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을 훔치는 자가 시청자의 마음도 훔친다. 잠깐 나와도 주연 못지않은 존재감을 발휘하는 ‘신 스틸러’들이 화제를 모은다. 사진은 <티브이엔>의 드라마 <식샤를 합시다 시즌2>에 출연 중인 황석정.(가운데) 티브이엔 제공
주인공을 배경으로 만드는 ‘신스틸러’
연극서 쌓아온 연기 내공 커
잠깐만 출연해도 존재감 폭발
드라마 완성도 높이는 데 한몫
연극서 쌓아온 연기 내공 커
잠깐만 출연해도 존재감 폭발
드라마 완성도 높이는 데 한몫
요즘 드라마는 ‘신 스틸러’(Scene Stealer)들이 살린다. 직역하면 ‘장면을 훔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잠깐 나와도 주연 못지않은 존재감을 발휘하는 조연이나 단역을 일컫는 표현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김광규, 박혁권, 라미란 등이 있지만, 최근 드라마에서는 <풍문으로 들었소>(에스비에스)에서 한정호의 법무법인 ‘양 비서’로 나오는 길해연이나, <식샤를 합시다 시즌2>(티브이엔)의 부동산 주인 황석정, 7일 종영한 <앵그리 맘>(문화방송)의 이경의 엄마 소희정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신 스틸러들의 활약은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그러나 조연이라고 모두 장면을 ‘훔칠’ 수 있는 건 아니다. 잠깐 나와도 자신만의 강렬한 무기가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오랜 세월 갈고닦은 ‘내공’이 필요하다. 최근 신 스틸러들의 ‘성공 비법’을 유형별로 나눠봤다.
■ 한번 나와도 강렬하게! 인상파
단 한 장면, 단 1초를 나와도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 한다. 2001년 영화 <친구>에서 “너거 아부지 머하시노”라는 대사 한마디로 존재감을 발휘했던 김광규가 이에 속한다. 뒤를 잇는 인상파 신 스틸러는 <식샤를 합시다 시즌2>에 출연 중인 황석정이 있다. 지난해 <미생>(티브이엔)에서 재무부장으로 단 한회 출연했는데 포털사이트 검색순위 상위에 오르는 등 배우 데뷔 21년 만에 이름 석자를 제대로 알렸다. 하회탈처럼 활짝 웃는 장면과 일명 반전 뒤태로 불리는 장면은 지금까지 회자될 정도로 강렬했다. 개성 있는 외모와 말투가 강점이다. 한번만 보고 들어도 뇌리에 박힌다. 박준화 <식샤를 합시다 시즌2> 피디는 “즉흥연기(애드리브)도 뛰어나다”고 말했다. 개성 넘치게 생겼다고 강렬한 ‘한방’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황석정이 신 스틸러가 된 것은 끊임없이 캐릭터를 분석하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인상파인 황영희도 지난해 <왔다 장보리>(문화방송)에 이어 <광해>(문화방송)에서도 억척스런 아주머니 역을 맡아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 평범함의 특별함! 생활파
이 세상 어딘가에 실제로 살고 있는 것처럼 평범해야 한다. 있는 듯 없는 듯 화면에 녹아들어 드라마의 사실감을 높인다. <앵그리 맘>의 소희정이 이런 경우다. 단번에 눈에 띄지는 않지만, 역을 잘 맡으면 심장을 파고들며 진가를 발휘한다. 소희정은 <앵그리 맘>에서 고등학생 딸의 죽기 전 마지막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보면서 오열하는 장면에서 존재감을 단숨에 드러냈다. 울음을 참으려는 듯 아랫입술이 씰룩이는 장면은 황석정의 미소만큼 강렬했다.
<풍문으로 들었소>의 조연들도 안정된 연기로 드라마의 품질을 높이는 대표적인 생활파다. 유준상의 비서 역인 길해연과 고아성의 엄마 윤복인을 비롯해 박진영, 서정연, 김학선, 김정영, 전석찬, 이화룡, 백지원, 장소연 등 조연들이 드라마를 이끌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 연극에서 주로 활동해 시청자들에게 낯선 얼굴들이라는 점이 오히려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인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안판석 피디는 “드라마의 사실감을 높이려고 캐스팅할 때 가장 많이 고심하는 부분이 현실다운 조연과 단역이다”라고 말했다.
■ 주연을 위협하는 에너지! 카리스마파
조연이지만 주연 이상의 비중과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배우들도 있다. <착하지 않은 여자들>(한국방송2)에 출연 중인 서이숙과 지난해 종영한 <피노키오>(에스비에스)에 나왔던 진경이 대표적이다. 두 배우는 똑 부러지는 말투와 냉철해 보이는 외모가 비슷한데, 주연에 맞서면서 그를 성장시키는 역할로 자주 등장했다. 서이숙은 고교시절 가르쳤던 제자 채시라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괴롭히면서 갈등을 빚는 악역으로 주연 이상의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서이숙은 지난해 한 방송에서 신 스틸러로 불리는 것에 대해 “잔상이 많이 남는다는 게 좋은 건지 모르겠다”는 걱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 연극판에서 닦은 기본기는 기본!
신 스틸러가 유행이 되면서, 너도나도 스스로 신 스틸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무나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개성은 제각각이라도 성공한 신 스틸러들의 공통점은 기본기가 탄탄하다는 것이다. 대부분 연극으로 배우를 시작했고 어떤 역도 소화 가능한 연기력을 갖고 있다. 올해로 데뷔 21년이 된 황석정은 설경구, 이문식 등의 배우가 있던 한양레퍼토리극단에 들어가 연극을 시작했고, 늦은 나이에 다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다. 소희정도 2000년대 초 연극배우로 데뷔해 오랜 무대 경험을 쌓은 뒤 2011년 영화 <써니>에서 담임선생님 역으로 첫 영화 출연을 했다. 진경은 1998년 연극 <어사 박문수>로 데뷔했다. 데뷔 20년이 넘은 황영희도 서이숙도 연극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들이다. 안판석 피디는 “대학로에서 연극하는 배우들이 연기를 잘하는 경우가 정말 많다. 젊은 시절부터 연기 예술에 투신해 뒤를 안 돌아보고 헌신한 사람들”이라며 “연극배우들이 드라마에 많이 등장해 연기 예술의 세계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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