 집계)까지 치솟았다. <그녀는 예뻤다> 돌풍의 일등공신은 황정음이다. 아니 ‘못생긴 언니’ 김혜진이다. 폭탄맞은 듯한 곱슬머리에 주근깨에 홍조 띤 얼굴은 로맨틱 코미디 여주인공이라고 하기에는 ‘못생겼다’. 그러나 남을 배려하는 성격과 늘 씩씩하고 자존감 높은 모습 등이 사랑스러워 시청자들은 열광한다.
‘못생긴 언니’가 드라마 주인공을 맡고 사랑받는 것은 20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다. ‘못생긴 언니’들은 주로 악역이거나 여자 주인공의 친구였다. ‘못생긴 언니’가 당당히 여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은 1996년 영화 <코르셋>의 공선주(이혜은)를 시초로 꼽는다.
■ 1990년대 공선주 “뚱뚱한 건 죄?” 먹고살기 바빴던 1960~70년대는 여성의 외모를 주제로 삼은 작품이 없었다. 1990년대 이후 여성인권운동과 외모 지상주의가 동시에 발현하던 시점에 등장한 인물이 <코르셋>의 ‘공선주’다. 뚱뚱하다는 이유만으로 회사에서 뚱보라고 놀림받는다. 유능한 속옷 디자이너였지만 외모 때문에 실력까지 평가절하될 정도로 당시 뚱뚱한 건 ‘죄’였다. 일도 사랑도 예쁜 후배한테 빼앗긴다. 그러나 그는 주변 시선에 맞춰 코르셋으로 살을 감추려 하다가도, 결국 자신을 바꾸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쪽을 택한다.
하지만 시대가 있는 그대로의 공선주를 받아들이기에는 준비가 안 됐다. 아직은 자신을 감추고 살았던 당시 여성들은 뚱뚱한 여주인공을 연기하는 실제 뚱뚱한 배우를 불편해했다. 1996년 여성 관객이 뽑은 최고의 영화에 선정되었지만, 영화를 위해 15㎏을 찌운 이혜은은 뚱뚱한 외모 때문에 오히려 예쁜 여배우들 틈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드라마를 연출했던 한 피디는 “청순가련 여배우가 사랑받던 시절, 공선주와 비슷한 체형의 여성 관객들이 마치 감추고 싶은 비밀이 드러난 듯 불편해하는 분위기였다”고 회상했다. 이혜은은 지난해 한 방송에 출연해 “뚱녀 꼬리표 때문에 10년 동안 슬럼프를 겪었다”고 했다.
■ 2000년대 초중반 강한나 “외모는 나의 힘! 예뻐져라!” 그 때문일까? 2000년대 들어 성형, 다이어트를 해서라도 예뻐지려는 ‘못생긴 언니’들이 등장했다. 외모 콤플렉스가 심해 자존감이 낮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2006년 영화 <미녀는 괴로워>의 강한나(김아중)는 뚱뚱하고 못생겨서 립싱크 가수로 활동하고,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말도 못하고 속앓이만 할 정도로 소심하다. 노력해서 예뻐져야 했다. 2004년 드라마 <백설공주>의 장희원(오승현)은 성형을 한 뒤 미모를 바탕으로 방송국 아나운서가 된다.
2000년대 들어 휴대폰이 보급화되면서 ‘얼짱’ 등 자신의 사진을 찍어 공개하는 등 외모를 과시하는 문화가 시작됐고, 그런 분위기에 발맞춰 ‘못생긴 언니’들의 변신은 오히려 시청자들이 응원하는 닮고 싶은 노력의 일환으로 인식된 것이다. 이혜은과 달리 실제로 예쁜 여배우들이 특수분장으로 못생겨진 뒤, 다시 짠 하고 예뻐진 모습에 자신을 투영하는 이들이 많았다. 황진미 평론가는 “외모 지상주의에 일침을 가하겠다고 등장한 드라마들이 결국 예뻐져야 일도 사랑도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면서 그 틀을 깨지 못했다”고 말했다.
■ 2000년대 중후반 김삼순·이영애 “보태준 거 있냐!”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생중계가 중단되는 등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자는 분위기가 대두됐다. 드라마에도 ‘못생겨도’ 자존감 높은 언니들이 떴다. 2006년 <내 이름은 김삼순>의 김삼순(김선아)과 2007년 <막돼먹은 영애씨>의 이영애(김현숙)는 뚱뚱한 외모와 이름에 대한 콤플렉스는 있었지만, 살을 빼고 성형해서 ‘개과천선’하지 않았다. 김삼순은 다이어트를 하는 와중에도 식욕을 참지 못하고 보리밥에 열무김치를 비벼 먹으며 “천국이 따로 없다”고 행복해하고, 이영애는 다이어트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통닭을 먹어댄다. 공선주처럼 회사 사람들이 “덩어리”라고 놀리고, 몸 쓰는 일은 죄다 시켜도 그는 공선주처럼 소심하지 않다.
시대도 변해 이런 언니들을 응원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나를 감춰야 했던 시절 공선주는 오히려 나 같아서 사랑받지 못했지만, 김삼순과 이영애는 나 같아서 공감하고 응원했다. 김삼순이 등장한 이후 대한민국 여성의 표준체형이 김삼순 같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궤도에 오른 이때 자존감 높은 ‘못생긴 언니’들은 일로서 당당히 콤플렉스도 극복한다. 김삼순은 파티시에로서 실력이 뛰어났고, 이영애는 작은 회사에 다니지만 거래처에서도 인정받는 디자이너다.
■ 2015년 김혜진 “있는 그대로가 예뻐” 바통을 이어받은 <그녀는 예뻤다>의 김혜진은 못생겼다고 규정짓는 건 외부의 시선이라고 얘기한다. 곱슬머리, 홍조 등으로 김혜진을 못생겼다고 규정하고 바라보지만 않는다면, 김혜진의 원래 예쁜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윤석진 충남대 교수는 “그는 여전한데 사람들이 바뀐 거라는 것, 김혜진이 변해야 하는 게 아니라 외모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드라마”라고 했다.
당당했던 김삼순과 이영애도 예뻐지려고 노력은 했지만, 김혜진은 곱슬머리에 홍조를 고집하며 주변의 시선 때문에 내가 왜 바뀌어야 하느냐고 얘기한다(물론 나중에는 화장도 하고 머리도 풀었지만). 지금껏 ‘못생긴 언니’가 예뻐지자 남자들은 사랑에 빠졌지만, 이 드라마 속 김신혁(최시원)은 김혜진이 예뻐지려는 몸짓을 보이자마자 이렇게 말한다. “왜 그래 잭슨. 옛날로 돌아가.”
‘힐링’, ‘소통’이 키워드가 된 시대와 맞물려 ‘못생긴 언니’가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켜나가는 중심에 선 점도 달라진 양상이다. 김혜진은 끊임없는 배려로 주변 사람들을 하나둘 변화시켜 나간다. 2013년 영국 경제전문지가 보도한 인구 대비 성형수술 횟수 1위인 대한민국에서 ‘못생긴 언니’는 시대의 멘토로 부각되는 걸까. 아님 그마저도 못생겼기에 추구해야 하는 생존전략의 변형일 뿐인 건가.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사진 각 방송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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